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3&aid=000811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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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김호경 사회부장.
김호경
-본인이 군함도를 찾아간건 2010년 1월. 그때만해도 우리 국민들은 군함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제 강제 동원을 심층 조명하기 위해 조선인 혹사 일본 탄광 수십곳을 취재하면서, 그 중에서도 악명높던 군함도를 빠뜨릴 수 없었다.
-2010년 1월 19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 나야 인천에서 비행기로 편하게 왔지만, 70년전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으로 가는 길 부터가
-죽을 고생이었다.
-[영화 군함도]에서 황정민, 이정현, 소지섭들이 뱃멀미로 고생하는 조선인들과 일본으로 향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관부 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부산 320km구간을 오가며 [전시 노예선] 역할을 한 이 배의 관부라는 이름은 시모노세키,부산 글자를 하나씩 따서 만든거다.
[당시 피해자 기억]
1927년생. 1944년 5월 가라쓰탄광에 동원된 이흥섭 할아버지.
-배는 심하게 흔들리고, 토하는 사람이 생겼으나, 의사는 커녕 약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수건으로 구역질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생전처음 타보는 큰 배에, 흔들려보기도 처음이다.
-뱃속 모든 음식, 똥물까지 토해낸 것 같다. 뱃속이 칼로 에이는 듯 아프고 입에는 쓸개물이 고였다.
1927년생 1944년 2월 카미오카광산 동원된 김득중 할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득중이 살아돌아와야할텐데, 할텐데' 그라고 연락선 배를 타고 밤새 울었당게
-내가 다시 한국에 돌아올라나, 울 어매나 동상은 못보고 죽을라나 생각하고 많이 울었지.
김호경부장
-1939년. 조선인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이 발령된 후 수백만 조선인이 강제 노역에 내몰렸다.
-조선인들은 한반도내에서 노무수탈 당한 '국내 동원'은 물론, 일본 본토 전역, 러시아 사할린, 태양이 작열하는 머나먼 남양군도까지
-광범위한 국외 동원을 당했다. 1944년 가라쓰 탄광에 징용당한 이흥섭 할아버지의 증언에는 당시 조선인의 비명과 몸부림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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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청춘의 문턱에 올라선 열일곱 밖에 되지 않은 사내였다. 식민지에 태어났다는 숙명, 자신의 악운, 군국주의의 강권, 강제노동에 의한 자유의 박탈, 이런 압박들은 나의 몸뚱이를 짓이기고 있었다. 그것은 나 혼자 만에 대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몇 십만 징용인들이 겪고 있는 똑같은 운명이었다. 나는 개, 돼지만도 못한 이런 비인도적 처우에 대해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놈들아!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어쨌다고 이런 곳으로 끌고 와 고생을 시키느냐. 그리고 내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작정이냐. 나라를 위한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전쟁의 미치광이들이다.'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입술을 적셨다. 짜고 미지근한 액체를 소매를 끌어당겨 닦았다. 그러나 아무리 한탄하고 슬퍼해도 이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이흥섭, <아버지가 건넌 바다>, 광주,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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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부장
-나는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나가사키는 일본에겐 미국원폭투하 피해의 성지이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한민족의 유형지. 죽음의 사지였다.
-원폭투하 직전까지 무수한 조선인이 이 군수도시에 끌려와 죄수와 다름없는 혹독한 육체노동에 희생당했다.
다카자네 야스노리(나가사키 재일 조선인 인권 지킴이 모임 대표. 2017년 4월 77세 일기로 별세.)와 시바다 도시아키 사무국장이 현지 안내를 시작.
시바타 국장
-저기 보이는게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 본사요
-1945 패전직전까지 최소 4700의 조선인 노무자가 있었죠.
다카자네 대표
-나가사키에서 미쓰비시는 큰기업인 정도가 아니었소.
-경제 자체가 미쓰비시에 의존했지. 나가사키 3대 경제가 관광, 수산, 미쓰비시입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전쟁때 조선인을 가장 많이 징용한 기업이요.
-노동자 부족하면 일본정부에 요구하고... 일본,군,미쓰비시 삼위일체였소
-그럼에도 사실을 인정않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죠.
-(조선소 전경이 가까워지자)
-미쓰비시가 건조중인 해자대 소유 이지스 구축함이네요. 일본의 이지스함 30%를 미쓰비시에서 만듭니다.
김호경부장
-태평양 전쟁 때 미쓰비시는 세계최대급 전함 69000톤 무사시급 전함을 비롯.
-수많은 군사용 선박을 제작했고, 일본군 어뢰 8할과 각종 제강공장 탄광 등 일제 침략전쟁을 나가사키 곳곳에서 지원했다.
-나가사키는 전쟁 주동력인 미쓰비시의 군수요람이었던 것인데, 여기에 수만의 조선인이 투입됐다.
-1944년 당시. 조선인 노무자와 가족이 나가사키시 에만 2만명
-나가사키 현 전체는 7만 5천이나 있었다. 이중 조선소에만 4700명이 배치됐다.
-박근혜 정부때 활동이 중단됐던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제동원조사위에서 녹취한 피해자 구술 기록에 당시 상황이 생생히 전해진다.
