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씨앗 한 알이라고 믿는 사람이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의사들은 그에게 그가 씨앗 한 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가 치료되었을 때
(그가 씨앗 한 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병원을 떠나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을때 그는, 몸을 떨고 매우 두려워하며 즉시 되돌아왔다.
문밖에 닭이 한 마리 있었고 그는 닭이 자신을 먹을까봐 겁내고 있었다.
"아! 여보게", 의사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이 한 알의 씨앗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저는 알고 있습니다" 환자가 대답했다.
"그러나 닭이 그것을 알까요?"
이것이 정신분석 치로의 진정한 관심사다. 환자에게 그의 증상의 무의식적 진실을
확신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의식 자체가 이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유도되어야 한다"
<라캉과 지젝>이라는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라서 옮겨와봤습니다.
약간 설명을 덧붙이자면 여기서 지젝은 자신이 의도하는 정신분석의 목표 즉 정치적 차원의 상징계(닭이 환자를 씨앗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변혁으로까지
나아가지 않고 환자개인이 씨앗이 아니라는 임상적 치료에 머무르는 라캉을 대비시킵니다.
지젝에 보기에 환자가 진정으로 치료되기 위해서는 환자 개인이 상징계에 포섭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상징계자체가 환자의 증상의 근본원인이기에 이 상징계자체를 변화시켜야 된다는 것이죠.
이것을 지젝은 정신분석용어로 표현하면"환상가로지르기"라고 합니다. 라캉초기에는 라캉의 정신분석내에 이런 급진적인 요소들이 있었는데
후기에 가면서 환자개인의 임상적 치료에 머무르는 "증상과의 동일시"라는 미봉책으로 바뀐다는 것이죠.
사실 라캉은 정치적으로는 급진적 변화를 부정하는 보수주의나 회의주의적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이는 라캉의 이론자체가 가진
급진적 측면을 스스로 방기하는 스탠스가 된다라는 것이죠. 누구의 입장이 더 올바르다고 해야 할까요? ㅎㅎ
저로서는 지젝의 소위 "공산주의"적 처방이 실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선 회의적이긴 합니다만 이것이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자체가 가진 급진적 함의를
라캉의 회의적인 정치적 입장보다 더 잘 드러내는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징계라는 현실의 모순은 역사가 보여주듯이 환자개인의 치료차원에 머무르면 영원히 변화하지 않습니다. 환자 스스로가 정치적 주체가 되어서
모순된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변화하는 것이죠.
문제는 환자가 아닙니다. 닭이 문제인거죠. 이걸 바꿔야 환자도 닭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는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