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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번째 헌혈을 앞두고
게시물ID : freeboard_13286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유는미역
추천 : 4
조회수 : 35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6/23 10:09:38
 나는 17년동안 AB형이었다
부모님이 넌 AB형이라 하셨고 친구들도 '그래. 너 에삐형 같아'라고.
그렇게 17년 동안 당연히 AB형으로 살던 중,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학교에 헌혈버스가 왔다.
뭔가 어른이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신나게 저요저요 하며 달려갔는데
- 학생 혈액형이 뭐라구?
- 아, 저요 에이비형이요!!!
- (채혈 후) ??에이비형 아닌데? B형인데?
- ?!?!?!!!!???!!???

꽃다운 열여덟에 나의 혈액형은 AB형에서 B형이 되었다.
모나미 볼펜심 같은 헌혈 바늘도 뻘거묵죽죽 하고 따듯한 피로 채워지던 채혈팩도 모두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헌혈을 마치고 나오면서 나는 울었다.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에게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나보다.
17년 살아온 내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웬지 서럽고 억울하기까지 했다.

친구들은 뭐냐고 너 어디병원에서 태어났길래 그걸 잘못알았냐고 깔깔댔지만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꺼이꺼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며 부모님은 매우 당황해하신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날카로운 첫경험이 있은 후
나는 B형 인간으로 주기적인 헌혈을 하게 되었다.
수혈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뿌듯함과
학생시절 쏠쏠했던 기념품(상품권으로 받아 도토리를 샀다!!)은 나를 계속 헌혈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해외체류, 수술입원 등등으로 헌혈을 자제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가능할때마다 했다.
주변에 헌혈증을 구하는 분들께 헌혈증을 드리는 것 또한 기쁨이었다.

 간혹 "적십자에서 다 뒤로 빼돌린다. 네가 헌혈 해봤자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받아 쓰지도 못한다. 다 썩혀서 버린다" 같은 믿고 싶지 않은 루머를 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뭐 어차피 나 지금 이만큼 피 없어도 그만인거고 
혹시 내가 헌혈 한 혈액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 해도 그중에 얼만큼은 필요한 곳에 간다는 믿음으로 나는 헌혈을 한다.


 어젠 간만에 눈에 띈 헌혈의 집에 들어갔다.
내 팔에 고무줄을 묶던 간호사께서 '다음에 헌혈하러 올때엔 예쁘게 하고 오셔야겠네요^^' 라는 거다.
오늘 내가 너무 추레하게 하고 왔나 싶어 민망해서 해헤거리는데
'서른번하고 은장 받으실때 기념촬영 하실거에요~'
오늘이 스물아홉번째구나....
서른살이 되기 전에 서른번을 하겠다고 웃으며 농담하던게 현실이 되었구나 

 
새삼 이렇게 건강하게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들고 첫 헌혈하던 날 생각도 나서 끄적여보았다. 

가진거라곤 몸뚱이 밖에 없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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