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저격글이 아닙니다, 다만 북미 원주민들에 대한 일방적 이미지의 문제는 제법 크다 라고 생각을 하고 실제로 그러한 이미지의 큰 오류가 있어 적는 것 뿐이지요,
흔히들 말하지요, 북미 원주민들은 어떠한 국가 체제를 구성하지 못하고 부족제로서 극히 소규모 촌락을 구성하고 단 한차례도 서로간에 전쟁/전투를 벌인일이 없으며 우주와 영적인 직관에 뛰어나고 자연을 잘 이해 했으며 자연과 인간.동물.식물들과의 조화로운 공존의 삶을 살았던 아주 이상적인 종교/사상을 가진 민족이었으나 유럽인들이 일방적으로 그 들을 박해하고 학살하였으며 그 들과의 공존이 불가능했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러할까요?
사실 이 주장은 1960년대 이전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북미 원주민들을 설명하던 주장에서 결론만 바꾼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백인들이 도래하기 이전의 북미 원주민들은 매우 정체된 역사와 문명을 가진 이들로서 유럽인들이 아니었더라도 언제든지 도태될수 밖에 없는 이들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 들은 오로지 북미 원주민들의 언어, 생계 방식, 관습 등에만 집중했을뿐 그 들의 문화적 다양성이나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발전한 모든 문화나 변화를 무시하고 그 들의 금속 채굴 및 가공 기술이나 농업 기술, 각종 도자기와 고분등 다채로운 그 들의 삶은 극동 아시아/중앙 아메리카/남 아메리카에서 전래된 것으로 치부해버렸습니다,
그 들은 북미 원주민들을 문자 그대로 어떠한 문화적, 문명적 발전이 전무한 오로지 이상적인 종교/사상'만'을 가진 야만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 결과와 주장들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유럽인들의 도래가 단순한 황무지와 이상향을 침탈한 것이 아니라 인구가 밀집된 '다문화' 사회에 유럽인이라는 부족을 더한것에 불과할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북미의 북서 해안의 원주민들은 바다의 포유 동물들을 비릇한 각종 어로 행위가 발달하여 높은 항해 기술과 목재 가공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서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작은 포유류를 사냥하고, 야생 식물을 채집하는 삶이 발전하였으며 이 들은 멧돌을 발명하여 북미 대륙 전역에 전파하였으며 각종 바구니를 만드는데 능했습니다, 동부의 인디언들은 풍요로운 대지의 축복을 받았으며 가장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여 이미 기원전 2,000년 경에 중 남미로부터 콩, 옥수수, 호박 등을 받아들여 농사 기술을 진보시켰고 가축을 사육시키는 등 농업 혁명이라 부를 만한 단계에 올랐습니다,
그러한 원주민들은 다시금 제각기 다른 문명권과 국가들로 세분화 할수 있으며 그 문명권들은 다시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 볼수 있습니다,
부족들은 다시금 세부적 씨족들로 갈라졌으나 부족들은 이해 타산을 위하여 이로쿼이 연맹과 같은 연맹 국가를 결성하거나, 아파치와 같은 단순하고 느슨한 연합체를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아나사지와 카오키와 같은 거대 도시 국가들도 빼서는 안되겠지요,
이러한 인디언들과 백인들의 만남이라는 것이 결코 일방적인 악과 선의 조우가 될수는 없는 법입니다만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자원과 소유물로 보는 백인과 상호성을 존중했던 인디언이 달랐고, 사유 재산권을 당연하게 여기는 백인과 사유 재산권을 터부시 여기는 인디언이 같을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개인 주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백인과 집단을 우선시 하는 인디언이 같을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양측의 의견이 마냥 다르거나 서로를 배척한건 아닙니다, 버지니아에서 비옥한 토지를 선점한 농장주와 변경의 개척민들의 의견 대립으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줄을 잘못서서 큰 피해를 입었던 일도 있지만 메릴랜드에서는 언제나 정당한 댓가를 주고 받는 매우 우호적 관계로서 오히려 인디언들이 강대한 '백인' 부족과 동맹을 맺고 그 들과 공존하기도 했지요,
당장 변경의 개척민들은 '황무지'를 탐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의 상인들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 들의 삶을 변화 시키거나 배척시키기에 앞서 자본주의적 본능?에 따라 그 들을 존중하고 기꺼이 손을 잡을수 있었습니다,
필립왕 전쟁 당시 왐파노와그 족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에 맞서 이로쿼이 연맹의 모호크 족은 기꺼이 그 들과의 오랜 갈등과 수 없이 반복되온 전란 그리고 백인 정착민들과의 동맹 관계에 따라 일어섰습니다, 선교촌에 기꺼이 경제적/군사적 보호를 받아들이고 들어간 원주민들도 빼놓을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이로쿼이 연맹에서는 동맹 부족의 하부 씨족들까지 일방적으로 강제할수 없기에 그 들이 백인 거주민들에 대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을수 없었지만 백인들은 이로쿼이 연맹의 행동으로 간주하여 이로쿼이 연맹을 공격했습니다,
백인이 인디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시각차를 견디지 못하고 인디언들이 이주민 수백명을 학살한 버지니아의 사태도 있습니다.
이렇듯 단순하게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선과 악을 논할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그러한 학계의 주장이 백인들의 학살을 옹호하기 위한 주장이 아닌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학살과 갈등의 배경이 무엇이며 이 들이 그 시기에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 왜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침탈했고,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밀려나갈수 밖에 없었는지 더욱 명확하게 직시할수 있게 만들어주지요,
가령 우리는 백인들의 일방적인 침탈을 논하지만 영국, 프랑스,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남동부 내륙 지역의 크릭, 체로키 등의 부족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프랑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 들의 동맹인 척타우 부족을 이탈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행한 노력이나 치카소 족과의 동맹관계를 통하여 견제했던 사실, 그리고 체로키 부족에 대한 지원을 거절한 까닭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부분을 불태웠던 3년 전쟁을 치뤘던 사실도 유명하지 않지요, 반대로 조지아에서 외교를 통하여 크릭족을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이탈시키는 한편 스페인과의 대립관계를 유지시켜 평화를 지켰던 사실도 있지요,
프랑스와 영국과의 '공격적 중립'을 기반으로 하는 동맹 관계를 통해 평화를 지키다 결국 프랑스의 정규군과 결전을 벌였고 그 전쟁에 승리한 이로쿼이 동맹의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다지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 인디언들이 본격적인 대장간을 갖추고 백인들의 화기를 소규모 나마 양산하거나 수리하고, 총탄 등 군수 물자를 양산했던 사실도 외면받는 사실중 하나일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백인 우월자들의 주장에서 결론만 바꾼 이야기를 통하여 그 들이 그러한 침탈에 대응하여 어떻게 살아갔는지 오히려 무지를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글쎄요, 이러한 점을 과연 역사라고 볼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프로파간다 라고 봐야 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