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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돈지랄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 (4)
게시물ID : history_133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32
조회수 : 5621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4/01/01 15:32:23
 
 
-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 -
 
 
 
만력제(萬曆帝)의 치세도 20년째에 접어들던 서기 1592년, 명(明)의 제후국 조선(朝鮮)에서는 일본의 침공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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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
 
임진왜란은 우리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역사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
 
 
 
오랜기간의 평화로 국방력은 물론이고 나라의 기강도 해이해져있던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조선군은 붕괴되었고 임금이 도읍을 버리고 몽진을 하는데다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처참한 패배를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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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린 부산진 전투를 그린 <부산진순절도>


 
제후국 조선이 무참하게 깨지고 있다는 소식은 곧 명(明)의 조정에도 전해졌다. 
 
개전 초만해도 전쟁의 경과가 조선의 패배로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다보니 의심을 산 나머지 조선과 일본이 손을 잡고 우리를 치려하는 것이 아니냐, 조금만 더 지켜보자 등과 같은 여러 의견이 분분했고 파병을 하여 조선을 돕자는 의견까지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과의 상호관계를 따져보다 보니 조선과 우리는 순망치한과도 같은 사이이니 조선이 무너지면 다음은 명(明)인지라 그럴 바엔 고기방패 조선에서 왜놈들을 막는 것이 낫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어 파병이 결정되었고 출병시기는 이듬해로 정해진다. 
 
 
여기서 황제 만력제(萬曆帝)가 조선을 도울 것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관했다고 하는데 야사에서는 평소 자신을 유비(劉備)의 환생으로 여기던 만력제의 꿈에 관우(關羽)가 나타나 조선의 왕인 선조(宣祖)가 장비(張飛)의 환생이니 조선을 도울 것을 권유했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해 만력제의 적극적인 도움을 해석하기도 했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지라 그냥 재미로 보면 된다.
 
 
이렇게 관련된 야사가 전해질 만큼 당시 한창 태정(怠政)으로 일절 정사에는 손도 안대던 만력제가 유독 조선파병에 관해 보여준 적극적인 모습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명군(明軍)의 본격적인 파병은 개전 이듬해인 1593년에 이루어졌다. 작년에 선봉으로 5천여명을 보낸데다 이번에는 본군 4만여명의 출정이었다.
 
 
명군(明軍)과 조선군은 연합하여 전쟁에서의 승세를 잡아나갔고 이후로도 명(明)의 파병은 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에도 지속되어 종전 무렵에는 조선에 주둔한 명군(明軍)은 10만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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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朝明)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전.
 
명군(明軍)의 참전은 육전에서의 전세를 바꾸는데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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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대국이고 선진국가이다보니 군사분야에서도 화약을 이용한 화력이나 전략, 기술에서도 우수했고 특히 당시 명군(明軍)의 주력이기도 했던 기병대는 일찍이 북로남왜(北虜南倭)를 상대로 여러 전투를 거치며 몽골, 만주족 기병들을 상대로 잘 훈련되어 있고 노련했기에 보병 중심이었던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조선침략 전쟁은 1597년을 마지막으로 종전되었고 우리가 국사를 배우면서 익히 알고 있듯이 전쟁은 삼국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원조국이었던 명(明)은 전쟁 7년간 소모된 인력과 물자도 문제였지만 전쟁에 들어간 지출비는 은(銀)으로 계산했을때 무려 700만냥에 달했다. 재정에 있어서 결코 적다할 수없는 규모의 타격을 입은 셈이다.
 
 
제아무리 장거정의 일조편법 개혁으로 막대한 수입을 거두어들여 국가재정이 호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전쟁으로 막대한 비용이 들어 재정의 상태는 서서히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쟁으로 인한 재정지출은 이 임진왜란 뿐만이 아니었다라는 점이다.
 
