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나는 예의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 살던 십대 소년이었다. 당시 나는 바쿠닌의 무정부주의를 진심으로 믿었다. 나는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면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는 부모님의 주장에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2012년 12월 23일...서로의 예측을 검증할 순간이 닥쳤다. 오전 11시. 정부가 리브 바이러스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사실상 인류의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인정한 것이다. 오전 11시 20분에 첫 은행 강도 사건이 벌어졌다. 정오가 되자 약탈에 못 이겨 중심가의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때 택시 운전사들이 공항 손님들을 놓고 경쟁하던 리무진 업체의 주차장을 불태웠고, 지붕 위에 있던 저격수가 한 경관을 살해했고, 폭도들이 몇몇 호텔과 레스토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한 의사가 교외의 자기 집에 침입한 강도를 죽였다. 날이 저물 때까지 20곳의 상점이 약탈당했고, 다섯 곳에서 방화가 일어났고, 차량 10대 분량의 상점 쇼윈도가 박살났고, 300만 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중대한 경험적 검증은 내 정치적 견해를 산산히 부수었다.
영화나 책 같은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던 존재가 현실로 튀어나왔다. 그것이 유니콘이나 요정 같은 존재였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뱀파이어였다. 그리고 인류가 이야기속에서 튀어나온 그 존재에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것은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갔고,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더이상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처음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었더라도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뱀파이어로 만드는 바이러스를 우리는 리브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뱀파이어는 몇몇 이야기에서처럼 인간들보다 거의 모든 육체적 능력이 뛰어났다. 힘도 더 쎄고, 지치지도 않았다. 보통의 인간이 뱀파이어를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그들은 감정 또한 없었다. 인간들 앞에서 동정심으로 약해지는 법도 없었고, 결코 울거나 웃는 법도 없었다. 그들은 지극히 이성적이었으며 영리했다.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서는 정체를 숨기고 인간들 틈에 숨어들 줄도 알았다. 그들의 유일한 약점은 오로지 햇빛뿐이었다.
2012년 12월 23일의 그날. 그동안 리브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의 개발을 장담하던 정부가 공식적으로 백신 개발의 실패를 인정했을 때 이미 리브 바이러스 전염자의 추정치는 전세계 인구의 30%에 달했다. 이야기속에서 튀어나온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눈치채기 시작했을때는 이미 인류는 종말의 문턱에 서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면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하셨을 정도로 애시당초 사람들의 도덕과 양심에 대한 믿음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도덕과 양심보다는 법을, 법보다는 자신을 지킬수 있는 주먹을 더 신뢰하셨던 분이시며, 지금의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욱 이기적이이고, 다른 사람을 더욱 의심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기셨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정한 첫번째 규칙은 당연했다. 울거나, 웃지 않는 사람은 항상 의심할 것.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직접 뱀파이어에게 희생당하는 것을 본 첫번째 사람들이 바로 우리 부모님이었다. 늦은 밤 우리집 문을 노크하며 집 안으로 들어보내 달라며 울먹이던 여인이 뱀파이어였던 것이다. 그날 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뱀파이어가 웃거나 우는 연기를 통해서 사람을 속일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았다. 나는 아버지가 만든 첫번째 규칙에 '햇빛 아래서 만난 사람이 아니라면 믿지 말라'는 두번째 규칙을 덧붙였다.
그로부터 5년여의 시간이 흐르는동안 규칙은 어느덧 14개까지 늘어나 있었다. 규칙이 늘어날수록 내가 아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밤에는 집에서 죽은듯이 기척을 죽이고 숨어서 잠을자고, 낮동 안은 집 주면에서 먹을걸 구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마지막 1년동안은 만난 사람의 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최근 6개월동안은 단 한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고,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조차 찾을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쳐가고 있었기에 지금 내가 숨어있는 건물의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하는 여자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것도 당연했다. 혹시라도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내 마음은 오랫만에 희망이라는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제발 문을 열어주세요. 이제 곧 해가 져서 뱀파이어들이 활동할거란 말예요." "..하지만...혹시라도...당신이..."
