남편이 오랜만에 친한 입사 동기 몇 명과 술자리를 갖는다며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는다.
바쁜 회사 생활에 집에 오면 자기 바쁘고 새벽같이 나가는 사람인지라 얼마나 신이 났는지 퇴근하면 늘 하던 전화도 없다.
친한 동기들을 만나 좋은가보다 하다가도 밤 11시, 12시가 넘어가도록 연락은 없고. 술 값을 냈다는 카드회사의 문자만 연달아 날아오니 나도 슬슬 부아가 난다.
게다가 나는 임산부인데!
괜한 자존심에 전화를 걸어 언제 오냐고 묻지도 못하면서 술에 취해 제대로 집에 오고 있는지 궁금해 베란다 밖을 한참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혼자 기분이 상해 ‘그래, 내일 회사에 지각해보라지. 나는 이제 신경 안 쓸거야!’ 다짐하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 속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문득 며칠 전 남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갓 입사해 동기들과 같이 교육을 받던 시절 몇 명이 험한 농담을 자주 했는데 자신과 너무 맞지 않아서 동기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동기 중 하나가 형도 이제 모임에 나와야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말해 고민이 되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원칙주의자에 매사에 꼼꼼한 성격이라 일 잘한다고 인정도 받고 인사성은 지나칠 정도로 밝아서 발도 넓은 편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또라이 취급을 받기도 하고 남편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게 사실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당신이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만 챙기기에도 바쁜 세상이니 굳이 당신과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러 억지로 모임에 나갈 필요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척 했지만 진취적인 성격 때문에 보수적인 조직에서 남편이 얼마나 많은 눈총을 받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그 날의 대화를 떠올려보니 오늘은 동기 모임에도 나가지 않는 그가 몇 안되는 좋아하는 형, 동생을 만나는 자리였다.
세상에나!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재미있을까?
몇 푼 안되는 용돈도 쓸 시간이 없어 못 쓰는 그가 오랜만에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나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큰 소리도 쳐보고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벌써 새벽 2시가 다 되어 택시비를 지불했다는 메시지가 날아온다.
술을 마시면 늘 편의점에서 햄버거를 사먹는 남편.
아니나 다를까 전화가 온다.
분명히 뭐 먹고 싶은게 없냐는 전화일 것이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사이 전화가 끊어지고 이내 편의점 결제 메시지가 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온 남편은 현관문을 열자마다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로 “여봉~”하고 부르며 나부터 찾는다.
익숙한 그 ‘여봉’ 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큭큭 웃고 말았다 .
남편은 한 손에 반쯤 먹은 편의점 햄버거를, 다른 한 손에는 초코칩 쿠키를 든 채로 뽀뽀해 달라며 입술을 쭉 내민다.
술 냄새 난다며 뽀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샤워부터 하라고 팬티 한 장을 들려 욕실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남편은 술에 취해 몸에 물기도 닦지 않고 나와 정신 없이 팬티에 발을 넣었다.
달려가서 몸에 물기를 닦아주는데 또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중얼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내일 아침에 후회하고 싶어?” 라며 도끼 눈을 뜨고 쳐다보니 이내 바보같이 웃으며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더니 침대에 가서 골아 떨어진다.
3년 전, 이 남자와 두 번째로 데이트를 하던 날,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아는 언니를 만나 커피를 한 잔 마셨다 .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언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자들은 생각 없이 굴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하지. 그런데 화가 나다가도 끊임 없이 용서가 되는 남자가 있더라. 그런 남자랑 결혼하게 되더라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언니가 보낸 카드 한 장이 도착했다.
“우리가 세상 아무것도 모르고 날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조금 철도 들고 세상 맛도 알아가는 나이가 됐네.
결혼 소식 들었을 때 너무나 기뻤다.
기억나니?
나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이제 곧 너의 남편이 될)그 사람을 귀찮은 듯 말하며 결국 영화보러 가던 너의 모습.
사람의 인연은 늘 우리를 놀랍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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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임신하고 집에서 쉬는 중이라 심심해서 기억에 남았던 하루를 기록해봤습니다.
눈팅만 하다가 가입해서 직접 글을 남기려니 괜히 떨리네요.
집에 오면 화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음날 텀블러에 꿀물 담아주고 엉덩이 한 대 때려주고 보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