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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유례없는 폭력의 시대 - 몽골의 고려 침입 전쟁
게시물ID : history_286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늘의유령
추천 : 18
조회수 : 3838회
댓글수 : 21개
등록시간 : 2017/08/06 22: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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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송나라와 원나라의 전쟁을 다룬 글을 쓰신 신불해님의 또 다른 글입니다.


http://i.imgur.com/KxpwEar.jpg

종종 이런 말을 봅니다. 한국사에서 외국 군대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다닌 대표적인 두 사례, 고려 때 몽골의 침입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 중, 어느쪽이 더 참혹하고 피해가 컸을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병력이 20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었고 몽골의 침입 당시에는 3만 정도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피해가 더 크지 않느냐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경우는 국가인 조선이 일본과 싸울 의지를 버리지 않았고 초창기 쭉쭉 밀려나던 시기를 제외하면 7년간의 전쟁 중 상당수를 서로의 군대가 전선을 형성하고 대치했습니다. 중간 중간 외교적 절차가 진행되면서 전쟁 자체가 소강 상태에 이른 경우도 있었구요. 김덕령 등이 그 무렵에 이름을 떨쳐서 별로 전공이 없죠. 싸움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즉 7년 간 실제로 교전한 상황은 그보다는 훨씬 적고, 교전을 하지 않을때도 아군이 지키고 있는 지역의 전선을 유지하면서 그 안쪽의 백성은 보호 받았습니다. 좀 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군이 한반도 내륙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 적은 개전 첫 해 1년 뿐입니다.





고려 시기 몽골의 침입은 1231년부터 1259년까지 30년 간 이어집니다. 몽골 군은 한번 고려를 침입하면 대략 6개월에서 7개월 정도 휩쓸고 다녔는데, 이렇게 몽골군이 직접적으로 고려 내부를 휩쓴 기간은 11년 정도 됩니다. 





그런데 당시 고려와 몽골은 전선을 형성하고 싸운게 아닙니다. 그냥 몽골군이 고려 땅을 짓밞고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임진왜란은, 단발마 비명을 내지르게 하는 불벼락이었습니다. 몽골의 침입은, 폭력의 시대에 펼쳐진 내 삶의 일부분이었고.





고려와 몽골이 싸워서 고려가 승리를 거둔 전투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투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게, 그런 전투들의 거의 전부가 산성에서 고려군이 수성하며 몽골군을 막아낸 전투들입니다. 고려 조정에서 백성들에게 지시했던 안전책은 딱 하나 뿐입니다. 몽골군이 오면 섬이나 산성으로 알아서 피난해서 피해라.





그나마 군대가 저항같은 저항을 좀 했던 1차 침입 이후로 2차 침입부터는 아예 '전쟁' 이 사라집니다. 분명 몽골군이 쳐들어와 있는데, 정부군도 없고, 전선도 없고, 조직적인 유격 전술도 없습니다. 이 전쟁은 그냥 전술 자체가 없습니다. 그냥 간헐적인 전투만 있습니다. 유일한 승리들은, 산성으로 꾸역꾸역 피난 온 현지의 백성들이 찌꺼기 정도 남은 지방군인들과 힘을 합쳐 겨우겨우 적을 막은 승리들 뿐입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근처 병력의 소집이나 합동 지원 따위도 없습니다.





그럼 분명히 '전쟁' 이 벌어지고 있는데 '전투' 로 기록되지 않는, 다른 순간들은 뭐가 벌어지고 있느냐? 그냥 무주공산으로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 다니는 몽골군의 활보만 있을 뿐입니다. 





1256년에 신안 압해도에서 현지의 '백성' 들이 몽골군을 물리친 전투가 있습니다. '군인' 이 아니라 '백성' 들 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고.... 저 압록강 너머 북쪽에서 내려온 몽골군이 저 남쪽 신안에서 싸우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십니까? 그 몽골군이 신안까지 내려오는 무주공산 동안 그 통행로에 있었던 곳들이 어찌되었을지, 그리고 그렇게 활보하던 몽골군이 '보급' 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했을지... 기록된 전투가 다가 아니라는 건 이럴때 쓸 말입니다.





