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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언죄_여느 #못골라_안골라_노래_두곡임 #스크롤_겁내_길어요
게시물ID : mabinogi_1335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리에나
추천 : 8
조회수 : 73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0/18 23:41:20




하고싶은거 두 곡으로 골라 넣어봤습니다. 못고르겠더라구요 -_ - ; ;;;


위에꺼는 에반게리온 : 서  Rei - Opus V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느님이 1과 2로 나누어서 달아주셨는데, 1에는 즐거운 나의 집, 전반적인 분위기엔 레이 테마..정도?-_-?


-


언제부터인가 적을 베어넘길 때마다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즐거워서가 아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정신이 버티지 못할 뿐. 부서질듯이 두들겨대는 피아노의 굉음이 머리속을 웅웅 떠돌며 하모니를 이룬다. 가볍게 단검을 치켜들자 자신의 머리 위로 칼을 휘둘렀던 적의 목이 꿰뚫리는 감각이 손 끝을 타고 흘러넘친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피가 가느다란 팔꿈치를 타고 뚝뚝.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소녀는, 몸 옆으로 시체를 흘려넘겼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또다시 몸을 노려 치고들어오는 창. 방심했으리라고 생각했겠지만 그정도 방비도 없이 적진 한가운데로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뼈다귀만 남아서 휘청휘청 서있는 주제에 자신을 향한 적의만이 또렷한 것이 우습다. 연은 그 품에 파고들어 목 관절에 칼을 꽂았다. 전투를 반복하며 생긴 버릇이었다. 어차피 싸워야할 상대라면 최대한 빨리, 고통없이 보내주기 위한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스스럼없이 연은 칼을 비틀었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마족의 문장이 번쩍 빛나고, 흰 뼈의 병사는 뼈로 돌아갔다. 와스스 무너져 빠른 속도로 공기로 흐트러지는 뼛조각들. 제 모양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마족들의 시체가 사라져간다. 하지만 소녀가 뒤집어쓴 피는 끈적하게 남아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린다. 익숙하다.


'저대로 둘건가?'

"....언제는 마족한테 장례를 치뤄준 것처럼 말하네."

'네가 최근엔 힘들어보이니 하는 말이다.'

"됐어."


참견쟁이. 뒷말은 꿀꺽 목 뒤로 삼킨다. 코웃음을 치며 짐짓 발걸음을 경쾌하게 옮긴다. 은은하게 빛나는 정령이 제 옆에 나란히 섰다. 엄밀히 말하자면 옆에 둥둥 떠있는 것이다. 에린에 오고 얼마 안되어 뭣도 모르고 계약한 검의 정령. 엘프인 자신이 검의 정령을, 그것도 단검에 이식시켰다는 사실에 주윗사람들은 경악했다. 파기하라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이만큼 기댈 수 있는 '동료'는 없었다.

더이상 마족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림자 세계의 라흐 왕성은 그 공기조차 끈적하게 목을 메운다. 불쾌한 표정으로 모든 문을 발로 뻥뻥 걷어차가며 수색을 하던 연의 눈에 드디어 20대 중반 정도의 청년이 띄었다. 이 사람이 이번에 마족에게 납치된 이인 모양이었다. 연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발로 툭 걷어찼다.


"이봐요."


무엇을 당했는지 제법 세게 걷어차였을텐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봐서는 죽지는 않은 것 같은데. 몇번 더 깨워볼까 고민하던 그녀는 그냥, 청년을 어깨 위에 훌쩍 둘러멨다. 열댓살의 가녀린 체구와 다르게 가뿐하게 그를 들춰멘 연은 주머니에 있던 귀환석을 꺼내 입 안에 집어넣고 깨물어 부쉈다. 빛무리가 금새 그녀를 감싸안고, 발 끝부터 찬찬히 바깥으로 내보낸다.

현실에 발을 딛는 순간 자신을 기다리던 투아하 데 다난이 울며 뛰어왔다. 짐을 내리듯 바닥에 훌쩍 집어내린, 이 청년의 약혼자라고 했던가. 감사하단 말을 연신 반복하며 눈물로 온 얼굴을 적시는 여자. 아직 청년은 눈을 뜨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또 부탁할 것은?"

"없어요, 없습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그래."


용무가 없다면 이것으로 끝이다. 연은 이제 연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않고 발걸음을 옮겨 페이단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상 내놔. 무보수 아니었잖아."

