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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sisa_9398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madeust
추천 : 26
조회수 : 990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7/05/18 07:04:35
1980년 5월 우리엄마는 19살 소녀였고 대부분의 집들이 그랬듯 남자 형제 들만 대학을 보내는 집안 분위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취직을 하셨다.
위아래로 치이던 7남매중 셋째 딸 우리 엄마는 총성이 울리던 그날 이제 막 고등학생이 돼서 시내의 학교를 다니던 집안의 장남 다섯째인 남동생을 데리러 충장로로 향했다.
충장로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동생을 데리고 온 19살 소녀는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두꺼운 솜이불을 꺼네 동생들을 끌어안고 이불을 두세겹 덮은채 울었다고 했다.
'군인들이 우리집으로 오면 어떡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우리가 뭘 잘못했지? 동생들을 지켜야해' 라는 생각들로 혼란스럽고 무서움에 울면서 잠들지도 못했다고 했다.
당시엔 50대만 돼도 노인이었던 듯 하다. 친가 조부모님은 담장 넘어로 상황을 지켜보며 지나가는 청년들이 보이면 불러서 집에 있는 먹을걸 쥐어줬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일제 수탈이 극에 달했던 27년에 태어나 해방 후 자유를 찾아 홀어머니와 두 여동생을 데리고 6.25전에 남쪽으로 오셨다.
6.25 발발 전부터 군에 입대하셔서 군인으로 6.25를 처음부터 끝까지 견디셨던 할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일 했던게 누군가에게 칭찬 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 이라고 생각 하셨던 것 같다.
나라에서 준 훈장에도 신경쓰지 않았는지 나의 작은 아빠가 철 없던 시절 가져다가 엿을 바꿔 먹어도 빙긋이 웃으셨다고 했다.
끔찍한 전쟁을 겪으시고 맨땅에서 자식들 키우고 남들처럼 평온한 일상을 그리시던 할아버지는 다시는 들을 일이 없을거라 생각하셨던 총성에 적잖케 상처를 받으셨던 듯 하다.
한 때 군인이셨던게 더욱 자랑거리거 아닌게 되셨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할아버지가 훈장도 더 있고, 백골부대 창설 멤버 였다는것도 들었다. 국가유공자 신청도 안하시다 돌아가시기 2년 전쯤에야 가족들 성화에 마지못해 하셨다.
1980년 5월은 우리 할아버지 마음에도 상처를 남겼다.
다행인지 우리 가족은 1980년 5월 그날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친구 몇몇이 죽거나 실종됐고, 이웃의 곡소리를 들었고, 총성에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 가족은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마음엔 늘 무거운 짐을 얹고 살아간다. 1980년 5월에 광주에 살았고 자금까지 살아왔다는 사실이 희생자들에겐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고, 남들에게 이야기 할거리도 못된다.
엄마는 5월만 되면 생각이 나는 친구가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친구를 생각하명 나오는건 한숨뿐이다.
엄마는 1980년 5월 이후로 단 한번도 투표를 소홀히 하신적이 없다. 그 날 희생자들께 빚을 갚는 길은 투표 밖에 없다고 생각하신듯 하다.
그들이 바라던 정의롭고 아름다운 나라를 당신의 자식에게, 언젠간 태어날 손자에게, 더 먼 미래의 후손에게 안겨주는것. 아직도 광주에 사시는 소시민 우리 엄마의 가장 거창한 소망.
37년이 지난 우리 엄마의 마음엔 아직도 빚이 있고, 자식인 나에게도 그 빚은 대물림된다.
1980년 5월은 우리가족에게 약을 바르지 못하고 돌볼 수 없는 상처다.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은 아직도 상처에 피가 흐르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 함 써봤습니다. 새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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