이게 산성을 중심으로 방위라인을 설정하고 흩어진 병력들이 서로 연락을 취해 공조하며 적의 수비를 막는다면 모를까, 그저 살기 위해 백성들이 산성에 들어가서 웅크리고만 있을 뿐이기에 몽골군은 그냥 그런 산성들을 지나쳐 다른 곳을 약탈하면 됩니다. 모든 백성들이 산성이나 섬으로 도망칠수는 없으니까요. 




몽골군의 평균 기동 속도는 50km고, 최대로 급할시엔 하루 100km도 너끈히 이동합니다. 아침만 해도 평화롭게 지내다가 갑자기 나타난 몽골군이 가족 친지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삶의 터전을 박살내는데,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최소한 일본의 20만 대군이 온다고 하면 소문을 듣고 피난이라도 가지, 50km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습격해오는 적을 상대로 일반 백성이 어떻게 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몽골군의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蒙人 漬薪人膏厚積 縱火攻城 灌水救之 其火愈熾
몽고 군사가 또 나무에 사람 기름을 적시어 두껍게 쌓고 불을 놓아 성을 공격하므로 물을 부어 그것을 구하려 하였더니, 그 불이 더욱 성하였다.





귀주성 전투 당시의 기록인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몽골군은 나무에 '사람 기름' 을 적셔놓고 불을 지르며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 기름' 을 어디에서 쥐어짰겠습니까? 고려 백성을 죽여서 그 고려 백성으로 기름을 짜서 자신들의 병장기 용으로 사용했던 겁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모르도르 군이 곤도르 병사 죽여서 투석기로 그 머리 던지는 장면은 차라리 여기에 비하면 인도적인 장면입니다.





합단(哈丹, 카단)의 병사 수만 명이 화주(和州)·등주(登州) 두 주를 함락시킨 뒤 사람을 죽여 양식으로 삼았으며 부녀를 잡으면 윤간한 후에 포를 떴다.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보내어 이들을 막았다.




한참 절정으로 이루어지던 몽골 원정 침입보다는 좀 뒤인 1290년 무렵에 카다안의 침입 당시의 기록인데, 몽골군의 병사들이 고려군의 주를 함락시킨 후에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고, 여자는 강간을 한 다음 포를 떠버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카다안의 병사들은 몽골 내부의 군사적 투쟁에 실패해서 고려로 온 군단인데, 즉 본래는 그냥 몽골 정규군입니다. 기질은 크게 다를게 없습니다.사람 잡아서 강간하고 포를 뜨는 부대가 11년간이나 고려 내부를 무주공산으로 활보하고 다닌 겁니다.






“몽병이 춘주를 함락할 때 항(恒)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의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 아래 쌓인 시체가 산과 같은데 모양이 비슷한 자는 모두 거두어 묻기를 3백여 인에 이르렀다.” (<고려사> 106, 박항전)




1253년, 몽골군은 춘주성을 포위합니다. 겹겹으로 포위당한 성은 우물도 모두 말라버렸고, 양식 따위도 없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피로 목을 축이면서 버텼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절망에 빠져 처자식과 함께 불을 향해 뛰어들어 자살했고, 성안에 있던 쥐꼬리만한 숫자의 병력들은 어떻게든 포위를 풀어보려 성을 나서 돌파를 시도하다 지휘관 포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조리 섬멸 당했습니다. 그리고, 빈 성으로 몽골군이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수도로 떠나 있었던 춘주 출신 박항은 이 소식을 듣고, 춘주에 남았던 어머니가 걱정되어 부리나케 고향으로 달려왔습니다. 돌아온 박항의 눈에 보인 것은, 산처럼 쌓인 시체의 언덕 뿐. 상상 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당하며 훼손 당한 시신들은 도저히 형체의 구분이 어려웠기에 박항은 모양이 비슷한 자는 모조리 거두었고, 이 모두를 묻어서 그 중 안에 자신의 어머니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 300명 모두를 장사 지냈습니다.






