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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의 정치학] 깨어나는 시민들이 지도자를 선택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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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율리시즈
추천 : 12
조회수 : 66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5/18 06: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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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은 내가 제주도청에서 행정전산관련 프로젝트로 한참 바쁠 때였다. 그러나 해당월의 18일은 15대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일이었고 그 당시에는 사전투표같은 제도가 없었기에 나는 다소 비장한 각오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투표를 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불과 2%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것을 감격적으로 지켜보고는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로 다시 제주로 내려갔다. 국민의 정부라고 불리는 김대중 정부는 이전 문민정부였던 김영삼 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국가부도사태 지경에 이른 나라를 IMF 구제금융으로 홍역을 치뤘지만 구제금융 시기를 빠른 시기에 졸업하고 민주주의의 본격적인 토대를 연 시기였다.

16대 대통령을 뽑던 2002년 12월 19일도 선명히 기억난다. 이미 이전에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로부터 성공적인 단일화 협상을 이룬 뒤라 이회창 후보와 큰 표차는 아니더라도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봤기에 다소 즐거운 마음의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나 투표 전날 저녁에 몇몇 친구들과 모텔에 모여 차기 정부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기분좋게 술을 한잔 기울이면서 티비를 보다가 정몽준의 노무현을 지지철회한다는 방송을 보고는 모여있던 우리는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당시 민주당 내부는 아마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 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로 아침에 투표가 시작되는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유시민 작가와 조기숙 교수가 유권자들을 독려하는 인상적인 글을 올린 기억이 난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반나절도 안되는 이 시간은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시민들이 집중하며 깨어나는 사건의 시간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의 성공적인 실제 업적과는 상관없이 그가 외롭게 물러나고 심지어는 이 세상마저 떠난 뒤로 두 번의 정부를 거치며 9년이 흘렀다. 여러 경제지표를 보거나 남북관계, 사회통합 등 어느 것을 보더라도 상식 이하의 결과를 보여주다가 희대의 국정농단이라는 사태와 탄핵과 파면을 지나 위대한 촛불광장을 거쳐 시민의 정부라고 불리울 만한 문재인 정부가 새로 출범하였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이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많은 비정상이 정상으로 바로 서는 경험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다.

국민에 별 관심없는 정부라도 외형상 좋은 결과로 비치는 정부로 일시적으로 비칠 수도 있고 국민을 위한 선의의 정부라도 여러 변수가 있어서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의의 정부라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결과도 성공적이길 모두가 바라고 있을 것이다. 아마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자신의 외유내강형 스타일이나 여러모로 비추어 봤을 때 역대의 어느 정부보다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변수들과 암초들이 앞으로 가는 길마다 놓여있다. 이를 극복하고 성공적인 종착지를 향해 갈 수 있을까.

팟캐스트인 [정봉주의 전국구]에서 시리즈로 대담이 이루어진 내용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 출범 직전에 나온 조기숙 교수의 [왕따의 정치학]은 새로운 정부가 시민의 정부이길 고대하는 동시에 정부 출범 이후에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책이다. 이 책은 엄정한 중립의 입장에서 정치의 구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김대중 정부에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고 노무현 정부에서 본격화된 시민권의 확장과 문재인 정부에서 기대하는 복지권의 정착을 위한 아낌없는 조언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특정 진영논리에 젖어 프로파간다로서의 역할이 주된 것이라고 한다면 매우 곤란하다. 프로파간다라는 것은 진영논리와 권위주의라는 양자를 가지고 이분법과 선악구도로 몰아가며 내 것은 다 좋고 남의 것은 다 나쁘다는 식의 논리 아닌 논리를 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21세기에, 특히 한국에서 어떻게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구성되고 있는지의 파노라마를 날카롭고 현실적으로 서술한다.