"....뭐 그렇긴 했습니다만."


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그의 태도가 이상해 가볍게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였다. 문득 자신의 손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까 흘러넘친 피를 닦아내지 않아 손끝부터 팔뚝까지 온통 말라붙은 피가 버석버석 부서지고 있었다. 너무 오래, 그리고 자주 묻어있는 피라 부주의했던 모양이었다. 연은 내밀었던 손을 내리고 뒤로 감췄다.


"...미안. 신경을 못썼네."

"아닙니다. 저도 제법 전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니까요. 그냥 좀 어색했습니다. 당신께서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양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습니다."

"그것 참 큰일이네. 나 자주 이러는데."

"제가 더 노력해보죠. 그럼 이번 보상은 일단 부엉이를 통해 보내도 되겠습니까?"

"그럼 부탁할게."


다른 이가 보면 몹시 위화감을 느낄 광경일 것이다. 전장의 화염을 닮아 검게 그을린 피부, 성벽과 같이 굳건하게 선 타라 친위대의 대장의 가슴께도 오지 않는 소녀가 그에게 하대하고, 또 자연스레 그것이 받아들여진다. 외려 그녀에게 존대를 하는 모양이 그들에게는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대우를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세계를 몇번이나 단신으로 구해낸 영웅된 자로 그정도 대접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외려 그것이 너무한 일이다.

소녀는 밀레시안이었다. 모래바람 사이에서 혼자서 눈을 떴던 그 날, 바로 그 날 밤에 연은 꿈을 꾸었다. 검은 날개를 달고 쇠사슬에 묶인 여신의 꿈이었다. 들리느냐고, 구해달라고. 온통 흔들리는 그 어두운 광경 안에서 여신이 애원했었다. 그 날부터 그녀의 삶은 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여신을 구하고, 에린을 구하고, 드래곤의 감응자가 되고, 반쪽짜리 신이 되고, 세상을 또 구하고. 숨막히게 몰아치는 삶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긴 삶도 아니었을텐데 그녀는 어느 순간 너무 강해져있었다. 반역자 루 라바다의 목을 베어 떨어뜨렸을 때, 그녀의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연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제비라는 뜻인지, 인연이라는 뜻인지, 혹은 하늘을 나는 연이라는 것인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원래의 제 이름보다 누군가가 부른 애칭이 더 오래남아 자신은 연이라고 불렸다. 그리 살고 있었다.


오늘도 흠뻑 지친 걸음으로 휘청휘청 걸음을 옮겼다. 죽이는 것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다. 익숙해져서도 안되었다. 자신의 팔을 타고 흐르던 뜨끈뜨끈한 생피가 굳어 얽어매는 이 ... 기분. 타라를 좋아하는 것은 한적한 어느 시골마을보다도 몸을 숨기기 좋은 장소기 때문이었다. 이곳과 똑같은 그림자 세계를 몇번이나 이잡듯이 수색하고 다닌 그녀로서는 어떻게 보면 타라는 손바닥보다 작은 동네였다. 골목 사이로 몸을 숨긴 소녀는 이번엔 목걸이를 쥐었다. 동그란 팬던트 모양의 유리알 안에는 기사단의 문장이 새겨져있다. 그것에 신성력을 주입하고 눈을 감았다, 떴다. 딱딱한 돌바닥이 그녀를 맞이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조장님! 이게 또 무슨 꼴입니까!"


슈안이 기겁해서 달려온다. 누가 조장이야, 당신 내 조원 아니잖아.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서 로간도, 다른 조원들도 자신을 힐끔힐끔 돌아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오기 전에 훈련을 시켜놓고 떠났었다. 돌아와서 종료시켜주는 걸 깜빡하고 있었지. 이 우직한, ...우직한, 조원들은 내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는 훈련도 그만두지 못하니까.


"....슈안. 나 대신 애들보고 훈련 종료하고 쉬라고 전해줘. 그리고 뜨거운 물 좀."


나 씻고싶어. 피칠갑을 한 팔을 내밀며 부탁하자 슈안은 알았다며 잰 걸음으로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이 애들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나. 요령 좀 피워도 될텐데. 내 말 한마디에 흔들흔들 흔들리는 조원들이...귀찮다. 그런 생각을 하자 몰아쳐오는 피로감에 연은 발을 거의 직직 끌다시피하며 간신히 훈련소 한켠에 준비되어있는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그 어느 것보다도 뜨거운 물이 가득한 욕조가 제일 그리웠다.