문제는, 그런 몽골군을 피해 섬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의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길유는 백성들이 재물을 아껴 옮기기를 싫어할까 염려하여 공사(公私)의 재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일보다 먼저 최항이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주민들을 모두 몰아서 섬 안으로 들어가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워서 굶어 죽은 자가 열에 여덟ㆍ아홉은 되었다. ─ 고려사절요 1256년


○ 송길유가 경상주도 수로 방호별감이 되어 각 고을의 인물을 검찰(檢察)하여 섬으로 들여보내는데, 영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때려 죽이고, 혹은 긴 새.끼로 사람의 목을 잇달아 엮은 다음 별초를 시켜 양 끝을 잡고 끌어서 깊은 물 속에 던져 거의 죽게 되면 꺼내고 조금 깨어나면 다시 그와 같이 하였다. ─ 고려사절요 1258년


○ 고주(高州)ㆍ화주(和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의주(宜州)ㆍ문주(文州) 등 15주의 사람들이 저도(猪島)에 옮겨가 사는데,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이 저도는 성이 크고 사람이 적어서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드디어 15주의 사람을 옮기어 죽도(竹島)를 지키게 하였다. 섬이 좁고 우물과 샘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옮기려 하지 않으니, 집평이 강제로 몰아서 들여 보냈다. 사람들이 많이 도망하여 흩어져서, 옮긴 자는 10명 중에서 2, 3명뿐이었다. ─ 고려사절요 1258년





고려 조정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해서 고려 백성을 섬으로 소개하는 작전을 자주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런 작전은 '백성을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여 생명을 지키는' 인도주의적 의도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는 점입니다. 고려 조정은 백성들이 내지에서 몽골군에게 무저항으로 죽어나가면서 그들에게 약탈거리가 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따라서 섬으로 '몰아넣고' 거기서 살기 위해 발악을 하며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주는 '인간 방패' 역할을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면모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시 최씨 정권의 실력자 중 최항이 이 정책에 열심이었는데, 장군 송길유를 이런 작전에 주로 투입시켰습니다. 송길유는 백성들을 개나 돼지처럼 몰아서 섬으로 몰아갔는데, 지금보다 훨씬 배타적이던 그 시대에 고향에서 평생을 살며 가업을 이룬 백성들이 쉽게 떠나려고 할리 만무했습니다.





따라서 송길유는 그런 백성들이 평생을 거쳐 일궈놓은 전답과 집을 모조리 불태워버렸습니다. 나름대로 살림을 가진 일반 백성들마저도 한 순간 사이에(몽골군도 아닌 고려군의 손에 의해) '거지' 가 되어버렸고, 빈민이 된 상태로 섬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타지로 끌려온 백성들에게 고려 조정은 최소한의 지원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고, 그렇게 끌려온 백성들 중 10명 중에 7,8 명은 모조리 굻어 죽었습니다. 고려의 손에 의해!






만일 그렇게 섬에서 비참하게 굶어죽지 않기 위해 도망을 치려 한다면? 잡아서 매타작을 해서 때려죽였습니다. 혹은 반죽음이 되도록 두드려 패고는 목을 줄로 묶어, 개처럼 질질 끌고 다니고 물속에 집어넣고 물고문을 하였습니다.