20세기의 민주주의 형성과정은 거칠게 보자면 정치적으로는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고 경제적으로는 무산자가 유산자로부터 경제력을 더 가져오려는 투쟁의 과정이다. 즉 예전의 ‘왕의 말이 법’인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법에 의해 형성된’ 국가체제에서 계급간에 정치와 경제의 영역을 더 넓히려는 과정으로 거칠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여기에서 자본의 입장이 반영된 쪽을 보수(우파)라 하고 노동자의 입장이 반영된 쪽을 진보(좌파)라고 한다. 그러나 우파와 좌파와는 별개로 보수와 진보는 나라마다 정반대로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옛 소련 체제나 현재의 중국은 좌파가 보수이다. 아무튼 이 모든 것을 모아서 보더라도 이 우파와 좌파의 구분은 권위주의 더 나아가서는 국가주의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68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시민들은 탈권위주의와 탈물질주의의 가치를 들고 나오며 새로운 시민영역을 형성한다.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시민들은 바로 이러한 신좌파로 불리어질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쓴 글에서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탄핵국면을 지나면서 과거의 국가주의에 향수를 지닌 이들과 새로운 시민주의로 나아가려는 이들로 크게 구분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조기숙 교수는 이 책에서 그 구분을 상세하게 들려준다. 다시 정리하면 자본가 대 노동자에 의한 구분은 권위주의와 물질주의의 패러다임 안에 있는 우파와 (구)좌파인 셈이고 탈권위주의와 탈물질주의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민들은 신좌파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신좌파는 권위나 물질경제에 우선가치를 두지 않고 개별성과 창의에 따라 삶의 가치를 각자 다르게 둠으로써 구좌파와 많이 다르다. 미래를 향해 가고 진보적이라는 의미에서 좌파라고 붙일 수 있을지언정 구좌파와는 여러모로 다르다는 것이다. 구좌파는 국가나 권위의 힘을 여전히 놓치지 않은 채로 노동자의 경제적인 평등한 세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상당히 단순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신좌파는 경제양극화를 지양한다는 점에서 구좌파와 조금 비슷하지만 권위를 싫어하고 정신적인 행복이나 문화적인 가치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정신적, 개별적, 사안적인 의식을 지닌다.

기존의 언론들은 신좌파 이전의 구체제의 패러다임으로 볼 때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으로 구분이 되어 언론의 정도와 진정성의 차이가 다소 있었더라도 진영의 논리에서 활동을 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진보언론조차도 이런 21세기의 새로운 시민의식은 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힘든 혹은 관성을 바꾸기 쉽지 않은 새로운 패러다임임에 틀림없다. 그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며 신좌파에 어울리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등장은 보수언론뿐만 아니라 진보언론에게도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모르는 새로운 유형이었던 셈이다. 진보같기는 한데 자신들과는 다른 궤에 있어서 온전히 수용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일부 진보언론 혹은 일부기사를 통해서 호의성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노무현 정부 내내 진보언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 진보언론의 관성은 문재인이 대통령을 앞둔 대선시기까지, 급기야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오늘날까지도 불화를 보이고 있다. 그 이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호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왕따로 만든 때와는 다른 양상으로 노무현과 문재인은 자신들의 옛날 방식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주 간략하게나마 책의 내용을 정리하기도 했지만 조기숙 교수의 [왕따의 정치학]은 이렇게 신좌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한국정치상황에서의 그 구체화가 어떻게 시작되고 형성되어가고 있는지의 현재진행형을 실감나게 들려준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홍보수석으로 재직하며 있었던 이야기와 그 전과 후의 에피소드까지 생생하게 들려줌으로써 이 책은 신좌파라는 시민주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이론적, 실제적으로 들려줌으로써 현재의 깨어있는 시민들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워할 시민들에게 나타난 등대같은 책이다. 아마도 [왕따의 정치학]은 강준만 교수의 [김대중 죽이기] 이후로 그것을 넘어서는 시대의 증언이자 살아있는 정치학 교과서라 할 만 하다. 덧붙이자면 신좌파에 대한 이해의 부족 혹은 진영 논리에 갖힌 이유 등에 의해 과거가 아닌 근래의 강준만 교수나 최장집 교수가 고개를 갸우뚱할만한 얘기를 하는 것들도 이 책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혹은 대선토론에서 심상정 후보가 보수인 유승민 후보에게 ‘힘을 내라’는 다소 의아해 보이는 언급의 배경도 이 책을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번 대선토론회에서는 크게 5자 구도에 의해 다양한 가치와 수준을 지닌 후보자들이 자웅을 겨뤘는데 이는 어쩌면 왕조체제의 향수를 마지막까지 붙들다가 무너져 버린 이후 시대에, 우리가 접해 보는 다양한 시각의 정치토론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바람이자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후보자에게 호감을 가졌든 상관없이 정치와 한국사회에 조금이라도 깨어 있기를 바라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일독하기 바란다. 물론 이 책은 신좌파의 입장에서 그 세력이 더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는 점에서 5자 구도라는 면에서 볼 때는 한 진영의 입장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좌파는 합리성과 가치성과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앞서가는 진영이다. 내가 설령 다른 진영이라 할지라도 왜 그런 입장에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스스로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진영이 그저 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포용할 마음도 가질 가능성도 더 커질 것이다. 갈수록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하나의 대한민국이라는 개념이 적절할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상대방을 모르면 영원히 적이 되어 싸울 수도 있지만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진영의 전환을 경험할 수도 있고 상대방이 영원한 적이 아니라 같이 가는 선의의 경쟁자이거나 동반자가 되어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정리해보고 이 책이 미처 언급하지 않았거나 혹은 취약한 부분을 잠깐 얘기해 보자. 이 책에도 언급되고 있고 유시민 작가도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했듯이 대한민국은 이제 산업화, 민주화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성공적으로 건너가고 있고 이제 경제 양극화 문제와 모든 국민들이 최소한으로 먹고살 만한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복지국가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 책에도 언급되고 있고 훨씬 과거에 김구 선생의 바램대로 문화국가로 가는 길이 미래에 놓여져 있다. 지금의 ‘참여민주파’에서 이미 그런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만 탈권위주의와 탈물질주의로 인해 개인의 가치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행복이라는 정신적인 측면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화’는 복지국가가 그 토대가 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신좌파의 정체성 정립 뿐만 아니라 김구 선생 이래로 그저 아름다운 구절로만 기억하고 있던 문화국가로 본격적으로 가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는 점도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이다.

