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라는 표현이 시대정신처럼 유행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과 주장이 다른 축을 ‘혐오종자’로 규정하거나 ‘극혐’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없는 데 비해서 ‘혐오’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행태를 ‘혐오’라고 표현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다. 대개 충돌하는 양 진영 간에서 ‘혐오’라는 개념 자체를 비대칭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혐오에 관련된 논쟁은 대개 평행선을 달리는 지독한 소모전 형태가 된다.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이 글에서는 혐오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틀에 따라 사람을 둘로 나누려고 한다. 하나는 대중 진영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 진영이다. 대중 진영에서의 ‘혐오’는 조금 협의적이다. 의식적인 배척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인식하는 개체는 똥이나 바퀴벌레 같은 물체들이다. ‘혐오’에 대해 협의적으로 이해할 경우, 운동 진영에서 외치는 ‘여성 혐오’,‘외국인 혐오’,‘장애인 혐오’‘성 소수자 혐오’는 사회적 약자를 똥 보듯이 하는 존재‘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운동진영에서 말하는 것에 비해선 꽤나 협소해지지만 실제로 이런 식의 혐오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그 역시 대화와 설득을 통해 바꾸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대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교정을 요구하는 발언이 나오며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운동 진영에서 말하는 ‘혐오’다. 여기서 ‘혐오’는 앞에서 말한 의식적인 배척은 물론, 역사적으로나 교육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소수 집단에 대한 일상적인 배제까지 포함하는 조금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체에 대한 판단의 준거가 속성이 되는 것을 혐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말이 어려우니 예시를 들자면, 여자가 약속 장소에 늦으면 ‘여자는 이래서 안되는 것’이라고 하다가도, 남성이 약속 장소에 늦으면 ‘그 새끼는 이래서 안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행태가 있다면 ‘여성 혐오’라고 말하고, 조선족이 범죄를 저지르면 ‘조선족은 이래서 안되는 것’이라고 판단하다가도, 한국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저 새끼 나쁜 새끼네’라 말하는 행태를 ‘외국인 혐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별개로 실제로 ‘소수자 집단이 다수자 집단에 비해 비행을 벌이는 행태가 많지 않냐’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소수자 집단이 다수자 집단보다 비행을 많이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해당 속성의 과반수를 넘지 않는다면 난 여전히 그 비행을 속성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일탈로 생각할 것이다.)
운동 진영의 혐오 규정과 대중 진영의 혐오 규정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싸울 때는 같은 단어를 쓴다. 그러니 이런 결과가 나온다.
운 : 너는 소수자 혐오 발언을 했어. (너의 발언은 소수자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어.)
대 : 아니야. (아니, 나는 소수자를 똥이나 바퀴벌레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아. )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다. 대중 진영에는 소수자를 의식적으로 배척하는 부류도 물론 있고, 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역사적, 개인적인 판단에서 무의식적 배제를 인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운동 진영은 최근 1년간 혐오에 관한 담론을 키워오면서 대중 진영을 싸잡아 비판해왔다. 대중 진영은 그 덕에 운동진영에 대한 탈력감과 피로감, 심지어는 혐오감까지 키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혐오감은 무의식적 배제가 아닌 의식적 배척을 말한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 부분이다. 논의가 여기서 평행선을 달린 채 지속되면, 운동 진영은 대개 자신에 대한 적개심을 소수자 집단에 대한 적개심으로 치환하려 들고, 대중 진영의 운동 진영에 대한 적개심은 일정 부분 실제로도 소수자에 대한 분노로 옮겨간다. 혐오를 줄이자는 운동이 소수자에 대한 적개심을 늘려서야 안 될 일 아닌가.
개인적으로 운동은 대중을 변화시키려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운동의 언어는 대개 처음에는 대중에 대한 배려가 없고, 다음에는 반향에 대한 성찰이 없다. 그런 식이면 누구라도 운동 진영의 언어를 배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운동 세력이든 대중 세력이든, 혐오의 용법과 정의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볼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