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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사유
게시물ID : history_137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iu1
추천 : 17
조회수 : 7535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4/01/23 21:46:25
얼마 전 대구에 강연을 갔을 때 한 청중께서 왜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는지 물어보셨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교과서나 일반 개설서에서도 거의 설명이 없어 잘 아는 사람이 드물다. 당시의 전후 사정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다소 긴 글이니 관심있는 분만 보세요)

1919년 9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한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대통령, 이동휘는 국무총리,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에 선출되었다. 이는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조각한 이른바 '한성정부'안에 의거한 것이었다. ('한성정부'안이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비라로 발표된 정부 명단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이승만은 집정관총재로 지명된 바 있...었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해임정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임시정부를 만들 때, 안창호의 제안에 따라 내각을 한성정부안에 따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주에서 집정관총재 대신 '대통령'이라는 용어를 이미 쓰고 있다고 하면서, 안창호에게 집정관총재가 아닌 대통령으로 해달라고 요구하여, 안창호가 이를 받아들여 대통령이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임정이 출범한 지 1년이 넘어도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임정이 있는 상해에 오지 않았다. 이에 임정의 차장급 소장파들은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는데, 이에 대해 안창호가 반대하여 불신임안은 일단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건의한 사실이 알려져 임정은 특히 북경파(신채호 등)에 의해 계속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의식하여 이승만은 1920년 12월 결국 상해에 왔다. 이승만이 상해에 온 뒤, 이동휘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문제로 인해 임정이 비난을 받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였다. 또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자는 안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거부하였다. 이동휘는 결국 1921년 1월 총리직을 사직하고 임정을 떠났다. 이승만도 그해 5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임정의 지도부가 이와 같이 흔들리고 제 역할을 못하자, 독립운동 조직과 지도체제를 다시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대회가 제창되어 1923년 1월 상해에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버렸다.

1923년 4월 국민대표대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임정에서는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대회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탄핵안은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는 못했다. 1924년 9월 임정의 임시의정원은 임시대통령이 유고(有故) 상태에 있다고 결정하고, 국무총리 이동녕에게 대통령직을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에 이승만은 크게 반발하여, 하와이 민단장 등에게 임시정부에 보내는 인구세 등 독립자금을 보내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임시의정원은 그해 12월 국무총리직을 물러난 박은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함으로써, 임정의 새로운 지도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은 임시의정원의 이러한 조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하였다. 이승만은 “한성정부 약법 제6조에 「본 약법은 정식 국회를 소집하야 헌법을 반포하기까지 이를 적용함」 이라 한 법문(法文)과 위반되는 일을 행하야 한성조직의 계통을 보유치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결코 준행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은 한성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은 여전히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임시의정원은 이와 같은 이승만의 주장은 임시의정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임시의정원은 결국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을 탄핵, 면직시키고,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당시 임시의정원이 구성한 탄핵심판위원회의 이승만 탄핵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이승만은 외교를 구실로 하여 직무지를 마음대로 떠나 있은 지 5년에, 바다 멀리 한쪽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서, 난국수습과 대업의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된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어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해하였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公決)을 부인하였스며 심지어 정부까지 부인한 바 사실이라. 생각컨대 정무를 총람하는 국가 총책임자로서 정부의 행정과 재무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하야 의정원의 선거를 받아 취임한 임시대통령이 자기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 하야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심지어 한성조직의 계통 운운함과 같음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라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 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의 진행을 기하기 불능하고 국법의 신성을 보존키 어려울 뿐더러 순국 제현을 바라보지 못할 바이오 살아있는 충용의 소망이 아니라. 고로 주문과 같이 심판함.(<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42호)

이승만은 탄핵 직후, 대통령선포문을 발표하여 자신은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가진 대통령임을 거듭 강조하고 임시대통령 면직 처분은 상해의 일부 인사들이 파괴를 시도한 위법의 망령된 태도라고 비난하였다.

결국 임시의정원의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 사유는 1) 임시대통령의 직무를 다하지 않은 점, 2) 임정의 주요 재원인 미주 동포의 인구세 수납을 차단한 점, 3)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인정치 않음으로써 임시의정원의 존재를 부정한 점, 4)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아닌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던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찬승 교수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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