뜨거운 물에 흘러나가는 피냄새가 새삼 역겹다. 바닥에 붉은 핏물이 흘러나가고, 손톱 밑에 번져든 핏물을 비누거품으로 씻어낸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숨을 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이 얕은 욕조라도, 내가 그대로 잠겨버린다면 죽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연은 코웃음을 쳤다. 밀레시안에게 죽음은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소녀는 밀레시안이었고, 죽지않는 불사의 몸이었다. 호흡이 끊어져 멈춰도 피닉스의 깃털 하나면 언제든지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괴물'. 아니, 그보다도 숨이 멎어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밀레시안의 괴로운 점 중 하나였다. 시체가 되어 소리 하나 흘리지 못하게 되어도, 머리가 으스러져도 의식은 남아 허공을 떠도는 그들은, 자신은, 너무 강해 문제였다.


"아..아...죽고싶어..."


입 밖으로 저도 모르게 한숨같이 흘러나오는 죽음을 향한 갈망. 그 말에 뒤따르듯 눈물이 절로 주르륵 쏟아져내린다. 언제부터인가 갈망하게 된 그것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들으면 아마 비명을 지를만한 종류의 것이다. 연 스스로도 분별력은 있어 한번도 남 앞에서 뱉어본 적 없던 말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죽여드릴까요? 연."

"누구야."


알몸인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순식간에 욕조에서 뛰쳐나온 그녀의 손에는 어느샌가 정령이 들려있었다. 물에 한번 담가 엉긴 피만 대충 긁어낸 탓에 여기저기 핏기가 남아있는 검은 서슬퍼렇게 날이 서있었다. 그 날붙이만큼 서늘한 눈으로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미고 있는 연에게, 낯 모르는 이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이 에린에 날 모르는 사람은 없어."

"아니, 그들도 당신이 죽음을 원한다는 것은 모르죠."

"너도 방금 들은걸로 알았겠지. 그리고,"


연은 칼날을 그의 목에 대고 꾹 눌렀다. 물기와 함께 피가 주르륵, 칼날을 타고 흘러내린다. 또다시 연의 팔뚝은 핏줄기로 젖었다.


"여기서 널 죽여버리면 그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될거야."

"그걸로 괜찮습니까? 계속해서 소중한 사람을 잃는 삶도 나쁘지 않은 모양이십니다."

"..........너, 누구야."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야, 조장."

"........"

"야!"

"디이, 그만."

"근데 완전 넋 빼놓고 앉아있잖아. 저, 저, 저거 봐. 또 흘린다."


음식에 헛손질하기 예사요, 포크로 찍어올린 음식도 태반을 흘린다. 제 입에 들어가는지 안들어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고 있을 뿐인 연에게 아무리 말을 던져도 제대로 듣고있지도 않아 다들 의문스럽게 여겼다. 결국 먼저 손을 움직인 것이 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로간이 걸어가 연의 어깨를 짚자, 그제야 연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장님. 식사는 제가 따로 가져다드릴테니 오늘은 들어가서 쉬는건 어떠신가요? 무척 피곤해보이십니다. 보세요. 옷도 음식으로 엉망이고."

"..........아..그러네......."


로간은 또 그 상태로 굳어버린 연의 손에서 포크를 내려놓고, 물에 적신 냅킨으로 꼼꼼히 입가를 닦아준 후 그녀를 번쩍 들어올렸다. 평시라면 마구 발버둥을 쳤을 그녀가 얌전히 안겨있는 모습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전부가 조용히 침만 삼켰다. 애초에 그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제 발로 움직일 겨를도 없다는 것이, 연이 오늘 심상치 않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안에 데려다드리고 오겠습니다."


로간이 그녀의 방에 연을 앉히고, 조심스레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음식물로 엉망이 된 옷을 천 너머에서 벗어낸 연에게 옷을 건네받고, 갈아입을 가운을 건네주는 동안 로간은 그녀를 배려한 것인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 다시 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쉬고 계셨으면 합니다. 그런 말을 남기고 로간이 문 밖으로 나갔지만 그녀의 머리 안에는 단 한마디만 가득했다. 갑자기 욕실에 나타난 청년이 한 말.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 한마디가 아직도 머리 속에 윙윙 울린다. 얼어붙은 자신에게 여유있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청년은 연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검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팔이 힘없이 옆으로 떨어졌다. 청년은 한걸음 물러서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연을 바라보고 서있을 따름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연이었다.


