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이 세계가 완벽한 신의 섭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고 보일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겐 각자가 뿌린대로 거두어가는 공정한 원칙에 의해 돌아간다고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와 이 현실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구분해서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완벽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모순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선천적 장애, 질병, 자연재해, 전쟁만을 보더라도 이 세계는 완벽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완벽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응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이러한 문제점을 무시하고 시야를 좁히는 것이다. 나와 주변에 장애, 질병, 재해, 전쟁등이 발생하지 않고 살아갈만 하다면 충분히 이 세상을 완벽하고 아름답게 볼 수 있다.
그 럼에도 인간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에 비록 나와 주변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더라고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많은 문제점들 을 보게된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해서 완벽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장애, 질병, 재해, 전쟁등은 인간의 죄 에 대한 신의 벌이기 때문에 오히려 완벽한 섭리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신을 믿지 않는 나라들이 가난하다' '성탄절에 놀러가니 쓰 나미를 만난 것이다' '질병은 신의 징벌이다'
이와 같이 불완전한 세계의 실상을 가리기 위해 증오를 부추기는 말들 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순을 가리기 위해 한편으론 증오를 부추기면서도, 다른 한편 으론 신의 사랑이란 이름 아래에서 이들을 용서하고 살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애초에 자신들의 완벽한 세계관이 없었다면 '죄 와 벌 그리고 용서'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이러한 이야기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이 종교의 본질도 아니고 오히려 극복되어야 될 자세이며 종교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또 다 른 영역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을 발견할 수도 있다. 바로 정치적 세계관으로서 보수적 세계관이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세계관은 기존 의 질서를 지지한다. 그것이 꼭 자신의 이익과 부합하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가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완벽한 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 물었던 것과 같이 이들에게 현실의 질서가 과연 공정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들의 반응 또한 유사하게 나타난다.
나와 주변을 보니 열심히 산 사람이 성공하더라. 세상은 자신이 한 만큼 결과를 가져오는 공정한 곳이다라고 제한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들에게 사회적 약자와 불평등은 신의 징벌과 같이 무능과 나태에 따른 공정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때문에 공정한 세상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불평등은 필요한 것이 되고 증오의 대상이 된다.
비 록 죄에 벌을 내리지만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것 처럼, 이들 또한 사회적 약자와 불평등에 대해서 무능과 게으름을 질타하지만 제한적 인 시혜를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는 않다. 다만 그것이 게으른 사람을 더 게으르게 만들지 않는 선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자신의 세계관으로 죄인을 만들어 버리고 용서를 베푸는 것 처럼, 무능하고 게으른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시혜를 배푸는 것이 단지 자신이 도덕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닌지도 생각이 된다.
한 때, 질 병이 신의 징벌로 여겨져 치료를 거부하여 수 많은 인명을 희생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질병은 종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 지고 적극적으로 질병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세계관이 바뀜으로 인해 인류의 삶을 증진 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정의로 운 세계관에 빠져서 세상의 모순에 눈감아 버리지 않고, 세상의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면 인류의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