도망칠 섬이나 산성도 없습니다. 여기는 몽골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도 없으니 괜찮겠지 하는 순간에, 어느새 몽골군이 전조도 없이 밀어닥쳐 나를 죽여서 기름으로 짜고 내 딸과 부인은 강간하고 죽인 후 회포를 따서 잡아먹고 있습니다. 나를 지켜줄 병사들도 없고, 어쩌다 마주친 고려군은 지켜주기는 커녕 겨울을 나기 위한 마지막 양식 마저 강제로 빼앗아 강화로 가져가고, 내 집과 전답을 모조리 불태워 알아서 끌고 간 뒤 알아서 하라고 천리 밖에 내던져 버립니다.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1231년. 몽골의 살리타이가 이끄는 병력이 충주성을 공격해왔습니다. 충주성의 지휘관인 우종주와 유홍익, 두 사람은 적군이 쳐들어오기직전까지 서로 "내 작전이 맞다." "아니다, 내 작전이 옳다." 며 입씨름만 하면서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정작 적이 오자 가장 먼저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의 주된 방어병력이었던, 양반들로 구성된 양반별초(兩班別抄) 역시 그 뒤를 따라 부리나케 달아나버립니다. 이제 성에 남은 것은, 백정(白丁) 이하의 하층민으로 구성된 잡류별초(雜類別抄) 뿐이었습니다.




돈 있는 그들은 도망쳐도 갈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 없는 잡류별초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지금 충주성에서 가진 이 쥐꼬리만한 터전이라도 없다면, 객사해서 죽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출신도 알 수 없는 인물인 지광수(池光守)와 승려 우본(牛本)의 지휘 아래 세계 최강의 몽골군과 '살아남기 위해' 맞서 싸웠고, 기적처럼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도망갔던 양반별초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도망갔던 이들은 남아서 싸운 이들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칭찬은 커녕, 전투의 혼란 중에 관청과 민가의 은기(銀器)가 몇개 사라지자, 잡료별초가 이를 훔쳐간 것이라며 오히려 역정을 내면서 잡류별초의 대장을 죽이려 했습니다. 도망친 이들이 남아서 싸운 이들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잡류별초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모든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내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안, 강화도에선 풍악소리만이 가득합니다.





瑀營私第(우영사제) : 우가 제 집을 짓는데,

皆役都房及四領軍(개역도방급사령군) : 도방(都房)과 사령군(四領軍)을 모두 부역시켜

船輸舊京材木(선수구경재목) : 배로 옛 서울 송도의 재목을 실어 오고,

又取松柏(우취송백) : 또 소나무ㆍ잣나무들을 실어다

多植家園(다식가원) : 집의 동산에 심은 것이 매우 많았다.

人多溺死(인다닉사) : 때문에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다.

其園林廣?(기원림광무) : 그 원림이 넓기가

無慮數十里(무려수십리) : 무려 수십 리였다.






내륙에선 수많은 가옥이 불타오르지만, 강화도에선 전국 각지에서 끌고 온 배들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원림이 있습니다.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崔怡(최이) : 최이가

於西山私伐氷藏之(어서산사벌빙장지) :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發民輸氷(발민수빙) :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니

民甚苦之(민심고지) :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又移安養山柏樹(우이안양산백수) : 또 안양산(安養山)의 잣나무를 옮기어

植家園(식가원) : 집의 후원에 심었다.

安養山(안양산) : 안양산은

去江都(거강도) : 강도(江都)에서

數日程(수일정) : 여러 날 걸리는 거리인데

使門客(사문객) : 문객인

將軍朴承賁等督之(장군박승분등독지) : 장군 박승분(朴承賁) 등으로 감독하게 하였다.

時方?寒(시방호한) : 때는 추위가 한창이어서,

役徒有凍死者(역도유동사자) : 일꾼들 가운데 얼어 죽는 자도 있어

沿路郡縣棄家登山(연로군현기가등산) : 연로에 있는 군현(郡縣)의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그

以避其擾(이피기요) : 소요를 피하였다.