"정말로, 나를 죽여줄 수 있다고? 신인 나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도 오만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 하나뿐. 그녀는 오만해질 자격이 충분한 이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 아무리 강한 무엇이라도 연은 맞서 이겨야했다.  그래서 신을 꺾었고, 사도를 꺾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타이틀은 이미 예전에 흘러넘긴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죽었던 공포가 언제였는지 아득해지는 마당에, 자신을 죽여줄 수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쉬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청년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마주지었다. 화사한 얼굴로 자신에게 계획을 말해준 뒤, 청년은 연이 그를 붙잡을 새도 없이 그야말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팔에, 검날에 흘러내린 핏망울 뿐.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그는 자신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 계획을 정말로 실행할 수 있다면 그녀는 죽을 수 있을터였다.


"조장님, 괜찮으세요?"


침상 위에 스르륵 쓰러진 그 순간 숙소의 문이 열렸다. 알터였다. 얇은 가운만을 걸치고있는 연을 보고 뺨이 붉어진 알터는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외려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와 문을 닫기까지 했다. 식사시간이었던 만큼 평소의 갑옷과는 다른, 편안한 옷을 걸치고 있는 알터는 이렇게 보니 그저 동네에서 흔히 보는 남자아이 같았다. 그러고보니 내가 알터의 말에 대답을 해줬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연을알터는 슬쩍 들어올렸다. 로간이 양팔로 안아올렸다면, 알터는 이번에는 한팔로 연을 받쳐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든 자세였다. 그러고는 잽싸게 시트를 걷고, 연을 내려놓은 뒤 이불을 다시 덮어주는 알터의 얼굴은 새빨갰다.


"딱히 ......질투...같은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이불 안덮고 계시면 추우니까 덮어드리러 왔어요. 멍하니 ...네 멍하니 있으실 것 같아서..."

"..고마워. ..잘게."

"..네, 조장."


아마 질투했던 모양이지. 내가 남의 품에 안겨가는 모양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횡설수설하는 알터에게 연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은 것을 알터는 모를 것이다. 그저 저를 동경하고, 그 웃음 한번에 기뻐하는 모양에 알터가 안쓰러웠다.


"..알터, 나 오늘은 그냥...잘테니까. 로간에게, 음식 준비 하지 말라고 전해줄래?"

"네, 그럴게요. 주무세요 조장."


연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그녀가 원해서 한 일이었다. 제 방에 있을 때만큼은 바깥과 완벽하게 끊어져있고 싶어하던 그녀의 욕심대로, 알터가 방문으 닫고 나가자 방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마른 공기가 조용히 연을 감싸안았다. 그 무너진 어둠 속에서 연은 남자의 말을 생각했다. 정말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말로 그 계획들이 가능하다면 연은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눈을 떴을 때 몇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문틈 새로 들어오는 빛이 날이 밝은 것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일어날까 말까를 고민하던 와중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조장, 일어났나요?"

"...들어와, 로간."


제대로 목이 트이지 않아 쉰 소리가 섞여나왔다. 곧 한손에 샌드위치와, 뜨거워보이는 찻주전자를 쟁반에 올린 로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을 살짝 열어 환기를 하고, 방 안에 조명을 켜고, 작은 테이블을 침댓머리에 끌어와 자신이 가져온 먹을거리를 편다.  능숙하게 찻잔을 깔고 연의 앞에 차를 기울이자 뜨거운 향이 방 안에 훅 끼쳐올라왔다.


"...냄새 좋다. 홍차?"

"몸이 안좋으신 것 같아서 가볍게 준비해봤습니다. 어제도 식사 거의 안하고 들어가셨는데, 드시지도 않는다고 해서요. 식욕은 좀 있으세요?"

"아까까진..없었는데. 생길 것 같아.."

"다행이네요. 일단 드셔보시고 다른 요리를 더 해오던지 하는게 좋겠네요."


