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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게시물ID : gomin_1110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루가
추천 : 5
조회수 : 51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1/17 14:14:51
눈팅만 하다가 글까지 올리게되네요

살다보면 힘들때도 있고 괴로울때도있고 행복한 시간보다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들이 더 많이 
기억에 남는것 같아요
제이야기를 그냥 몇자 적어봤으면 하는 마음에 적어봅니다

제가 태어난건 82년 (지금 30살 ^^) 누구나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길 꿈꾸겠지만 
세상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는 않았죠
태어나서 첫돌이 지나고 부모님들의 이혼과 아버지의 재혼....
그렇게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새롭게 시작하셨고 그 사이에 이복동생이 태어났죠
그후로 시작된 새어머니의 구타와 갈굼이 저를 힘들게 했었죠
어릴적에 이혼과 재혼을 해서인지 그냥 저에게는 친어머니로 인식이 되었고
친척들도 모두 그냥 친어머니인냥 연극을 했더랬습니다
아주 어릴적에는 고모들집이나 친척들집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살았던것으로 기억이나고
학교에 다니면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지요
셀수없이 맞고 또맞고 벌서고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교)이였던 나에게는 지옥이였던 시절
주로 맞았던 도구들은 야구방망이 우산 기타등등 이였고 
매가 시작되면 최소 야구방망이로 백여대... 피멍들고 피터지고 머리깨지고 
매번 뭐가 마음에 안들면 "타작좀 해야겠네" 이런식으로 갈구고 타작이 끝나면 항상 이어지는 체벌.... 
제벌도 겨울철에는 팬티 바람에 쫏겨났고 무릅꿇고 손들고 투명의자 기타등등 한번 시작되면 한두시간은 
기본이였고 손톱물어뜯는다고 뜨거운물에 손넣을라고 하거나 가위로 손가락 자르려고 하다가 살 베인적도 
있고 집에있는 하루하루가 정말 지옥이였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되고 부쩍 키가크고 덩치도 좋아져 버려서인지 타작 횟수는 줄었지만
그래도 맞아야되었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때리는 건지 머가 왜때리는지 이유도 모른채 맞은적도 
여러번 있던걸로 기억이 나네요
만약 새어머니라는걸 알았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겠죠 
하지만 고등학교 올라서서도 그렇게 맞던 나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새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머리속은 하얗게 되고 눈앞은 노랗게 ....
집에 가기도 싫었고 얼굴보기도 싫었고 집에가서 그냥 이제까지 맞은거 다 돌려주고 걍 폐륜아고 머고
막나갈까 그런생각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 하나만 집에서 사라지면 평화가 찾아올거라는 생각에
집에서 나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생활합니다
물론 나와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과정에서 새어머니와 무수히 부딛이는 부분이 있었고
나오기로 직접적인 결정을 한말이 "여기 니 엄마 주소니까 찾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마" 
더이상 설곳이 없을거라는 생각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을수밖에 없었습니다
돈한푼 없이 집을나온 나는 그래도 학교는 졸업해야지 하는 생각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학교에서 취업을 나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생활을 했었습니다
돈을 벌자 오토바이에 눈이가 오토바이를 사서 미친듯이 타고다니다가 사고가 나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와중에도 아버지랑 새어머니는 "니가 사고쳤으니 니가 알아서 해!"이런
말과 함께 소식이 끈어졌고 병원에서 한달을 넘게 입원해있던나는 병원비를 감당할수가 없어서 
다 났지도 않았지만 병원에 이야기를 해서 나올수밖에 었었습니다
살아야했기에 다시 일을 했고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전선으로 뛰어들게됐습니다
보안요원 등을 하면서 고시원 이나 기숙사등 생활을 하면서 지냈고
그럭저럭 집나와서 자유로운 생활에 익숙해 져있던나에게 군대라는 걸림돌이 생겼고
4등급 판정을 받은 나는 공익요원보다는 병역특례병으로 지내는게 났겠다싶어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그곳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게 됍니다
그렇게 병역도 마치게 되고 평탄한 생활에 졌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곳을 그만두고
방황하기 시작했고
일년여를 방황을 하다가 결국 다시 공장으로 재 취업을 하게됍니다
기술을 배울때 확실하게 배운터인지 비슷한 업종으로 쉽게 취업할수가 있었고 
그렇게 다시 공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게임을 접하게되었습니다
게임안에서 만난 여자를 만나고 서로 좋은감정이 생겨 같이 살게되었고
단칸방에 이불한장 달랑 놓구서 시작한 신혼방이 그래도 우리둘의 공간으로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식구가 생겨서 그런지 막중한 의무감과 생활력으로 꾸준히 직장을 다녔고 어느정도 자리를 잡을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첫째 아이를 갖게되고 아빠가되었고 더욱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일을 무리해 가면서 하게됐고 몸이 안좋아진 나에게 한번에 시련이 옵니다
한쪽눈이 안보이기 시작했고 대학병원을 가서 확인하니 수술을 해야된다는 말과함께 수술을 하게됐고
4시간에 걸쳐 수술을 받게 됍니다 태어난지 몇개월안된 우리 꼬맹이와 나밖에 몰라주던 아내를 두고
수술대로 들어가던 그장면이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이 흘러내리내요
수술을하고 연락을 해봐도 어느 누가 한번 병원을 와주지 않더군요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색할만큼 정말로 나에게 가족이 있었나 싶을만큼 가슴이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이였습니다
꼬맹이을 업고서 버스타고 한시간 거리를 왔다갔다해준 아내의 정성으로 한달만에 퇴원할수 있었고
그 수술로 아직까지 오른쪽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기술이 있었기에 살아야 했기에 일을 다시 다녔고 그러던중에 조금더 돈을 많이 받을수 있는 직장으로 이직을 하고 그런과정에서 직장이 않좋아지고 하는 바람에 백수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려면 공장생활보다는 다른 업종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직업을 바꿔서 부동산일을 하게됐고
이제까지도 하고있습니다
부동산을 하면서 둘째 꼬맹이도 태어났고 부동산을 하면서 돈많이 벌어서 우리가족을 행복하게 살게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고 어렵사리 먹고사는것만 하고있습니다
도움받을 곳이라고는 정말 한군데도 없고 오로지 나 한명만 바라보고 있는 두딸과 내 아내에게 항상 미안하고 항상 잘할수있을거라는 믿음을 주는 아내에게 고맙습니다

행복이라는게 돈이 없어도 올수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있지만 막상 현실에 벽앞에서는 그게 잘 안되는 내 모습이 정말 한심스러워 보입니다
정이많아 그런지 나에게 대못을 박은 아버지나 새어머니에게 그래도 찾아가려 해봤지만
아직도 마음의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 두분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들께서 나에게 했던 가슴에 못박힐 말들과 구타를 전부 잊어 줄테니 그냥 내 두 꼬맹이한테 
할아버지 할머니로 남아달라는 그말조차도 필요없다하시고 
끝없이 나에게 아니 내 가족에게 못을 박으시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가장 피해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왜 아직까지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건지도 
이해가안되는 상황이네요
하지만 지금은 행복합니다
지금 가진거 내 주머니에 있는 단돈 5천원뿐이지만 그래도 집에가면 항상웃어주는 두딸과 아내가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비록 가진거 없고 당장 내일 먹을거 걱정해야 되지만 그래도 우리 네식구가 있어 항상 웃으면서 
살고있습니다
2011년 시작입니다 
이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분들 복많이 받으시고 
제발 저도 복좀 나눠주시고 힘좀 내게 화이팅 한번씩만 부탁드립니다
올 한해 모두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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