오랫만에 듣는 내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었다. 마치 말을 처음 해보는 사람마냥 나는 더듬거렸다. "제발요. 의심스럽다면 절 묶어놔도 좋아요."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만약 저 여자가 뱀파이어라면 내가 묶기도 전에 날 공격해서 물어버릴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해는 이미 져 있었다. 지금 그냥 문을 열어버린다면 부모님의 죽음을 통해 배운 두 번째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 집에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온거요?" 내 목소리가 아직은 스스로도 낯설었지만 단어들을 이어서 금방 하나의 매끄러운 문장으로 말을 할 수 있었다. "금문교를 지나 소살리토에 가면 아직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 곳에 가다가 시간이 부족해서 오늘 하룻밤만 이 곳에서 자려고 들른 거에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이러다가 뱀파이어들이 오겠어요." 여자말이 옳았다.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다가는 언제 뱀파이어가 나타나도 이상할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를 믿을 수만도 없었다. 뱀파이어들에겐 감정이 없지만 그들 역시 한때는 사람이었던만큼 감정을 흉내낼수는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문 안에 숨어있는 사람이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들지도 알고 있었다. "다른 집으로 가세요." 결국 매몰차게 거절하는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다른 집들은 문이 잠겨있거나 뱀파이어로부터 안전하지 않단 말예요. 안전한 장소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오랫동안 갈등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나의 걱정대로 두 명의 뱀파이어가 나타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문에 나 있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두 명의 뱀파이어도 내가 결코 문을 열지 않을것임을 알기라도 하는 듯 다잡은 먹잇감을 눈 앞에 둔 포식자처럼 여유있는 발걸음으로 여자에게 다가왔다.
"아직도 인간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군." 뱀파이어중 한 명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명의 뱀파이어는 고맙게도 내 눈앞에 그 여자를 무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 여자를 어딘가로 끌고갔다. 사람의 피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끼는 뱀파이어들의 습성상 놀라운 모습이었다. 여자는 저항도 하지 않은체 모든 것을 체념한 모습으로 끌려갔다. 문뒤에 있는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는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는 그 둘의 모습은 끔찍하도록 이성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단 한발의 탄환이 남아있는 권총을 한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살릴 수도 있었을 사람이 눈 앞에서 끌려가는걸 나는 안전한 문 뒤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6개월여만에 처음 만난 사람은 끌려갔고, 나는 또다시 살아남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만들고 세운 규칙들...그리고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적이고 의심많은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해 뜨는걸 반겨줄 60억의 인구도 사라져버렸지만 아침해는 기어이 떠올랐다. 이제는 집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위치가 발각된 이상 더이상 집도 안전하지 않았다. 이왕 떠나야 한다면 여자의 말대로 금문교 너머의 소살리토에 가보기로했다. 설령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이거나 혹은 이미 소살리토 역시 뱀파이어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아마 그럴 확률이 크겠지만-그 때에는 다시 돌아올 시간 역시 충분했다.
짐은 어젯밤에 이미 챙겨두었다. 한 발의 총알만이 들어있는 권총 한 자루와 약간의 옷가지와 음식들....차를 타고 달리는 거리는 너무나도 한적하고 조용했다. 마치 이 세상에 나만 혼자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끔씩 거리에서 고양이나 개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이 오히려 버림받은 도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차를 몰고 차 안대 없는 금문교를 달렸다. 금문교 아래의 바닷물에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금문교를 반쯤 건너고 있을때 이상한 장면이 눈에 보였다.
함정이었다!
여러대의 검은색 밴이 내가 가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차는 모두 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진하게 썬팅되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급하게 차를 U턴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예감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지나왔던 다리의 반대편 역시 이미 막혀있었다.
양쪽 끝이 진하게 썬팅된 검은색 밴으로 막힌채 나는 다리의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차 안에는 뱀파이어들이 타고 있음을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이 낮이라서 차밖으로 섣불리 내리지 못하고 있을 뿐인거다. 하지만 이대로 해가 진다면 그들은 거리낌 없이 차에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서 길을 막고 있는 밴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밴들 중 하나의 문이 열리며 놀랍게도 뱀파이어중 한명이 차에서 내렸다. 우산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차라리 파라솔이라고 불러야 될 정도의 검은 색 물건을 펼친채였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온 몸은 검은천으로 두르고, 선글라스를 낀 채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 목소리에 세 번 놀랐다. 남자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여자라서 놀라고, 그 목소리가 상당히 정중하다는데에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목소리가 들어봤던 목소리였다는데서 놀랐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여서 복잡한 기분이었다. 속았다는데서 오는 분노와 도움을 청하는 여자를 방관했다는데서 오던 죄책감이 없어지면서 느껴지는 안도감과 결국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당당함등.....나는 어떤 감정을 드러내야할지 몰라서 잠시 말을 할 수 없었다.
"....나 하나를 잡자고 이 고생을 한건가? 나 하나를 잡으려고 그런 연기를 하면서까지 이런 함정을 파고, 이 많은 뱀파이어들을 동원한건가?" "당신은 충분히 그 정도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조용히 그리고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이제 세상에서 유일한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한달쯤 전에 우리로부터 도망치다가 자살한 사람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인간은 당신이 유일합니다. 당신이 마지막 인간인거죠." 갑자기 지독히도 외롭고 고독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나처럼 울거나 웃을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야기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뱀파이어들이 활개치는 세상이 되고, 활개치던 우리 인간들이 이젠 이야기속으로 들어갈 차례인 것이다. 이제 이야기속의 존재는 그들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마지막 인간이라는 사람이 왜 하필 나같은 사람일까. 멍청하게 이런 함정에나 빠지고. 차라리 수영선수처럼 수영이라도 잘 했다면 다리에서 뛰어내려서 수영이라도 해서 도망칠 수 있었을텐데. 그러면서 감히 인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이 뱀파이어들을 시원하게 비웃어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이제 나를 어쩔 셈이지? 나도 뱀파이어로 만들건가? 그렇다면 포기하는게 좋을걸. 너희들 같은 뱀파이어가 되느니 죽고 말테니까." 나는 건들거리는 태도로 조롱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태도에도 그녀는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죠? 우리가 피를 빨아먹어서인가요? 하지만 우리가 죽인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대부분은 뱀파이어가 됐죠. 어쩌면 당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뱀파이어가 되어서 살아있을수도 있고요. 그리고 지금은 우리들도 동물들을 사육해서 그 피로 인간의 피를 대체하고있죠. 예전 인간들이 고기를 먹던것과 다를바가 없는거죠."