오후의 티타임처럼, 오이를 넣은 아삭아삭한 샌드위치와 향이 좋은 홍차. 전부 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연은 로간이 음식을 차려주기 전에는 제대로 음식을 챙겨먹지도 않고 다녔었다. 사실 늘 전장에 내몰려있던 그녀가 제대로 된 음식을 챙겨먹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먹는것이라곤 육포와, 물과, 마른 전투식량들뿐. 그래서 로간이 가끔 차려주는 특별식을 무척 좋아했다. 매일 질긴 것만 뜯고 살았던 탓에 연은 뜨겁고 부드러운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마 이 작은 상차림도 로간이 자신을 한껏 배려한 것일터였다.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연이 샌드위치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문이 닫혔다.


"손님이 있었네. 아님 내가 불청객인가? 연."

"누구냐!"


로간이 옆구리에 손을 뻗어 검을 뽑으려 했지만 허전하다. 연의 방에 음식을 차려오느라 검을 두고 온 것이다. 불찰이었다. 곧 로간은 바닥에 내리꽂혀 제압당했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사람 덩치보다 커다란 백호가 로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안장을 메고 있는것으로 봐서 사람을 태우고 다닐 수 있도록 길들여진 것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길들인 이 이외의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잠시만 그렇게 있어, 로간. 난 연에게 할 말이 있어서 들어온거 뿐이거든. 그렇지? 연. 생각은 좀 해봤어?"

".........당신은 누구야?"

"난 대답을 바라는거야. 모든걸 알려주기 전에 네 대답부터 들었으면 좋겠는데. 어제의 설명으로는 부족해?"

"아니.........그건 아니지만, 쉽게 믿을 수가 없어...내가 죽을 수 있다니."

"조장!?"

"거 참 시끄럽네."


그 말에 하얀 호랑이는 로간에게 싣고 있던 힘을 더 세게 실었다. 커흑. 절로 가벼운 비명을 흘리는 로간. 연은 그를 처다보려다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가 청년은 몹시 자연스럽게 연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어제는 그래도 제법 격식을 차렸던 것 같은데 오늘은 어찌나 그리 방만한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젖혀놓고라도 연에겐 확인해야할 것이 있었다. 질끈 눈을 감은 그녀는, 앞에 있는 이의 정체부터 확인해야했다. 그러지않고서는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당신 누구야?"

"──."


그 말들은 조용히 연의 귓가에만 스며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힘은 충분했다. 연은 가운차림 그대로 침대 밖으로 일어서 청년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야 그거."

"그럼 가는걸로 해둘까?"

"응."

"가자, 호랭아."


와우웅, 생긴 것과 다르게 고분고분 대답하던 호랑이는 굳이 한번 로간을 꾹 즈려밟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자신이 상관할 것이 아니었다.

연은 지금도 그때를 전부 다 떠올릴 수 있다. 연은 제 발로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열리고, 문이 열리는 서슬에 가운자락이 펄럭인다. 발은 맨발이었다. 차가운 돌바닥 위에 정리되지 않은 흙이 발바닥을 따끔따끔 찔렀다.  날씨는 그저 그랬다.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연의 곁에 청년이 나란히 서고, 그 둘은 당당히 아발론 게이트의 정문으로 다가간다. 조장이 일어난 기척에 자기쪽으로 돌아보던 기사단의 분위기가 술렁인다. 성역에 누군가가 침입했다. 단지 그 사실 하나로 모두의 칼날이 청년에게로 향한다.


"조장, 비키세요!"


제일 먼저 달겨든 것은 알터. 사자머리가 새겨진 랜스를 수평으로 세우고 은색 탄환처럼 달려온다.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은 것은 연. 랜스가 청년에게 닿기 전에 그녀는 가느다란 다리를 들어올려 랜스의 옆을 걷어찼다. 아마 신성력으로 강화했을터였던 랜스는 그렇게 쉽게 찌그러졌었다. 그 랜스는 알터의 자랑이었는데. 바닥에 나뒹굴던 알터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이 사람 따라가, 알터."

"조장님...?"


좌표 지정 정도는 청년이 짚어주었다. 하지만 이곳을 나가는 워프게이트는 자신의 몫. 연은 기사단의 문장이 새겨진 펜던트에 힘을 불어넣었다. 곧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게이트가 열리고, 남자와 호랑이가 먼저 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연도 그 게이트 밖으로 걸어나가려 발을 게이트 바깥으로 걸쳤다. 청년은 게이트 너머에서 연을 기다리고 서있었다. 그를 뒤따라 걸어나가려던 찰나, 알터, 그리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조장님, 가시면 안되요! 연, 연님! 제발!"

