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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다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유우성은 간첩이 아니다. 국정원은 무고한 사람을 잡았다. 대법원 판결까지 난 마당에 더 할 얘기가 있나 싶었다. 미안한 마음에 후원은 했지만, 막상 영화가 개봉하고 나니 보고 싶지가 않았다.
지겹고 불편했다. 힘없이 쓰러진 이들의 억울한 목소리, 그들을 위해 싸우는 최승호의 빤빤한 얼굴,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가해자들의 뻔뻔한 혀. 이 변함없는 레퍼토리가 지겹고 불편했다. 이런 세상을, 내 무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백'을 보러 가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좋지요."라고 답을 보냈던 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고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라, 그걸 외면하는 것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이니, 자꾸만 늘어지는 몸을 추슬러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에는 김기춘, 원세훈 같은 익숙한 이름뿐만 아니라 재일동포 이철, 김승효 같은 생소한 이름도 등장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혹독한 고문 끝에 내가 간첩이라는 자백을 해야만 했던 이들. 새파랗게 젊은 시절을 통째로 감옥에서 보내고, 이젠 새하얗게 머리가 세어버린 두 사람을 화면으로 마주했다.
이철이 여전히 생생한 듯 말했다. 극심한 고문을 견딜 수가 없어 혀를 깨물었다고, 쉽게 잘릴 줄 알았는데 혀가 그렇게 두꺼울 줄은 몰랐다고, 꽉 깨물면 깨물수록 더 탱탱해지는 느낌이었다고, 시간이 흘러 자기 자신도 당시 충격으로 돌아가신 부모님 나이가 되었을 때, 너무나 죄송스러웠다고, 붉어진 눈시울로 힘겹게 말했다.
그가 무려 4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최승호가 김기춘을 찾아가 물었다. "미안하다는 마음 안 드십니까?" 답을 피하는 그에게 거듭 물었다. "사과할 생각 없으세요?"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는 그를 보며 울컥, 하고 말았다. 저이들은 아무런 가책 없이 잘만 사는데 왜 우리는, 왜 우리는 아직까지도 서로 힘들어하고 자책해야 하는지, 억하고 분했다.
함께 잡혀갔던 친구들이 김승효에게 당시 기억을 묻자, 그는 불안하고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미처 소리가 되지 못한 말들. 그렇게 한참을 중얼거리던 그는 놀랍게도 한순간, 또렷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한국말로.
"그것이 박정희의 정치야. 어떤 정치냐 하면 청와대 정치고 중정의 정치야. 어떤 것이라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야…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왜냐하면, 무죄로 못 됐으니까. 죽고 싶단 말이야. 나는 무죄야..."
가슴이 저릿, 했다. 흔들, 흔들, 불안해 보이기만 하던 그가 무려 40년이 지난 지금, 선명하게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온전했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백하고 있었다. 한국이 얼마나 나쁜 나라인지 아느냐고,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싶다고, 하지만 한국에는 안 갈 거라고, 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안 갈 거라고
똑똑히 말했다. 그를 평생 괴롭혀온, 평생 멈출 수 없었던 생각 같았다.
그 세월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인간이라는 것이 미안했다.
여기까지 글을 써놓고 한동안 글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뻔한 얘기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던 중에, 믿기 힘든 일들이 일어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되더니, 결국엔 구속되기 이르렀다. 블랙리스트를 만든 김기춘도 덩달아 끌려갔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제 와 법의 심판이 어렵다면, 그저 일말의 죗값을 치렀으면 했다. 부끄럽다거나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든 불편해지길 바랐다. 재판이 늦게 끝나 밥을 굶어 힘들다는 김기춘의 하소연에 실소가 터졌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영화에 따르면 간첩 조작 사건은 7,80년대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97년을 기점으로 뚝 끊긴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니, 놀랍지 않다) 이명박 정권 말기에 부활한다. 내 또래라면 중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했을 시기다. 민주주의의 적은 이제 다 사라졌다 믿었던,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공기처럼 잊고 살아도 좋았던 시기.
아버지 생각이 난다. 서울 사는 아들보다 더 열심히 광화문에 나가던 당신. 탄핵안 발의 즈음,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지 걱정하며 집을 나섰다가, 압도적인 인파에 흥분된 목소리로 아들에게 전화하던 당신. 몸이 아파 꼼짝을 못하면서도, 혹시나 탄핵이 기각되진 않을지 애 태우던 당신을 기억한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간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떠올린다.
80년 5월의 봄, 도청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청년을 그려본다.
평생 마음 속에 지고 온 그 짐, 이제는 좀 덜었냐고 물어본다.
헌법재판관이 "피청구인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문장을 소리내 읽던 순간
난 기쁠 수 없었다. 당신이 여기 없어, 함께 웃지 못했다.
그러니 살아야겠다.
가까스로, 되찾은 봄을 살아야겠다.
지난 겨울, 끝까지 광장을 지킨 시민들에게
지치지 않고 촛불을 든 우리 모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