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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삽니다 (2)
게시물ID : economy_136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백살이다
추천 : 27
조회수 : 1717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15/07/13 20:56:46
지난번 글에 관심을 많이 보여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최근 들어 이곳 저곳에서 그리스에 대해 많이 털어줘서 이제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많이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만

그래도 언론사에서 외신 받아다 그대로 안쓰고 특파원 보내는게 큰 의미가 있듯,

현지의 분위기를 전달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두번째로 키보드에 손을 얹어봅니다.

그전엔 좀 두서없이 적었는데, 이번엔 좀 더 두서없이 적어보겠습니다.



1. 현 상황 점검


국민투표 이후, 60%의 Oxi (아니오의 그리스어, '오히'라고 읽습니다) 에 그리스 전체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심지어 시리자측에서도 1% 안팍의 차이로 승부가 날거라 예상했지만 압도적인 결과였기 때문인데요.

이건 마치 자기가 Oxi에 투표해놓고도 결과가 나오니 '어 이거 뭐야 무서워. 왜이렇게 Oxi가 많이 나왔어' 같은 시츄에이션이랄까 암튼 그렇습니다.

이 국민투표 결과에 놀란건 그리스 국민들 뿐 아니라 채권단도 마찬가지였는 듯 합니다.

일주일의 유예만 주고 다가오는 일요일 (바로 어제죠) 까지 추가 구제금융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면 더이상 대화는 없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Oxi에 표를 던진 그리스 국민들은 매우 고무되었고, 이제 치프라스가 채권단과의 굴욕적인 협상을 끝내고 '모든 것이 잘 될거라'는 희망을 품기 시작합니다.

주: 뭐가 어떻게 잘 될것 같냐 묻는 질문에 이러쿵 저러쿵 해서 이렇게 될거다 라고 답을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이게 그리스에 대해 국내외 언론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포인트입니다. 이 사람들 뭔가 구체적인 예상이나 전망이 없습니다. 사실상 이게 작금의 사태를 불러온 주요한 원인이죠.

하지만, 국민투표를 소환해놓고 뒤에선 채권단에게 요구사항을 대부분 수용할 뜻을 내비친 치프라스 아니었겠습니까

지난 주말이 다가오기 직전, 그리스는 채권자들이 기존에 요구했던 긴축안 대다수를 그대로 반영한 제안을 제출했고

국민의 뜻에 따라 집권을 하고, 국민투표로 그 의사를 재차 대비쳤던 그리스 국민들은 크나큰 배신감에 빠지는 듯한 인상입니다.

그 와중에 아나키스트 집단까지 들고 일어났다는 걸 보니 진짜 국가부도에 이르면 이 나라는 어쩌면 무서운 곳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나온 그리스의 최종 긴축안은 좌파 프랑스 정권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실상은 독일과 프랑스의 유럽연합 내 미묘한 줄다리기 구도로 전이된 것 같습니다.

프랑스를 개무시하지 못하는 독일의 입장에선 그리스의 긴축안이 무난히 통과될거란 예상을 뒤엎고,

그리스의 최종제안이 유럽연합 테이블에 올라가는데까지만 10시간의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예상보다 길었던 대화 때문에 예정되었던 유럽연합 회의가 지연되었고 밤이 되서야 비로소 그리스의 긴축안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관한 유럽연합 정상회의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번엔 더 해서 14시간이 넘는 회의 끝에 결국 유럽연합 전원이 합의를 도출, 그리스와 채권단의 추가 구제금융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2. 앞으로 전망


치프라스가 브뤼셀에서 들고온 합의안이 최종적으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이 합의안에 포함된 여러 개혁 혹은 조치들이 그리스 국내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그리스 의회에서 통과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연합정당인 시리자 내에서도 치프라스와 뜻을 달리하는 집단이 많이 있어 비록 시리자와 그 연정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통과는 쉽지 않을거란 전망입니다.

애초에 치프라스는 이 점을 우려해, 긴축안의 맨 마지막줄에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할 경우 잠시 유예기간을 갖는다'는 문구를 집어넣은 것으로 알려지는데요,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유럽연합의 강한 의지 때문에 '아마도' 이 문구는 삭제되었으리라 예상됩니다.

채권단은 이에 대해 오는 15일까지 의회에서 이 합의안이 모두 통과되지 않으면 추가 구제금융은 다시 없던 얘기가 될거라고 못박았습니다.


아마 어떤 식으로든 의회에서 통과되어 구제금융을 받고, 추가 긴축안이 발효된다면

'긴축 철폐'를 모토로 당선된 치프라스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타격을 받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 꼬리를 내린 치프라스에게 유럽연합은 '소정의 보상' 격으로 총리자리를 보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예측도 해봅니다.



3. 국민투표의 의미


긴축 철폐를 공약으로 집권한 치프라스는 단계적 긴축 철폐의 일환으로 긴축 완화를 위해 유럽연합과 오래 대화를 해왔습니다.

의견차이가 서서히 좁혀지는 듯한 신호를 보내며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막판에 IMF가 긴축정책에 관해 강경한 태도를 내세우며 협상이 틀어졌습니다.

이에 대해선 그리스 측에서 일방적으로 배째라며 협상을 중단했다는 일부 목소리는 단언컨대 틀렸습니다.

그리스는 입장 차이를 좁히려 노력해왔고, 그 노력을 한칼에 무시해버린 IMF가 실질적인 대화 중단의 주범이죠.


치프라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수개월간 노력한 결과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해 억울함을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차원에서 채권단의 '무리한' 긴축안을 국민들에게 공개한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국민 여러분 대화가 중단된건 얘네들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려서지, 내가 무능해서가 아니에요 뿌잉뿌잉'이랄까요.

