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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침묵
게시물ID : military_758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늘지기
추천 : 7
조회수 : 26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5/07 01: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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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서른일곱, 손이 4차혁명을 거부하는지 아직 모바일로 글 쓰는게 익숙하지는 않네요. 짧게 쓰고자 거두절미하고 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00년, 해병대에 다녀왔습니다. 어차피 갈 거 징집되기보단 내가 지원해서 가고 싶었고, 가장 빨리 다녀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으니까요. 백령도 아래 대청도라는 섬에서 대공포병으로 약 2년을 보냈습니다. 어떤 이유로 섬에서 빼준다던가 작전병(좋게 말하면 비서)로 이동시켜준다는 회유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냥 이제와서 비겁해지기 싫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남자여야 했으니까요.

군생활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터프했습니다. 일이병때 민간인은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타군은 고생도 덜하고 복지는 그나마 더 좋다는 박탈감때문에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산 아래 해군기지 해군들이 바베큐파티라도 벌이는 날이면 미움이 증오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약자가 상대적 덜 약자를 미워하게 된 거죠.

시간이 흘러 제대 날짜가 다가오니, 강요된 시간의 터널 끝에서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다가오더군요. 사회 생활로의 복귀를 생각하는 순간, 그 모든 미움과 상대적 박탈감이 사라지더라구요. 내가 아무리 고생했더라도 신체나 정신을 크게 상하지 않았다면. 소중한 시간을 2년 넘게 박탈 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구요. 우리 모두가 강요당한 희생은 본질적으로 모두 비슷한거라고 말입니다.

군대를 다녀와서 좋아진 점이라면 아버지가 저를 조금은 어른(가끔 술한잔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주셨다는 것과, 신입생때 제 불알을 움켜쥐면서 남자답게 살라고 하던 남자 선배처럼 남성성에 대해 훈계받을 일은 없어졌다는 점이 있겠네요. 그 정도의 훈장을 얻으려고 본업을 떠나 그 긴 시간을 상명하복하고 모욕과 구타를 견디며 보냈나 싶을 만큼, 사소한 일들입니다. 그리고 사회로 나와보니..

이미 힘을 가진 남자들은 가장 이기적이고 야만적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끊임없이 더 희생하면서도 남자답게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약자라는 것을 종종 깨닫곤 했습니다. 동년배 여성들에 비해 점점 더 기회의 유리함은 사라져가는데,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그다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으니까요. 남자는 더 강하니까 훨씬 더 고생하더라도 묵묵히 참아내야 한다는 남성성의 강요는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다고 느끼게 되니까요. 

어찌보면 그건 많은 희생만큼이나 독보적인 기회를 가졌던 남자 기성세대가 고민도 가책도 없이 건네준 짐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마치, 잘해야 중산층 이하로 몰락한 귀족 집안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이름의 특별세는 여전히 징수되는 것처럼. 그리고 가장 무거운 남성 특별세는 병역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마음 깊이 통감합니다.

미안합니다. 당연스레 희생하면서도, 남자답지 못해보이는 게 두려워서 침묵했습니다. 바빠서, 잊고싶어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더 견디고 노력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던 남자라는 정체성에 순응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가야 할, 사회로 나와야 할 남자 후배들에게 남성만의 짐을 고스란히 남겨 준것에, 미안합니다.

저는 문재인 이외의 후보가 당선된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들의 목소리를, 정치적인 선택을 존중합니다. 더 이기적이 되어도 좋습니다. 민주주의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가 끝나더라도 여러분의 목소리가 더 많은 존중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지치지 말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 주십시오.

여성의 불리함이 줄어드는 만큼, 남성의 희생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될 때에야, 이 사회는 성평등의 올바른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더 많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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