"무슨 일이야, 알터! 조장, 어디가는건데?!"

"조장님?!"


연은 펜던트를 벗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터에게 던졌다. 내가 뭘 하러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고 나를 잡니. 연은 웃었다. 아마도 웃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눈에 달려오는 모두를 꼭꼭 눌러담고 연은 인사했다.


"그건 선물이야. 안녕, 조장놀이는 이제 끝."


그 말을 끝으로 연은 게이트 바깥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힘의 공급이 끊어진 탓에 게이트는 순식간에 무너져 닫혔다.


발이 시려웠다. 도착한 곳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온통 눈이 덮혀있는 곳이었다. 아마 발레스 어딘가겠지.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밑에 무릎꿇은 청년은 연에게 자신의 어깨를 짚게 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연의 발을 들어올리고 눈을 닦아낸 후, 두툼한 털신발을 신겼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로 역시 두터운 털옷이 입혀졌다.


"이젠 덜 춥지?"

"..응."

"가자. 준비해놓은 곳이 있어."


그르릉대며 백호는 연의 앞에 몸을 낮췄다. 앉으라는 모양이었다. 거기 위에 조심스레 올라타자 청년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벼랑의 한부분을 쿵 치자 눈이 우수수 쏟아지고, 그 아래에 통로가 있어 들어갔다. 조명이 들지는 않았지만 벼랑 아래에 괜찮은 숙소가 숨어있는 것은 의외였다. 벽에 그득한 마법구들은 조명을 부족하지 않게 해주고 있었고, 원형으로 둥글게 깎인 방의 한가운데에는 마법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워지는 것은 아닌듯, 청년은 테이블과 의자를 끌어와 그녀를 앉히고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연은, 아까 먹지 못한 로간의 샌드위치와 차를 떠올려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될까. 통성명부터 할까?"

"...죽여줘."

"아직 그건 안돼. 이 바닥 보여? 널 위해 준비한거야. 마력 증폭기지."


여기에 네 소원을 빌면 돼. 청년은 속삭였다.

그리고 연은 망설임없이 그 마법진에 힘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죽을 때 함께 죽기를.

모두 자신이 그저 여행을 떠난 걸로 기억하고, 떠나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지는 않기를.
내가 살아 있는 한 아무도 나를 잊지 못하지만, 내가 죽었을때는 나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를.


'...............마스터.'

"..지금 와서 마스터라고 부르지마, 멍청한 정령."

'난 네 곁을 떠나지 않는다.'

"떠날 수 없는거잖아. 넌 내가 계약을 파기하기 전까진 나한테 끌려다녀야돼."

'저 음험한 남자와 둘이 보내는 것보다는 낫겠지. 당신이 날 버리기 전까진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다. 마스터. 함께 가겠다.'


마력으로 푸르게 빛나던 마법진이  사그라들었다. 옆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른, 지금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던 정령은 연에게 영원을 맹세했다. 그 말을 듣던 연은 웃었다. 양손에 새겨진 뒤틀린 마법의 흔적은 이렇게 눈깜짝할 사이에, 연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연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키득키득 웃음을 짓는 그 손 아래에 눈물이 고여 넘친다. 그 모습을 청년은, 연의 이전에 영웅이 될 뻔했던 밀레시안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스터.'

".........미친 새끼. 난 이제부터 마왕이야."

'지금까지 내가 따르던 이는 에린의 영웅이 아니었나? 이제 와서 그릇을 줄이려 해봐야 성에 차지도 않는다.'


이제 연의 꿈은 거의 다 손에 잡혀간다.  물론 '마왕인 자신을 죽여줄 새로운 영웅'을 찾는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걸릴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연, 그녀의 진짜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그'와, 에린에 처음 왔던 그 때부터 함께 해주었던 정령과 함께 그 길을 걷는다면,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아아, 아까 그거 조금이라도 먹고 올걸 그랬어. 다시는 못먹을텐데. 


제 몸 하나 뉘일 곳 없던 작은 소녀의 마지막 후회는,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



..........아 쓰다보니까 분량 장난없는거같은데 지금까지 나눔한 거중에 젤 긴거같은데...........?


.........하 힘드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디테일 안빼먹으려고 노력했어여ㅠㅠㅠㅠㅠㅠ!!!빼...빼먹은거있음 난 몰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으허어어..........출근하러..갑시다....자러..갑.시다..(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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