 
당시 명(明)은 임진왜란과 동시기에 국내에서의 두가지 반란에 직면해 또 이를 진압하는데에도 적잖은 비용을 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임진왜란으로 인한 재정의 타격만이 곧 명(明)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배우고 또 그렇게들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사실 임진난 외에도 명(明) 자국에서 벌어진 반란들로 인한 피해도 감안해서 보는 것이 맞다.
 
 
국내에서의 반란 두가지란 임진왜란 발발직전의 1592년 초의 영하(寧夏)에서의 몽골족 보바이(哮拜)의 반란, 그로부터 1년 후인 1593년 무렵 사천(四川)에서의 양응룡(楊應龍)의 반란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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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무대인 영하(寧夏)는 오늘날 중국의 닝샤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다. 내몽고와는 인접한 지역.
 
 
 
 
보바이(哮拜)의 반란은 순전히 명(明)의 실책으로 인한 사건이었다.
 
 
만력제의 파업으로 정사를 일임받은 환관세력이 발호했음은 전편에서 밝혔다. 사타구니가 허전한데다 머리마저 공허했지 싶은 환관들은 영하(寧夏)의 몽골족들에게 영농을 강요하고 과한 세금을 물리는 한편 얼토당토 않은 공물을 요구했다.
 
자고로 몽골족은 유목민족으로 농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명(明)의 환관들은 몽골인들에게 영농을 강요하고 거기서 생산해낸 토산물을 뜯어내려고 한 것이다. 거기다 막대한 세금도 물려서.
 
몽골인들은 명(明)에 투항한 항장출신의 동족사람인 보바이(哮拜)를 찾아가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줄 것을 청했고 보바이는 명(明) 조정에 항변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동족에 대한 학대와 멸시 뿐이었다.
  
 
1592년 2월, 명(明)의 억압과 폭정에 분개한 보바이의 주도하에 몽골족은 영하(寧夏) 일대를 점거하여 명(明)의 세력을 축출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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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기르고 사는 우리더러 농사를 지으라고?
 
 
 
명(明) 조정에서는 즉각 토벌군을 보내 진압하게 했지만 몽골족의 기세에 눌려 패퇴했고 난은 그해 9월까지 지속되며 명(明)의 서북방을 어지럽힌다. 설명으로만 보자면 그냥 소요에 불과해 보이지만 난의 규모는 컸다. 거기다 보바이가 왕국을 세우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으니 보바이의 세력규모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좀처럼 난이 사그러들지 않고 골치를 썩이자 조정에서는 당시 요동 사령관이자 북방 오랑캐 전문킬러 이성량(李成梁)의 아들인 이여송(李如松)을 불러다가 토벌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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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李如松).
 
몽골, 여진족과 같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공을 세운 행적으로 전편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이성량(李成梁)의 아들이라 그런지 이여송도 이번 몽골족 보바이의 난을 진압하는데에 공을 세운다.
 
 

이여송(李如松)은 수도 북경(北京)으로 통하는 북쪽 요충지인 선부(宣府)라는 곳을 지키는 부총병(副摠兵)으로서 오늘날로 말하자면 수도 방위 사령부의 사령관이었다.
 
마땅히 수도를 지켜야할 수도 방위군을 빼다가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게 시켰다는 뜻은 그만큼 인근 지방의 주군(州軍)을 동원해서 안될 정도로 당시 난의 규모와 그 심각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대목이라 하겠다.

여하튼 조정의 명을 받아 선부(宣府)의 병력을 이끌고 토벌에 나선 이여송은 9월 무렵에 보바이와 그 세력을 말끔히 일소하는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이 이여송(李如松)이 통솔하는 선부(宣府)병력은 당시 명(明)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예비전력으로, 본래 조선에 파병할 병력이었지만 보바이의 난을 진압하는 바람에 파병이 늦어지게 된다.

보바이의 난은 무려 7개월간 지속되었었다. 또한 거기에 들어간 지출비는 은(銀)으로 약 200만냥 가량. 임진왜란에 소비된 지출비의 1/3 수준이지만 임진왜란과 보바이의 난이 동시기에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동일기간의 두 전쟁으로 소비된 비용은 막대했다.
 
