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흥5년명 금동불광배로 밝혀지는 장수태왕의 연호 그리고..
1915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금학동 탑골이라고 불리던 절터에서 한 점의 금동석가불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이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이 불상의 광배光背에 연호年號와 간지干支가 함께 기록되어 제작연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인데요 거기에 기록된 명문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건흥 5년 병진년에 불제자 청신녀인 상부의 아암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을만드오니 원컨대 태어날 때마다 부처님의 진리를 만나 불법을 듣고자 기원합니다(建興五年 歲在丙辰에 佛弟子 淸信女 上部 兒庵이 造釋迦文像하오니 願生生世世에 値佛聞하노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장수홍제호태열제(412~491)는 연호를 건흥으로 고치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영토를 넓히고 개척하시어 금강 이북이 고구려에 귀속되었다(長壽弘濟好太烈帝는 改元建興하사 仁義治國하시고 恢拓疆宇하시니 熊津江以北이 屬我라 「고구려국본기」)
- 412년 임자년 장수태왕 1년
- 413년 계축년 장수태왕 2년
- 414년 갑인년 장수태왕 3년
- 415년 을묘년 장수태왕 4년
- 416년 병진년 장수태왕 5년
위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장수열제때의 연호가 건흥이고 광개토열제가 39세인 412년 임자壬子에 승하하셨다면 당년에 장수열제께서 계위하셨을 것이고 즉위년칭원법에따라 건흥 5년은 416년이 되고 416년의 간지가 또한 병진丙辰임으로 즉위이후 재위년과 간지가 정확하게 일치하게 됩니다
따라서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금동석가불상의 제작은 신라가 아닌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이고 장수열제 5년 서기 416년에 제작된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환단고기의 기록이 없었다면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1915년에 발굴되었으므로 환단고기는 1915년 이후에 발간된거라는 둥, 이유립 선생이 이걸 반영한거라는 등의 추정을 하는데 이 추정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이것을 껴맞추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지금 역사학자들이 연대를 맞추었겟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6세기 것이라고 아직도 헤매고 있는 현실
사실 지금도 환단고기 기록을 애써 외면하고 배척하고 있기 때문에 6세기꺼니 아니니 하면서 헤매고 있습니다.
"명문으로 보아 536년 또는 596년에 불심이 깊었던 여자 신도인 아암이 내세에서의 구원보다는 불법을 영원히 듣고자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광배 뒤에 「건흥5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의 명문이 있어 6세기 조성된 석가삼존불임을 알 수 있다."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병진년은 대체로 536년이나 596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536년 설은 건흥 5년을 안원왕 6년으로 추정한 결과이고, 596년은 광배의 미술사 양식의 흐름에 따라 판단한 결과이다." - 법보신문 2016.01.05 -
▶그리고 지금 대부분의 서적이 광개토열제의 승하년과 장수열제의 즉위년을 서기 413년으로 잡고 있는데 이것도 위의내용과 374년생인 광개토열제가 39세에 승하셨다는 것에 의거하여 412년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