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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하지만,"
"!"
"더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요."
어느 때보다도 상냥한 얼굴.
평소의 유들함과 다정함 따위는 보이지 않던 자조적인 미소로 그녀를 마주했다.
부러질까 조마조마하다던 일상의 농과는 상반되던 손아귀 힘이,
되려 부러져버리라는 듯이 부르르 떨리도록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왜 그런 사람을 아직도 추억하고 계시는지."
"예..? 뭐, 뭘.. 그것보다 아프..!"
"지금을 보셔야죠, 밀레시안."
그녀의 바르르 떨리던 입술을 꽤나 감칠나게 응시하던 그가 제 입술을 살짝 핥아냈다.
"그는 당신을 잊고, 당신의 마음은 이제 안중에도 없는 남자입니다.
근데 대체 무엇이 아직도 당신에게 미련을 남긴 걸까요?
난생 처음 이 에린에 내려와 당신을 위해줬던 것 때문일까?
아 - , 첫사랑 같은 건가요?"
"톨비쉬..!"
"그래요, 누구나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는 기억일 법도 하겠네요.
하지만 밀레시안 씨, 그런 허상에 속아서 지금을 잊어서도 안되는 법입니다.
지금 당신 곁에 있는 건 누굽니까?"
"...톨ㅂ..."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럴 의도로 뱉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이성이 이상한 곳으로 굴러들어간 듯 했으니까, 그저 그의 정신을 일깨워주려고..
"왜.. 왜 이래..요?"
"......
글쎄..."
"그.. 이야기... 아, 아이던은 그저..!"
"또."
"!"
눈에 띄게 일그러진 안색이 또렷해지고 나서야,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벽에 배려 없이 밀어붙여진 이유,
무엇보다도 그가 오물처럼 지니고 있던 '무엇'인가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신을 잊었는데, 당신은 끈질기게도 그를 기억하고 있군요."
"......"
"슬프지 않나요? 오로지 자신만이 기억하는 추억이라니, 서글프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사서 맘고생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래도 내가 기억하기로 한 거예요.
내가 좋으니까, 이 정도는..!"
"..좋으니까?"
"..!"
또 다시 차갑게 식은 얼굴.
"....당신과는 관계 없잖아요. 내 일이고, 내 기억이예요. 내 스스로 선택한 거라고요!"
"...그렇군요. 이거 정말.. 유감이네요.
맘 같아선 기억을 도려내보고도 싶은데.. 어떻게 안되려나 싶어 억지나 부리게 되고..."
"..뭐라고요?"
"......"
진심으로 안타까운 얼굴로 쓰게 웃으며,
그녀의 볼을 엄지로 살살 어루어만지던 그가 돌연,
"풉."
이를 드러냈다.
"윽!"
"내가 마지막까지 함께하겠다고 했잖아."
"아.. 아파..!"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 눈 앞에 지금 서있는 내가, 내 입으로 말했었잖아."
목덜미를 콱 깨물어 피가 옹골질 만큼 잇자국이 여럿 패이고 나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파!!"
"밀레시안."
"윽..!!"
"...내가 그를 죽여야만 끝내겠습니까?"
"..뭐?"
"끝끝내 죽이고 나서야만 잊겠냐는 말입니다."
욱신거리는 제 목덜미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도 움푹 패인 상처가 손 끝으로, 자국 아래의 통증으로 또렷하게 느껴짐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웃기지 말아요."
"죄책감 또한 기억에 짜증날 정도로 또렷하게 새겨지는 감정이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실존하지 않는 이를 기억하는 건.. 현실성 없는 허상에 불과해질 테니까."
"톨비쉬!!"
"당신이 하기에 달렸겠죠.
..이후로 당신이 하루종일 그 남자 곁을 지킨다고 한들, 제 마음이 바뀔 것 같습니까?"
"......"
널 죽여버릴 수도 있어.
그녀는 독하게 터져나오려는 목소리를 애써 삼켜내며 입술을 꾹 물어냈다.
"아 - ..
..하하하..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건지 정말 눈에 다 보이는군요.
...근데 왜 정작 제 생각을 하는 당신은 그렇게도 찾기 힘든 건지."
"...감사하고 있었어. 그 사람에게 가졌던 감사 만큼 진심으로..
..대체 왜.. 당신이 이런.."
"감사로는 부족해."
아직은 깨물지 않아 깨끗한 목덜미의 살결을 쓸어올리는 그의 손길이 서늘했다.
"제가 당신에게 했던 말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묵직합니다.
당신이 스쳐지나가듯 감사함을 느끼며 픽 웃을 만큼의, 고작 그런 무게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
"좀 더.. 상상 이상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제 평생에 있어 주신에 대한 신앙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무거운.. 기도였죠."
배신인가?
아니, 배신이 아니다.
이건 그저... 서로의 의도와 이해가 어긋났던 맹세에 의한...
"이제 좀 감이 잡히십니까?"
..그렇기에 그녀의 얼굴로 바짝,
고개를 들이밀고 점점 더, 그녀를 가둬 잡아먹을 듯 서서히 가까워지던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