 
그 뿐만 아니라 보바이(哮拜)의 난이 진압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멀리 서쪽의 사천(四川) 땅에서 문제가 생기니 이를 양응룡(楊應龍)의 난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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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의 사천성(四川省).
 
 
 
반란의 핵심인물인 양응룡(楊應龍)은 사천(四川)의 도지휘사(都指揮使)로, 해당 지방을 관할하고 다스리는 일종의 지방관이라 할 수있는데 양응룡은 특이하게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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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苗族).
 
오늘날에도 중국의 사천(四川), 귀주(貴州), 운남(雲南) 등지 외에도 동남아시아의 태국, 미얀마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이다.
 
 
평소 명(明)의 조정으로부터 독립할 계획이라도 품고 있었는지 자신의 담당지역인 사천(四川) 외에도 주변지방인 귀주(貴州 : 윗 지도에서의 구이저우성), 운남(雲南 : 지도에서의 윈난성)에까지 은근슬쩍 세력권을 형성하다가 주변 지방관으로부터 조정에 고소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지방에서 반란이 도모되고 있다는 소식에 명(明) 조정에서는 양응룡을 체포하려 병력이 출동했을 터. 그러나 양응룡은 잘못을 빌기는 커녕 도리어 내친김에 동족 묘족(苗族)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소수민족이 무턱대고 대국 명(明)에 대항해 반기를 들었을리는 없고 아마 위의 보바이의 몽골족과 같은 경우로 사전에 명(明)의 탄압으로 인해 고조된 반감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린때는 반란을 일으키고 3년이 흐른 1597년으로, 명(明)의 군대를 족족 격파하며 사천(四川), 귀주(貴州), 운남(雲南)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독자세력을 형성하고 1600년까지 난을 이어갔다.
 
 
소수민족 묘족(苗族)이 명(明)을 상대로 몇년간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사천(四川), 귀주(貴州), 운남(雲南) 일대와 중국 서남부 지역이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거주지이면서 기반이되는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호광(湖廣 : 중국남부)의 묘족과도 연합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명(明)이 그동안 임진왜란도 병행해서 치루느라 병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키지 못했던 탓에 양응룡(楊應龍)의 반란을 초장에 진압못한 감이 있었던지라 임진난도 종결지은 시점인 1600년에 들어서는 명(明)의 본격적 토벌이 시작되어 묘족(苗族)은 격파당하고 결국은 해룡돈(海龙囤)이란 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지만 곧 함락당하고 반란의 주모자 양응룡(楊應龍)이 자결함으로서 난은 진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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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룡돈(海龙囤) 요새유적.
 

 
결과적으로 양응룡(楊應龍)의 반란이 갖는 의미는 4년동안 명(明) 제국의 한귀퉁이인 서쪽의 사천(四川), 귀주(貴州), 운남(雲南) 일대를 뒤흔들며 물고 늘어져 명(明)의 국력을 소진시킨데다 이 바람에 명(明)이 서쪽에서의 반란에 몰두하느라 동북에서의 여진족의 성장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있다.
 
여기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 은(銀) 수백만냥이 쓰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임진왜란, 보바이의 난, 양응룡의 난을 만력제 치세에 이루어진 세가지의 대정벌이라 하여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 이라고 부르며 여기에 쓰인 막대한 비용으로 인한 타격이 만력치세의 명(明)이 쇠락기에 접어드는데에 일조했다고 보는 것이 정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 외에도 만력제는 엄청난 거금을 들여 각종 사치를 일삼았는데 그 액수는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 에 들어간 비용을 능가했다. 대관절 뭐에다 돈을 쏟아부었기에 전쟁이라는 국가 중대지사에 들어간 돈보다 더 많았는지는 차차 알아볼 일이다. 이러니 재정이 남아나지 않을 수밖에..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광세의 해(鑛稅─害)' 라 불리우는 폐단을 낳은 새로운 세금제도를 제정해 이미 파탄날 대로 나있던 재정의 구멍을 메꾸려 든 조치였다.
 
 
이는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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