치프라스의 예측대로 국민들 다수는 채권단의 요구에 즉각 분노했고, 일부 사업가와 지식인 계층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어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채권단은 본인들의 '수탈적인' 요구가 치프라스에 의해 그리스 국민들에게 까발려지고, 국제사회에서 체면을 구긴데 대해 앙심을 품었다고 봅니다.

해서, 국민투표를 앞두고 지속적으로 국민투표의 절차적 위법성에 대해 강력히 성토했고

더나아가 국민투표 자체가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결과는 무의미 하며, 그 결과에 상관없이 다음에 나올 긴축안은 더욱 가혹해질거라 엄포를 놓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치프라스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국민투표를 강행했고,

결과적으로 압도적인 반대로 국민의 재신임을 받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 재신임은 채권단의 긴축안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얻은 조건부 재신임이었기 때문에,

그 뜻을 거르스로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한 현재 치프라스는 안팎으로 정치적인 위기를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어제 밤 내내 트위터에선 치프라스에게 협상장에서 나올 것을 종용하는 그리스 국민들과 유럽 전력의 좌파들의 트윗이 치프라스 계정을 향해 폭격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4. 현지 분위기


몇몇 르포 기사를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현지의 분위기는 'nothing has changed'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커피숍에 삼삼오오 앉아 몇시간을 웃고 떠들고 있고,

비록 60유로의 일일 현금 인출 제한이 걸려있어 조금 불편하지만 ATM 앞에 문전성시를 이루거나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국내외 언론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는 아마 국민투표 소환 직후 주말의 풍경을 우려먹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때는 채권단의 요구 중에 연금 삭감안이 있다는 사실을 안 노년층들이 연금을 하루라도 먼저 찾으려고 은행에 몰렸고,

제한적이지만 은행이 연급을 지급한 이후로부터는 진정된 상태입니다.

또한, 이 곳 사람들은 당장 쓸 현금이 있다면 굳이 매일 60유로를 찾지도 않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매일 60유로를 찾아 통장의 예금을 현금화 하는 사람은 저 뿐인 것 같습니다.

사실상, 은행이 망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직접 은행이 망하는걸 본 한국 사람인 저 말고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가 사는 곳은 비교적 작은 도시라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만,

지난 주 학회 참석차 갔던 그리스 제 2의 도시 '테살로니끼'의 풍경은 더욱 활기차고 더 생기가 넘쳤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광경을 봤다면 '나라가 곧 망할 지경인데 속편하게 저러고 있다니'라고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외 언론에서 아테네 '신다그마 광장'에서 연일 시위가 이어진다며 그리스 분위기를 불안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아테네 신다그마 광장은 그 주변에 국회의사당과 정부부처 건물이 밀집해있고, 기업의 본사들도 모여있는 행정 및 업무지구인지라,

원래 주말만 되면 각종 집회와 시위가 끊이지 않는 곳이고, 요즘엔 시일이 시일인지라 같은 주제의 집회들이 연달아 있을 뿐입니다.

마치 국가소요사태에 가까운 것처럼 그리스를 묘사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역시 클릭수 때문인가요?


마지막으로, 장모님에게 문자를 받고 매우 어이없었던 부분은 '수퍼마켓에 사재기가 극성이라 식료품 가격이 올랐고, 주유소에서도 기름을 넣기위해 줄을 섰다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고나서도 비슷한 안부문자를 받았는데, 이건 좀 심각한 왜곡같아 조금 화가 나기도 합니다.

사실관계를 정리해보자면,

오늘부로 일부 풀렸습니다만, 한동안 외국으로의 자금 흐름이 국가에 의해 일체 막혀있었습니다.

이는 제조업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해 약품과 생필품 일부를 수입에 의존하는 그리스 산업의 특성상, 수입품의 대금 결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 수입품의 국내공급 중단 사태를 야기했습니다.

때문에 일부 의약품 가격이 올랐고, 기름값 역시 올랐습니다만 폭등한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더욱이 지금은 무더위에 낮에는 외출도 못하는데 기름값 인상이 서민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은 전무한 수준이며, 일부 노년층에서 제한된 연금 지급액으로 약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식품의 경우엔 식료품 가격이 오르지도, 사재기 같은 건 있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그리스는 농업과 목축업, 관광산업이 전부인 나라입니다.

동네 수퍼마켓에 가보면 대부분의 식료품이 인근에서 수확한 것들로, 천만국민이 국내에서 나오는 식자재로 어느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입니다.

비록 유로존 탈퇴까지 이어진다 하더라도 이런 나라에서 식료품이 부족해 식량난을 겪을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제 아내가 자본통제 이후 수퍼마켓에서 스파게티면을 잔뜩 사가는 아주머니를 딱 한분 봤다고 하긴 했는데,

원래 여기 사람들은 식자재를 한번에 잔뜩 사다가 쟁여놓고 먹는 편이라 그렇게 특이한 광경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요는, 지금 그리스 국민들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합니다.

IMF 외환위기 시절 은행 문앞에서 울부짖으며 아우성치던 우리네 어머니들을 뉴스로, 직접 보았던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도 적응도 되지 않을 지경입니다.

국내 언론들이 그리스를 불안정하고 사단이 난 나라로 묘사하면서 얻는 이익이 무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자극적인 기사로 클릭을 유도해 추후 광고수익을 높이려는 뻔한 의도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그리스는 그저 미국발 세계경제 침체가 낳은 한 단면일 뿐, 이곳은 특별히 게으르거나 특별히 불쌍하거나 특별히 불안정한 나라가 아닙니다.


다 쓰고보니 경제보다는 시사게시판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일단 경제문제로 시작된 사태이니 여기에 꿋꿋이 적어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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