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대를 꽂은 우유를 마시며
세종대왕 동상 앞을 지날 때
연회색 에나멜 토-오픈슈즈를 신고 새하얀 프릴 미니스커트와 속이 살짝 비치는 하늘색 셔츠를 입은 여자 앞에서 전에 본적 없는 나의 용기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여자는 작지만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전쟁 중 피난 가는 사람처럼 다소 바쁜 걸음으로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걸음은 한번 억지로 멈췄다간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걸음이었지만.
지금의 나를 위해선 이기적이게도 그 걸음을 멈추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초의 망설임 끝에 그 여자 뒤를 따라갔고,
딱풀을 붙여놓은 듯 했던 내 입은 그 여성의 등 뒤에서 간신히 조금씩 떨어졌다.
“저기요”
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했다.
“저기요”
여전히 말이 없었다.
3초를 더 망설이고
그 여자와 나란히 걸으며 다시 한 번 혼신의 힘을 쏟아 입을 열었다.
“저기저기저기요”
나는 오늘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그 여자는 이어폰을 끼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옆에서 말을 건 까닭에 나를 보곤
이어폰을 빼고 힘겹게 멈춰 서서 자신이 최선의 속도로 순항하는 걸음을 억지로 멈춘 불청객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불쾌하지만 자못 궁금한 표정으로 내 얼굴에 집중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같이 바..밥한먹 먹죠?”
웹사이트 베스트오브베스트 게시판에서 본 내용을 어설프게 흉내 냈다.
일하던 식당에 와 자기에게 밥 한번 먹자고 한 여성과 결혼까지 했으니 용기를 내고 다가가라던 조언 글을 며칠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엔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넘긴 글이었지만 내 무모한 용기는 그 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는 수초간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이내 역시 오묘한 표정으로 연락처를 드릴 테니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내가 떠는 건지 땅에 지진이 난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쥐고 있는 휴대폰을 상대방 앞으로 내밀었지만
자꾸만 휴대폰이 떨려 번호를 눌러주던 상대의 손은 썼다 지웠다 톡톡 누르며 반복하고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번호를 저장하고
또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집에 가는 지하철로 향했다.
아마도 그때 내 얼굴가죽 안은 웃음으로 번지고 있었던 것 같다.
지하철 계단을 황급히 내려가며
나도 모르게 기쁨의 욕지거리가 나왔다.
아직은 이 기분을 좀 더 간직하고 싶어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을 때도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기 전까지도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저녁으론 오므라이스를 먹었다.
휴대폰은 식탁 저 모서리에 두고
억지로 책을 읽으면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한 번 정갈한 마음으로 구석구석 샤워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여러 차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마침내 형식적으로 보이는 개떡 같은 문장을 완성했고 서둘러 전송한 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옅은 해가 보이는 이른 아침.
모닝콜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
그녀석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재빨리 꺼버렸다.
구운 김과 볶은 김치, 오징어 젓갈에 쌀밥을 먹고
감색 셔츠에 연청바지, 알록달록한 슬립온을 신었다.
기분 좋은 출근길 이었다.
집 바로 앞엔
직장 바로 앞에서 서는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오 분 정도 서 있다가
버스를 타고 제일 뒷열 오른쪽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두칸 떨어진 자리에 양 갈래로 쪽진 머리를 한 아이가
맹렬하게 울어댔다.
버스가 중화역을 지나 중랑천에 이르렀을 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하마터면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휴대폰이
내 허벅지로 떨어져
서둘러 방금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창밖에서 쨍한 햇빛이 들어왔다.
오월의 어느 하루에만 볼 수 있는 눈부신 햇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