그녀의 말이 옳았다. 피를 마시는걸 탓할수는 없었다. 인간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너희들은 감정이 없어." "그게 잘못인가요? 인류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다툼들과 문제들은 모두 인간의 감정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뱀파이어들은 감정이 없기에 더 이상 다툼도 없고, 전쟁도 없습니다. 모두 이성적이고 언제나 최고의 해결책을 찾아내죠. 우린 진화한겁니다. 감정이라는 불필요한 것을 떼어내고 미래를 향해 진화한거죠. 도대체 감정이 무엇에 필요하단 말입니까?"
나는 내가 감정적인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 동안의 피폐한 생활로 그나마 남아있던 감정도 모두 메말라버려서 더 이상 감정의 흔적조차 내 안에 남아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감정을 가진 마지막 인간으로써 지금까지 살았을 모든 인간들을 대변해서 감정을 폭발시켜야만 됐다.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가치가 있어서 감정을 느끼는게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다! 감정 자체가 목적이란 말이다! 너희 감정 없는 것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거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면서! 결코 행복을 느끼지도 못하고, 음악이나 문학같은 예술도 없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위해서 사는거지?"
"그건 저희 뱀파이어들만의 문제가 아니죠. 인간들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에는 그런 감정들이 끼어들만한 여지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하루하루의 생활에 쫓겨살기 바빴죠. 매일매일 반복되는 생활에 지겨움을 느끼면서도 그저 살아가는거였죠.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모른채 기계처럼 하루하루 똑같은 일을 반복할 뿐인거였죠."
"...그래도 우린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지..."
"그래서 우리도 그 희망이란 것을 한번 배워볼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저희는 결코 당신을 뱀파이어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아니,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겁니다. 죽이지도 않을겁니다. 당신은 어쩌면 마지막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을 들으며 즐거워하고, 영화를 보면서 울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이해할수 있는 마지막 존재인거죠. 그런 존재를 함부로 없앨 수 없죠."
"단지 그 이유뿐인가? 그것이랑 희망이 무슨 관계지?"
"그리고....당신은 햇빛에 노출되도 괜찮죠. 우리에겐 없는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죠. 우린 그 점을 연구해볼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그것이 희망이겠죠."
한 마디로 실험실 쥐가 되어달란 말이로군. 순순히 실험실 쥐가 되어줄순 없었다. 하지만 이 곳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여러대의 밴이 다리의 앞뒤를 몇겹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햇빛은 눈부시고 다리 아래로는 바다의 멋진 장관이 펼쳐져있었지만 더 이상 나에게 희망이란 없었다.
"나는 너희들의 희망따위가 될 생각은 없어." 나는 매몰차게 말하고는 내 차로 돌아왔다. 내가 걸어오는 동안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만보고 있었다. 하긴 그 파라솔같이 큰 우산을 들고 걷자면 상당히 우스워보일터였다.
카르페디엠. 현재를 즐겨라. 그 말이 맞았다. 더 이상 나에겐 미래도 없었다. 현재를 즐기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여름.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밴 쪽을 바라보니 어느새 그녀는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팬티만을 남기고 옷을 전부 벗어서 뱀파이어들이 타고 있는 밴 쪽으로 던졌다. 가슴 속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너희들은 햇빛도 못 받고 이 뜨거운 여름에 밴 속에서 나오지도 못한다 이거지? 으하하하"
나는 오디오를 틀고 차 밖에서도 음악이 들리도록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바람을 타고 울려퍼졌다. 차에서 돗자리를 꺼내들고 다리의 끄트머리에 펴고 돗자리에 반은 눕고 반은 앉은듯한 자세로 금문교 아래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차에서 아껴두었던 맥주도 꺼내왔다. 차가웠다면 좋았겠지만 미지근한데다가 김까지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더 맛있게, 기분좋게 마셨다.
그렇게 나는 뱀파이어들이 타고있는 차에 둘러싸인채로 보란듯이 옷을 벗고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며 썬텐을 즐겼다. 이 세상에서 나만큼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이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