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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제국 시기, 헝가리 잡설
게시물ID : humorbest_13592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5
조회수 : 2801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12/30 14:57:31
원본글 작성시간 : 2016/12/28 21:12:18



Flag_of_Hungary_(1867-1918).svg.png

대타협 이후, 헝가리 왕국 내에서 헝가리인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헝가리에 살던

독일계와 유태인들의 헝가리화가 이중제국이 선포된 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점과 헝가리 왕국내에서

심각해지는 슬라브계와 루마니아인에 대한 차별과 가난을 피해 그들이 국경 밖의 '동포의 국가'로

떠나거나 신대륙으로 향하는 이민선에 몸을 실은 것 때문이었다.


이런 흐름속에서 대타협직후에는 헝가리왕국내에서 40%수준이던 헝가리인의 비율은 1910년대에는 54%로

헝가리왕국의 다수를 점하였다. 더욱이 이 수치에 대타협 직후, 헝가리인들과 타협하고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나 내정의 자치권과 자치의회를 구성할 권리를 얻은 크로아티아인들을 헝가리왕국의

지배민족으로 규정한다면 그 비율은 더욱 높았다.


이중제국은 , 여전히 입헌주의가 발달한 서유럽에 비해 군주권이 강력한 합스부르크 군주국이라는

한계를 가졌지만 독일계 민족이 주도하던 단일제국에서 헝가리인,

그리고 제한적이게나마 오스트리아 영내에서는 체코인, 헝가리 영내에서는 크로아티아인들이 권력을 나눠가짐에

따라 대타협 이전에 비하면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하였다고 평할 수 있다.


이런 정치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중제국, 특히 헝가리의 사회는 매우 후진적이었다.

헝가리의 지방 주(州), 상당 수의 경작지의 절반 이상이 고위귀족의 영지이거나 신분, 경제적 특권을 보유한

지주계층의 소유였다.


오스트리아가 시행한 농노해방은, 명목상으로는 예속민들을 자유롭게 하였지만,

토지개혁 없는 농노해방은 실질적으로는 헝가리 농촌을 농노해방 이전과 비교해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고위귀족들은 막대한 규모의 영지와 정부 고위직을, 지주들은 토지와 지방행정의 요직,

중앙정부의 중간책임자리를 차지하고 헝가리가 사실상 구체제와 다를것 없이 굴러가게 만들었다.

여기에 그들을 뒷받침하는 헝가리 가톨릭교회 또한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고

큰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헝가리의 구체제를 받치는 기둥 중 하나였다.


그래도 헝가리인들이 헝가리 귀족과 지주의 통치를 받는 지역은 발생하는 문제가 경제적 문제에 국한되었지만,

헝가리인이 지배계층을 이루고 비(非)헝가리인이 피지배계층을 이루는 지역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경제적 문제들이 민족문제를 유발하였다.


Dissolution_of_Austria-Hungary.png

헝가리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었던 북부헝가리(슬로바키아, 카르파티아 영토)와 트란실바니아가 대표적이었다.

두 지역에서 헝가리인들에게 예속된 슬로바키아인, 루테니아인, 루마니아인들은 대대손손

헝가리인들 밑에서 땅을 경작하고 경작물을 수탈당했지만, 단 한평의 토지도 소유할 수 없었다.

(물론 이는 헝가리인이 하층민인 곳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모순이 지속적으로 누적되고 있었지만 이중제국시기 헝가리는 유럽 평균을 상회하는

연평균 2.5% 성장, 국민총생산 3배 증가, 곡물 생산량 3배 증가를 달성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특히 농업분야에서 새로운 작물의 도입, 종자개량, 농기구 개량 농기계 보급, 경작지 효율화등의 조치를 통해서

곡물생산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다.


이 곡물생산의 폭발적 증가는 농촌의 소작농, 농업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되었고

이들에게는 경제성장의 과실이 돌아가지 않았다. 늘어난 곡물 산출물은 주로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이후에 언급할 헝가리 공업발전을 위한 자본축적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자본축적을 바탕으로 헝가리는 이중제국 시기 동안 금융업의 발전

(이중제국 선포당시 10개 이하이던 금융기관이 1913년에는 50개 이상)하였다.

또한 곡물수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헝가리의 제분공업은 자본축적에 힘 입어

1870년대에는 이미 세계적 수준을 자랑했다.


또한 늘어난 곡물 생산을 사료로 하여 낙농업, 돼지사육, 육우 사육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880년대부터는 곡물수출에 비견할 정도로 육류와 가축 수출이 증가하였다.


곡물생산과 가축사육의 증가는 헝가리의 식료품 공업(통조림, 염장 등)을 성장하게 하였다.


이렇게 곡물수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축적된 자본은 농기계를 중심으로

하는 기계공업, 군수물자와 농약을 중심으로 하는 화학공업의 발전에 투자되었다.

또한 1867년에 2200km에 불과하던 철도연장도 1913년에는 22000km로 늘어났다.


이중제국 시기 헝가리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에서 농공업국가로 성장하였다.


헝가리왕국은 넉넉해진 재정을 이용해 교육시설을 설치하고 의무교육제도를 보급한다.

이중제국 시기 의무교육해당연령의 90%가 교육기관에 다님으로써

헝가리왕국의 문맹률은 55%에서 30%로 감소하였다. 다만 헝가리왕국에 미치는 가

톨릭교회의 강력한 영향으로 공립학교보다 종교학교가 많았다.


교육분야는 헝가리왕국의 헝가리인 우대 정책과 기만적인 행동을 대표한다.

헝가리 정부는 모든 민족에게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헝가리의 교육법과 교육정책은 헝가리어를 교육기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로 규정하였다.

이런 배경속에서 헝가리왕국의 중등학교 졸업생의 85%, 대학교 졸업생의 90%는 헝가리인이었다.

그나마 제한적이나마 자치권을 가진 크로아티아인, 국경 밖에 동포의 국가가 있는 루마니아인에 비해

슬로바키아인들은 차별적인 교육정책으로 1918년까지 유의미한 지식인계층이 성립되지 못했다.


이렇게 강압적인 헝가리 왕국이 덜 강압적인 오스트리아에 비해 안정적으로 보였던 것은 오스트리아가

체코인 등의 정치적 발언과 집회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였기 때문이었다.


헝가리왕국에서 비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을 대표할 대표를 선출할 수 없었고, 오로지 통치를 받는 존재일

뿐이었다. 헝가리 정부는 이런식으로 강력한 채찍을 휘두르고 교육기관을 통한 헝가리화의 세례를 베푼다면

비 헝가리인들이 쉽게 동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hey-slovakia-hun-cs-you-are-not-the-valid-state-1774544.png

헝가리인들이 헝가리왕국의 피지배민족을 어떻게 봤는지 보여주는 폴란드볼
(특히 슬로바키아에 대해서)

그 믿음은 1914년과 1918년에 산산조각이 났다.


images.jpg

그리고 대가를 치러, 이제는 헝가리인들이 국경 밖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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