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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의 위기- 미.영.일이 로비를 벌일때 고종은 굿판을 벌이다.
게시물ID : sisa_9145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프맨
추천 : 3
조회수 : 35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4/30 14:12:1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sid2=245&oid=001&aid=0009229672


현재 한국의 외교력 부재는 심각한 상황


미국

-트럼프 집권 후, 정상회담 첫 상대로 아베를 택함.

-마이크펜스 부통령은 동해를 일본해로 표현

-북한군 창건일 앞두고 대비책 논의에 일본은 참여, 한국은 제외


지금의 상황은 외교전략부재와 무관심, 무능의 삼위일체로 20세기초 일제의 한반도 강점 직전 상황과 유사하다.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


고종(1852-1919)이 1873 아버지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정치 전면에 등장할때만해도 혜안을 갖춘 것처럼 보임.


약한 국력으로 나라를 지키는게 어려워보이자 강대국을 주권 수호에 활용하기 시작한 것.


청-미-러-영-일본등이 서로를 견제하고 경쟁한다면 세력균형을 맞춰 국토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 이이제이 전략은 초기에 성공적으로 보였다.



1.미국을 청나라 대항마로 삼으려함 -> 실패.(바로 러시아 활용)

-영,일,청 3국이 러시아와 사이가 안좋은걸 활용함.


2.시간이 지나자 약발이 떨어짐.

1894년 청일전쟁 발발로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었으나 동맹국이 되겠다는 러시아는 무시로 일관.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 

결국 고종은 아관파천을 감행. 러시아 공관에서 보호를 받게됨

러시아는 고종의 요구를 받아들여 조선을 러시아 보호령으로 삼고, 연합군도 창설하여 방패가 되어주기로 했으나..............


러시아는 그토록 염원하던 중국의 부동항 랴오둥 반도의 항구를 확보하자 조선을 무시하기 시작함.

(러시아: ㅋ부동항도 먹었는데 뭐하러 전쟁 위험 감수하나?)


3.일본은 빠르게 러시아의 눈치를 간파하고 강대국 로비를 시작함.

한반도 러-일 균형은 깨지고 일본 독무대가 되었으나

1902. 영일 동맹을 맺어 한반도 권익을 인정받음.

세계최강국 영국을 등에 업은 일본은 러일전쟁을 감행해 승리.

이후 1905 2차 영일동맹을 맺고, 인도와 조선 지배권을 맞바꿈.

또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과 필리핀 지배권을 맞바꿈.


 

이렇게 고종의 이이제이 전략은 자체 역량을 키우지 않은채 외세만 이용하다 파국을 맞게 됨.


1905.

뒤늦게 국권침탈 위기를 인지한 그는 다양한 외교노력을 시도 했으나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감.

이미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상실된 상태라 조약반대 친서는 미국 대통령은 커녕 국무장관에게 가지도 못했고,


1907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는 외교권 박탈로 참석도 불가능했기 때문.


1894-1905 약 10년간 일본이 강대국들과 치열한 로비를 벌일때

고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미신에 빠져있었다.

덕수궁과 경운궁엔 점쟁이와 무당이 들락거렸는데, 이는 명성황후 때문.

명성황후가 무당 신령군을 궁으로 데려와 지낸 탓에 고종도 전염되었고


신령군이 관우 딸을 자처하자, 동소문 부근에 관우 사당도 세워주었으며, 사당이 완공되자 문무백관과 세자까지 끌고가서 참배를 벌임.

신령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뿌려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며 초대형 굿판을 벌였는데,

이때 들어간 돈이 1만2천 봉우리마다 쌀 1석과 돈 10냥. 즉 1만2천석과 돈 12만냥이 되겠다.

신령군은 거대 국고를 낭비한 것도 모자라서 고종 내외를 내세워 온갖 비리를 저질렀고,


명성황후는 죽기전까지 풍수지리에 집착해

28년동안 아비 무덤을 4차례나 옮겼으며,


고종은 어리석게도 명성황후가 죽고나서도 미신에 더더욱 빠져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확실한 승기를 잡아가는 마당에 초대형 굿판을 벌여 러시아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었고,

무당의 주문에 궁궐 기둥 밑에 큰 솥을 묻는 등 추태를 벌였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

-고종과 엄비(명성황후 시해 후 영친왕을 낳은 후궁)는 미신에 빠져있음

-열강의 국제관계와 일제의 속셈을 전혀 모름.

-에휴 ㅉㅉ


당시 조선은 국가역량 향상보단 외세도입에 일관하고 미신으로 국고를 탕진하며, 자체 외교를 포기하는 등 망할 조건은 다 갖춘 것.

 


지금 상황은 어떨까?

북핵 해법에 중-미-러-일의 의중만 치열할 뿐 한국은 목소리를 못내는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

강대국 이해 관계에 한반도의 운명을 맡기지 않으려면 고종의 외교전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


강대국 로비를 현란하게 행한 일본은 밉지만 그 외교술은 배워야 한다.


미국 외교 전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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