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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네요 ㅎ
번역업계에서 오래 일하시는 분들 치고 영화 자막 번역 해보는 꿈 안 가져본 분 없으실 겁니다. 저도 아주 가끔씩 시간 나면 영화 자막을 번역합니다.
처음엔 멋모르고 인기 영화의 자막 번역을 시도했었습니다. 근데, 인기 영화는 번역하려는 분들이 많아서 제가 경쟁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더라구요.
일단 속도가 안 돼요. 저는 의미를 곱씹고 곱씹고 해서 열심히 정확하고, 센스있는 번역을 하려는 편이거든요. 1년 365일이 거의 야근인데 집에 와서 잘난 몇 십 분에서 한두 시간 가지고는 진도가 얼마 못 나갑니다.
대부분의 경우, 제가 한창 작업 중일 때 다른 분에게서 이미 완성본이 나옵니다. 정말 잘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꽤 준수한 품질의 번역물을 내 놓으시는 걸 보면 감탄이 나옵니다. 근데 개중에는 너무 낮은 완성도로 빠르게 나와서 좍 퍼지는 자막들이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조금 맥이 빠집니다. 그렇다고 제가 번역한 걸 나중에 업로드하면서 이게 더 수정되고 괜찮은 거니 이거 보세요..라고 하기엔 앞서 자막 만드신 분들을 폄하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고....
그러다 보니 기껏 자막 만들고는 그냥 버립니다;;;;;;; 다 해놓은 인기 영화 자막을 몇 개나 버렸어요ㅠㅠ 내가 뭐 한다고 이걸 했나 싶더라구요.
한참 포기하고 있다가 눈을 돌린 게, 비인기 영화, 특히 사람들이 누가 자막 제작 좀 해달라고 요청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경쟁자도 없으니 맘 편히 느긋하게 해도 되고, 늦었지만 올리고 나면 꼭 누군가는 받아가십니다. 끝까지 기다렸던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저도 보람이 있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 개 하다 보니 영어 좀 하신다는 분들이 제 자막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제 의도가 이해되지 않을까 봐서요.
일단, 비인기 영화의 대사는 장면을 채우기 위한 의미 없는 대사, 뜬금없는 대사가 많습니다. 대사의 내용도 참 조리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전혀 정제가 안 돼 있어요. 특히 B급 액션 영화는 굳이 이런 대사는 왜 넣었나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저는 영화 자막 하나 마치려면 해당 영화를 전체적으로 최소 2~3번은 봅니다.그래야 앞뒤 관계, 인물 관계, 스토리 전개 등이 확실히 파악돼서 경/평어체 구분은 물론이고 호칭, 적정 표현, 은유 이런 걸 살릴 수 있거든요. 근데 스토리상 논리 구조 같은 게 전혀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니 번역을 하다가 말이 안 돼서 앞뒤를 맞추다 보면 제가 원대사와 다른 의미로 번역해야만 말이 맞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영어 좀 아시는 분이 본다면 오역이라고 생각하시겠죠.
그리고 상황에 안 맞는 대사도 정말 많습니다. 예를 들어, "Get down on the floor and put your hands behind your back"이라는 대사가 나오는 상황이라면 보통, 범인이 경찰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도망 못 가고 우물쭈물하거나, 경찰이 범인과 서서 대치 중이거나, 범인 제압이 거의 완료되어 마무리 중이거나 한 상황이어야 하죠. 그런데, 뛰고 있는 범인을 쫓아가는 경찰이 뛰면서 이 대사를 날립니닼ㅋㅋㅋㅋㅋ 어이 없게. 이런 대사를 곧이 곧대로 번역하면 아마 상당수의 분들은 자막에서 이미 짜증이 나서 영화 보는 재미가 확 줄어들 겁니다 ㅎㅎ
한 마디로, 실제 대사를 모두 그대로 번역하면 아무리 정확하게 잘 해도, 보는 이에게서 '이게 왠 헛소리야, 자막이 엉터리로군'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반대로 신경써서 대사를 고치는 수준까지 하면 오역 소리를 듣겠죠. 아주 잘 해야 본전, 웬만해서는 욕만 먹을 것 같아요.
그래서, 결론은 허접 영화 제작자들에게 "대사에 신경 좀 쓰고 만들어라"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 먹히지도 않을 얘기를 해서 뭐합니까.
그냥 제가 영화 선별하는 눈을 키워야죠 ㅠㅠ
그냥 소소한 하소연 하나 해봤어요. 영양가 없는 일기 읽어주신 분 감사 ^^
출처 | 내 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