섬에 갇힌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얼어죽고 굶어죽고 있는데, 강화도의 빙고에는 시원한 얼음이 가득하고, 마지막 한톨 남은 양식 마저 수탈 당하는데, 최씨네 집 후원에는 저 멀리서 가져온 잣나무가 위풍 당당하게 풍채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五月(오월) : 5월에

崔怡(최이) : 최이가

宴宗室(연종실) : 종실의

司空已上(사공이상) : 사공(司空) 이상과

及宰樞於其第(급재추어기제) : 재ㆍ추들을 위해 그 집에서 잔치하였다.

置彩帛山(치채백산) : 이 때 채색 비단으로 산을 만들어

張羅?(장라위) : 비단 장막을 두르고

中結?韆(중결추천) : 가운데 그네를 매었는데,

飾以文繡綵花(식이문수채화) : 문수(文繡)ㆍ채화(綵花)로 장식하였다.

以八面銀?貝鈿(이팔면은구패전) : 또 팔면(八面)을 은단추와 자개로 꾸민

四大盆(사대분) : 4개의 큰 분(盆)에

各盛氷峯(각성빙봉) : 각각 얼음 봉우리가 담겨 있고,

又四大樽(우사대준) : 또 4개의 큰 물통에

滿揷紅紫芍藥(만삽홍자작약) : 붉은 작약과 자줏빛 작약

十餘品(십여품) : 10여 품(品)을 가득히 꽂았는데,

氷花交映(빙화교영) : 빙화(氷花)가 서로 비치어

表裏燦爛(표리찬란) : 겉과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였다.

陳伎樂百?(진기악백희) : 기악과 온갖 잡희를 베풀고,

八坊廂工人(팔방상공인) : 팔방상(八坊廂)의 공인(工人)

一千三百五十餘人(일천삼백오십여인) : 1천 3백 50여 명이

皆盛飾(개성식) : 모두 호화롭게 단장하고

入庭奏樂(입정주악) : 뜰에 들어와 풍악을 연주하니,

絃歌館鼓(현가관고) : 거문고와 노래와 북과 피리의 소리들이

轟震天地(굉진천지) : 천지를 진동하였다.

八坊廂(팔방상) : 팔방상에게는

各給白銀三斤(각급백은삼근) : 각각 백은(白銀) 3근씩을 주고,

伶官(령관) : 영관(伶官)과

兩部伎女(량부기녀) : 양부(兩部)의 기녀(伎女)와

才人(재인) : 광대에게도

皆給金帛(개급금백) : 각각 금과 비단을 주니,

其費鉅萬(기비거만) : 그 비용이 거만(鉅萬)에 달하였다.






내륙에서는 내 딸과 내 마누라가 몽골군에게 강간 당하고 포를 떠지고 그 시체마저 기름이 쥐어짜지고 있는데, 강화도의 최씨 집의 축제에서는 미녀와 광대와 악공이 1300명이나 모여 중국 천자도 부럽지 않은 무릉도원의 잔치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http://simg.donga.com/ugc/MLBPARK/Board/15/00/60/73/1500607366561.jpg





구월 육일 오랑캐 군대가 강 건너에 와서 주둔한다는 말을 듣고 나라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시를 지어 해명하다 九月六日。聞虜兵來屯江外。國人不能無驚。以詩解之。



오랑캐 종족이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권 5 고율시 89수







몽골 오랑캐들이 아무리 새까맣게 몰려든들, 어찌 물을 건너 강화도로 올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마라. 저 놈들은 물을 건너지도 못한다. 뭐 나라가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무슨 소란이냐."





맞습니다. 몽골군 제깟놈들이 어떻게 물을 건너기야 하겠습니까? 



그저 물 하나를 사이로 두고, 한 쪽에는 1300명의 기인이 벌이는 축제의 환호 소리가, 



다른 한 쪽은 약탈과 강간, 고통과 비명의 신음소리만 펼쳐졌을 뿐이지.



출처 http://mlbpark.donga.com/mp/b.php?m=user&p=1&b=bullpen&id=201707210006517540&select=&query=&user=fktmxm9&site=donga.com&reply=&source=&sig=h4aRGY-AghRRKfX@hca9Sl-A4h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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