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귀찮아 죽겠다니까!"

"그런거 치곤 생각보다 들떠보이시는데요."

"그야 당연하지. 이건 신상인걸!"

걸음걸이를 연습하던 소녀는 슈안의 말에 발끈한 듯 훌쩍 뒤로 돌아섰다. 그 겨를에 분홍색 머리칼이 제 맘대로 뒤집혀 흩날렸다. 그 아래로 배죽하게 솟은 귀는 소녀의 콧대처럼 뾰족했다. 뽀얀 피부는 때 한점 타지 않은 모슬린 드레스의 천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고왔다. 어깨까지 시원스레 트인 상의는 가볍게 부풀려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했다. 아직 어린 탓에 코르셋을 입지는 않았지만 옅은 분홍색의 리본으로 허리를 꽉 조여매 몸매를 부각시키는 디자인. 프릴을 잔뜩 넣어 부풀린 치마는 그녀가 걸음을 산뜻산뜻 옮길 때마다 무릎께에서 나풀나풀 흔들렸다. 허리께는 희게, 하지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분홍색이 번져 치맛단에 와서는 분홍 코스모스같다. 가느다란 다리는 맨발. 그런 소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때가 타면 안된다며 조심스레 모셔놓은 에나멜 펌프스가 콧등을 뽀얗게 빛내고 있었다. 우쭐하게 가슴을 쭉 편 소녀는 턱을 가볍게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빨리 감상을 말해봐, 슈안."

"예쁘네요."

"영혼이 없잖아!"

"뭘 여기서 어떻게 더 성의있게 말해드려요! 그 옷 한벌에 세달치 식비라는건 알고 계세요?"

소녀는 덜컥 말문이 막혔다. 물론 갚을거긴 하지만 그런 것을 물고 늘어지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하지만. 구두 한켤레에 백만 골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좀 심하긴 했지만, 구두가 예쁘지 않으면 드레스가 소용이 없는걸! 심통이 난 소녀는 냉큼 다가가 슈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무리 작고 가느다란 소녀의 외양이라도 눈물이 질끈 나도록 아플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정강이를 끌어안고 끄르륵 거품을 물 기세로 바닥으로 무너져 구르는 슈안을 지나친 영웅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구두를 손에 집어들고 냉큼 도망쳤다.

삶은 기적, 돈은 행복, 쇼핑은 자유!

에린에 떨어진 그 날부터 지금까지 소녀의 인생은 남들에게 잡혀 휘청거렸다. 그녀의 앞일은 언제나 가시밭길이었다. 엉겅퀴를 맨발로 밟고 어금니로 모래를 씹으며 소녀는 살아남아야했다. 하지만 소녀는 강인했고, 결국 결론을 내렸다. 남 때문에 성가시고 귀찮을 바에야 내가 직접 떨쳐내고말지. 그렇게 사막의 코스모스는 강철 위에 피어나 세상을 메웠다.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소녀는 끝끝내 세상을 구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없어!!!!!!!없다고!!!!!!!!!"

"조장, 시끄러워! 훈련을 하란거야 말란거야!"

"근데 없다고 디이!!!!!!예쁜 악세사리가 없어!!!!"

뭐, 온통 떨치게 된 명성 정도?

"그래. 쇼핑을 가야겠다. 이건 쇼핑을 가야되는거야. 맞아, 쇼핑을 해야돼!"

"미쳤어, 조장? 지금 입은 것도 빚져서 산거 아냐?"

평소라면 누구보다도 패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함께 떠들 디이조차도 펄쩍 뛰었다. 전장에 피어난 코스모스라느니 살롱의 기사라느니 하는 화려한 수식이 마구 붙어있는 그녀였지만 가까이서보면 그런 말이 목구멍 너머로 쏙 들어가버린다. 사실 그녀가 받고있는 대접은 그녀가 해낸 온갖 업적에 비하면 너무도 부족하다. 예산은 부족하고 주머니는 궁색하다. 운이 좋아 돈을 잔뜩 벌어도 예산을 메우고, 옷 한벌 사고 나면 텅 비기 일쑤.

"하지만 예쁘지 않으면 여자 아이로 태어난 의미가 없잖아!"

"로간, 조장 좀 말려봐!"

"훈련 중이니까 디이, 말걸지 마세요."

"디이. 쇼핑가자 쇼핑. 그래 나랑 외출 가자!"

"싫어!!!!!! 너랑 쇼핑가는거 힘들단말야!!!!!!!!"

하지만 영웅이기 전에 여자아이이고 싶은 소녀는 여전히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은 나이. 이러니저러니해도 소녀니까, 예쁘다고 칭찬받고 싶으니까, 그래서 소녀는 오늘도 분홍색 리본을 팔랑이며 쇼핑을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