이 책의 구성상 꼭 필요한 것인데도 이 책이 언급하지 못했거나 안했던 부분을 살펴보자. 이 책이 팟캐스트의 내용을 재구성하긴 했지만 팟캐스트의 기능과 영향력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은 있다. 20세기였다면 여전히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은 예의 우파와 좌파의 정당성을 위해서 글로 싸웠지만 신좌파의 등장으로 진보언론과 신좌파는 예기치 못한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나 신좌파는 진보언론이 새로운 물결과 패러다임을 인식하고 바뀌어 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너무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그점은 ‘나꼼수’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팟캐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파에겐 보수언론이 뒤에 있고 좌파에겐 진보언론이 있다면 신좌파에겐 팟캐스트라는 뉴 미디어가 있다. 팟캐스트는 보수언론의 자본과 조직력에는 도저히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팟캐스트의 힘은 하드웨어에 있지 않고 소프트웨어 즉 화자와 그 내용에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정치뿐만 아니라 주제와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펴져가고 있다. 예전의 총선 시기에 자본과 인력에서 비교할 수 없는 거대언론이 불과 서너명이 자산의 전부라고 할만한 ‘나꼼수’를 지면으로 공격해서 한명을 총선에서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한명을 감옥으로 보내고 나머지 두사람을 기소 상태로 두도록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팟캐스트라는 뉴 미디어의 역할이 얼마만큼 두렵고 커질 수 있나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앞으로 갈수록 정치인이든 시민이든 뉴 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넓으면 넓을수록 그는 이니셔티브를 더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썰전’이나 ‘외부자들’처럼 팟캐스트의 영향으로 오히려 기존 시사방송과 대담프로의 상당 부분이 그와 비슷한 포맷으로 변한 것이 많다는 것을 방송사 내부에서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팟캐스트의 자본력은 기존언론에 비교할 수 없으므로 대등하게 경쟁한다는 것이 우스울 지경이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만큼은 서로가 비하하지 않으면서 자기 주장을 펼쳐 간다면 합리적인 논리를 지닌 진영 간의 공정경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 콘텐츠와 내용이 더 합리적일수록 그 진영의 시민영역은 넓혀질 것이다.

[왕따의 정치학]에서 언급한 대로 복지국가를 넘어서 문화국가를 향해 가는 것은 시대의 과제이자 가야할 길이다. 그리고 이 사이의 언제인가 혹은 이 이후에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통일국가를 위해서는 그때그때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듯 하다. 문화국가를 바탕으로 통일국가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프랑스나 미국의 민주주의처럼 수입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비로소 한국에서 이룬 민주주의가 수입과 학습의 과정을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델로서 세계에 기여하는 때가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오래 살 수 있기를, 혹은 가능하다면 가급적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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