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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총장 당선 축문
게시물ID : sisa_1355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트리에스테
추천 : 3
조회수 : 51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1/19 23:05:00
  김기섭 교수에게




  15세기말 위명을 날린 콘도티에레(용병대장) 중에 풍운아 체사레 보르자가 있었다. 당시는 프랑스 루이 12세의 침입으로 이탈리아가 오랜 동안 계속될 전쟁의 암운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보르자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교황 알렉산데르 6세였다. 그는 이탈리아 중북부의 로마냐와 마르케 지방을 묶어 아들을 위한 새로운 국가를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론상으로는 교황령이었지만, 그곳에는 이미 대리 통치자들이 다수 있었고, 교황의 계획은 결국 이들을 쫓아내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자의 대립과 갈등은 불가피했다. 보르자는 놀라운 지략과 무용을 발휘하여 이들을 하나하나 제압해 나갔다. 하지만 1503년 교황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힘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누구나 보르자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그 운이 다한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피렌체 사절로서 보르자 진영을 들락거렸던 마키아벨리는 뒤에 보르자의 몰락을 그가 비르투가 아닌 포르투나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비르투는 자신의 총체적인 능력이고 포르투나는 그 능력의 통제 밖에 있는 외적 조건과 상황을 뜻한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모든 종류의 리더들에게는 비르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포르투나의 도움이 없다면 비르투만으로는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지론이었다. 거꾸로 비르투의 발휘 없이 포르투나에게만 의존하여 성공하는 수도 있으나, 추후의 결과는 대단히 불안하게 된다. 보르자는 분명히 비르투를 가진 인물이었으나, 아버지가 교황이라는 지나치게 우호적인 조건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비르투를 발휘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어제 저녁 부산대학교 총장 선거에서 같은 과의 김기섭 교수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언뜻 보르자의 일화가 내 머리를 스쳤다. 김 교수는 내가 같은 과에서, 혹은 교수회 활동을 하면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거의 20년 가까이 지척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대체로 적이 없을 정도로 온화한 성품이면서도 나름의 진보적 방향성을 지켜온 쉽게 찾기 힘든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얼마 전 인문대 학장 선거에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성공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총장 되기보다 인문대 학장 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나왔을 법하다). 나는 그가 앞으로 평소에 지켜온 인문학적 신념과 가치를 십분 발휘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김기섭 총장당선자가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는 이번에 본인의 성공이 비르투보다는 전적으로 포르투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 이유는 여기서 세세히 얘기하지 않아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포르투나는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김교수는 아마 곧, 그의 성공이 자신의 덕분임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과 소집단들의 존재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총장 선거가 명분이야 무엇이든 기본적으로 조직표에 의존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며, 이번처럼 같은 캠프에서 무려 3명의 주자(走者)가 뛴 초유의 이어달리기 경주라면 더욱 더 그럴 수 있다. 김교수는, 물론 잘 해 나갈 것이라고 믿지만, 이런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캠프의 끈끈한 충성심 이상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기대하고 결선에서 그를 선택해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선의(善意)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지닌 비르투 속에 포르투나를 융합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몇 가지 진부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고언(苦言)을 할까 한다. 첫째, 총장 취임이 확정되는 즉시 앞으로 부산대학교라는 학인공동체를 운영해 나갈 철학이랄까 어쨌든 그런 방향을 제시하기를 바란다. 두루뭉술하고 관념적인 표현보다는 길의 방향이 보이도록 가능한 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내놓았으면 좋겠다. 물론 여기에는 김 교수의 선명한 자기 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 

  둘째, 참 어려운 주문이겠지만, 논공행상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신을 도와주어 고맙다고 자기 캠프 위주로 직위를 주다보면 필연코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총장선거처럼 큰 규모의 선거에서는 온갖 종류의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주위에 몰리게 된다. 명분이야 모두 그럴싸하지만, 그 이면에는 모두 자기만의 욕심들이 있다. 이들의 욕심 채우기에 도움을 주다보면 총장으로서 가야할 새로운 길에 대한 원래의 비전은 희미해질 우려가 있다. 어떤 캠프의 후보가 총장으로 선출되는 순간 그 캠프의 할 일은 끝나야 한다. 더 이상 적과 아군으로 나누는 이분법은 사라져야 한다. 이후 총장은 누가 캠프의 일원이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자신의 새로운 비전을 성취하는 데 적임자인가를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누구든지 리더가 되는 순간,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 이상으로 언제나 부패하기 마련인 권력의 본질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부산대 총장으로서 작금의 현안이 되고 있는 법인화 등을 둘러싼 교과부의 속류적 행태와 조치에 대해 강력히 저항해야 한다. 부산대를 비롯한 큰 규모의 몇 개 국립대만 힘을 합쳐도 교과부의 교묘한 유인술책들을 막을 수 있다. 부산대가 그 선두에 서야 한다. 총장이 앞장서야 한다. 교수회장은 (힘없는, 그래서 때때로 눈치나 보는) 야당이고 총장은 교과부를 추종하는 여당이라는 것이 전 총장시대의 문제였다면, 이제 모두가 힘을 합쳐 교과부의 사악한 정책에 저항하는 범 야당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김기섭 총장후보자는 평교수 시절 국교련 사무국장으로서 이런 길을 가본 경험이 있다. 부디, 일개 행정수장으로서의 부산대 총장이 아닌, 한 시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지성으로서의 부산대 총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자신을 총장이 되는데 도움을 준 포르투나를 대승적으로 극복하고 포용하면서 스스로에게 잠재된 비르투를 발휘하는 ‘위기의 리더십’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교수의 총장 선출을 같은 과, 같은 대학의 동료로서가 아니라, 부산대학교라는 학인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글은 저희과 교수님 중 한분께서 당선축하와 당부의 글을 학교 홈페이지에 기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교수님들 아래에서 수학한다는게 정말 영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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