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이 아마야구의 개혁 방향을 소개할 때다.
김 회장은 기자들과 간담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대부분이 아직도 나를 감독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비롯해 근황도 알렸다. 자연스럽게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에 빛나는 지난 시절이 화제가 됐다. 이력이 하나씩 조명되던 터에 대화의 고리가 한화 감독 시절까지 이어졌다.
김 회장은 그 대목에서 “누가 한화에 있었어”라며 농담을 했다. 그저 웃음으로 ‘한화 시절’의 이력은 대화에서 걸러냈다.
김 회장에게도 한화 감독으로 있던 2013년부터 2년간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2013년 42승1무85패로 최하위, 2014년 49승2무77패로 또 최하위를 했다. 2년간 승률 0.360(91승3무162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팀을 떠났다.
당시의 김응용 감독 역시 구단에 대해 내키지 않는 측면이 많았다. 자유계약선수(FA) 영입을 놓고도 호타준족의 외야수 ㄱ 영입을 요청했으나, 구단은 해당선수의 부상 등을 구실로 들었다.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ㄱ은 다른 구단으로 이적해 팀의 주축이 됐다.
다만 그때의 김응용 감독은 이런저런 문제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썩 내켜하지 않았을 뿐이다. 불만이든 또 다른 어떤 감정이든 마음 속의 것들을 가까운 사람들 하고만 나누면서 그냥 안고 떠나려했다. 지난 23일 팀을 떠난 김성근 감독과 차이라면 구단 내부의 불편한 부분과 싸울 의사가 있고 없는 것 뿐이었을지 모른다.
한화는 감독들에게도 참 어려운 구단이다.
레전드들이 즐비했던 2000년대 중반 이후로 팀을 내림세를 탄 끝에 바닥을 기어왔다. 레전드급 사령탑이 지휘봉을 잡고도 팀을 일정 수준 이상을 올려놓지 못했다.
한화는 개혁이라고 외치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외면을 해온 게 사실이다. 그저 리더 하나 바꾸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야구인 출신이 ‘단장 바람’이 불던 지난해 LG 사령탑 출신인 박종훈 단장을 영입하며 현장의 김성근 감독과 짝을 이루게 한 것도 사실은 예견된 실패였다.
둘은 야구관 차이가 확연했기 때문이다. 한화 그룹 내 누구의 아이디어로 이런 조합이 짜여졌는지 그에 대해 야구계는 아직도 설왕설래하고 있다. 구단 차원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전문가 부재 상태로도 보인다.
김 감독이 팀을 떠나게 된 지난 21일에는, 구단 운영팀장이 단장의 지시라며 김 감독에게 “전달사항 있다”며 “훈련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김 감독은 ‘사임 사태’의 발단이었다.
현장의 야구인들은 “정말로 김성근 감독에게 구단 직원이 그런 얘기를 했냐”며 되물었다. 현장의 시각으로는,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한화에 있었냐”는 김 회장의 농담으로 그 당시에는 기자들도 많이 웃었다. 그러게 그게 또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