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항암치료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서울에 오신다. 서울에 오시면 병원이 가깝다는 이유로 우리 집에 계시는데, 사랑하는 손자인 삼삼이
때문에 우리 집에 계신다는 것은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우리 부부는 잘 알고 있다. 삼삼이도 기분이 좋은지 아버지께서 오신 날이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할아버지와 놀고 싶다고 떼를 쓴다. 특히 할아버지와 공을 던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를 공하삐
라고 부른다.) 아버지께서 "삼삼아~ 할아버지 왔다~" 하시며 현관문을 열때 삼삼이는 인사보다 "하삐야!" 라고 소리 지르며 공을 먼저 던질 정도다.
다음 주 월요일 입원을 앞둔 아버지는 삼삼이가 보고 싶으시다면서 평소보다 며칠 더 일찍 서울에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서울에 오셨을 때 가장
좋아했던 건 아들인 나도, 며느리인 와이프도 아닌 바로 손자 삼삼이였다. 삼삼이는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내가 얼마 전 사준
포크레인 장난감을 자랑했고, '주스 먹어' 하며 자신이 먹고 있던 빨대를 아버지 입에 갖다 댔다. 내가 한 입 달라면 인상 쓰고 매몰차게 거절하던
녀석인데... 그리고 그 주스는 내가 번 돈으로 산 건데...
엄마, 아빠의 '할아버지 힘드셔' 라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와 아버지에게 안기고, 목에 매달리며 아버지와 놀았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도, 씻을 때도 "하삐랑!! 하삐랑!!' 하며 아버지와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잠잘 때도 엄마가 아닌 하삐를 찾으며 잠들었다.
할아버지와 자겠다는 삼삼이를 와이프가 달래면서 재우러 들어갔을 때 그제야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
"성성아.. 너는 할아버지 기억나니?"
"아뇨.."
할아버지는 내가 7살 때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내가 멍청해서 그런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너희 할아버지가 너 엄청나게 예뻐하셨는데, 어렸을 때 네가 여자애처럼 귀엽다고 머리에 핀 꽂아주시고.. 허허허.."
"서..설마요.. 제가.."
"우리 삼삼이가 나중에 할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내 소원이 우리 삼삼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손잡고 가서 옷 한 벌 사주는 건데.."
"어유. 그런 말씀 하시지 마세요. 나중에 삼삼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가는 것도 보셔야죠. 아버지가 삼삼이 대학교 입학금 내주시기로
약속했잖아요. 대학도 할아버지만 믿고 비싼 사립대 보내버릴 건데.."
아버지는 삼삼이가 자기 전 벗어놓고 간 옷을 만지시며 "우리 삼삼이 많이 컸구나..." 하시며 잠시 무슨 생각을 하시더니 피곤하시다며
먼저 잠드셨다. 항문 쪽에 통증으로 제대로 눕지 못하고 옆으로 웅크려 주무셔야 하는 아버지를 보며 많이 힘드셨을 텐데 그동안 암과 잘 싸워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이지만 조금만 더 삼삼이가 할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을 나이가 될 때까지만 이라도 아버지께서
버텨주시면 좋겠다.
다음 날 아침 삼삼이는 내가 출근을 준비할 때 눈을 비비고 일어나자마자 할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노인들은 새벽잠이 없다고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셔서 뉴스를 보고 계신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삼삼이는 또 "하삐~~" 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내가 출근할 때 자기도 할아버지와 함께 자기도 일하러 간다고 떼를 쓰다 결국 우리 삼대는 지하철역까지 출근을 함께했다.
왼쪽에는 나, 오른쪽에는 아버지 그리고 가운데 삼삼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데 삼삼이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우와~~하삐 구구다!!" 하며 소리쳤다. 지하철 역에서 할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은 내게 "아빠 안녕~~" 하며 손을 흔들고 아버지는
내가 세 살 어린아이도 아닌데 "일찍 와라. 조심히 다니고.." 하시는 모습을 보며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보면 "아빠~~치킨 사줘" 하며
달려가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등에 업히는 것과 아버지의 땀 냄새를 참 좋아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그와 거리감을
두게 되었다. 삼삼이도 언젠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대하겠지만, 내 아버지가 내게 하셨듯이 나도 아버지로서 후회 없이 이 아이를
사랑해줘야겠다.
그리고 오늘 퇴근하면 오랜만에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 드려야겠다.
아버지께서 "이 자식이 징그럽게 왜 이래..술 처먹었나..." 하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