김종술 1922년생. 경남 산청군 천평리
-7층높이에서 일하는데 저승이 어딘가했는데 여기였어
-죽는 사람이 날마다 몇명씩 나오거든
-전기 감전되 죽어, 떨어져 죽어 그게 한없이 나와
-날마다 죽는걸 예사로 보고 막 그래. 내가 죽을 고비 한 없이 넘겼지
박정태 1922년생. 경남 함안군 고사리
-7층 높이로 고꾸보깡(항모)만드는데 제일 작은게 2만톤이야.
-미쓰부시라카면 일본서 제1 재벌인데, 대동아 전쟁때 미쓰부시, 미쓰이, 스미모또 이 셋이 몬한다 카면 대동아 전쟁이고 나발이고 몬하는기다
-군수물품이 어데서 나오는데 세 회사가 좌우를 안합니까
김호경부장
-전시 바로 그자리에서 지금도 가동되는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를 지나 30분 더 배로 이동한 뒤
-다카시마에 개인 선박을 갈아타 군함도.
-하시마 로 향한다. 다카시마에서 5km 떨어진 이 섬은 징용자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곳이다.
-상상 초월의 열악한 환경과 잔인한 폭력이 고립된 이들을 사투의 나날로 내몰았으니까
-가까이갈수록 외관상으로도 극도의 황량함이 섬을 감돈다.
-보통 섬을 둘러싼 울창한 숲이 여긴 없다. 모래 깔린 해변조차 없다. 수목없는 불모의 섬.
-오직 시멘트로 싸바른 10미터의 방파제가 섬과 바다를 경계지어 인공 섬 분위기를 풍긴다.
-섬 전체가 탄광으로 개발된 곳. 바닷속 지하로 수백미터씩 파내려간 전형적인 해저 탄광. 하시마 섬
-미쓰비시 광업은 1890 하시마 탄광을 인수한다. 이곳의 최고급 탄은 제철과 선박용으로 쓰였다.
-일제가 전쟁에 미치면서 하시마 탄광은 채굴 증가 압박을 받고, 이는 이대로 조선인과 중국인 노무자를 몰아붙였다.
-이곳엔 조선인 500명 중국 포로 200명이 강제노역을 했다.
-하시마 탄광 생존자의 증언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박준구 1920년생. 전남 순천시 장안리
-도착하니 하시마에 있던 사람들이 [아이고 당신들도 고생혀. 여기 온지 3년 됐는데도 안보내줘. 여기 오면 못나가요] 이런다.
-그소리를 듣고 우린 아이고메 다 살았네 하고 포기를 했다.
-월급? 월급이 어디가 있나? 밤낮 일만하고 식사라고는 주먹밥 요만씩한놈을 두덩이준다.
-탄광에서 우리 조선이 그렇게 좋았구나 생각도 나고 말도 못했다.
-안죽고 살은게 천운이지.....
문갑진 1918년생. (1941 사할린 동원 -> 1944 군함도 전환배치)
-폭탄이 떨어지면 내빼야 되는데(미군 폭격) 섬이니까 어디 내뺍니까, 헤엄을 칩니까
-다카시마서도 그렇고 하시마도 그렇고 이제 죽었다 하고..
-어찌나 벼룩이 많던지 밤새 뜯기고, 그래가 영양실조 안걸리고 산게 명이 참 길다 생각합니다.
김호경부장
-징용자들은 매일 12시간씩 교대로 노동한다.
-비좁은 막장에선 서지도 못하고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 탄을 캔다.
-매일 할당량이 있기에 채우지 못하면 나가지도 못한다.
-노무감독들은 몽둥이를 들고 다닌다.
-1944년엔 기시노부스케(아베 총리 외조부) 당시 통상산업대신이 직접 시찰을 나오며 이렇게 말한다.
-[여긴 전쟁터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탄을 더 캐라!!](패전 후 A급 전범행)
-군함도는 동서로 160미터. 남북 480미터. 길이에 둘레 1.2KM 면적 6.3헥타르에 불과한 작은섬이다.
-그래도 탄광 개발되며 5300명이나 거주했다. 좁은터에 많은 인원을 상주시키려고 7-10층짜리 아파트가 1944년까지 10동 건설되고
-거긴 일본인 광부와 직원이 살았다.
-조선인은? 두동짜리 조악한 건물에 수용됐다. 건물창문엔 쇠창살이 있고, 부근엔 10미터 높이의 감시탑이 있었다.
시바타 사무국장
-저기 보이는 문이 갱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한번 가면 돌아올 수 없다해서 [지옥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김호경부장
-숙소환경은 열악했다.
-건물이라고 해도 창고보다 나쁘고, 바닥엔 썩어 불은 다다미가 깔렸고, 화장실과 목욕탕에선 쓰레기통 악취가 진동했다.
-주택이 아니라 돼지우리에 가까웠다.
양승우 1923년생. 강원도 인제군읍 가리산리 (1944.8 다마노조선소에 동원)
-한 방에 25명씩 잤어. 크기가 교실 한칸 만하더라?
-벼룩이 그리 많은건 처음 봤네. 막 뛰어올라와 아주.
-기숙사서 침대를 높게 하고 잤어 안그럼 못자. 튀어올라서 깨물어서. 땅에 시커멓게 있었어
-그런 데는 처음봤어
김호경부장
-열악한 환경중엔 목욕탕 증언도 많다. 영화에선 소지섭과 김민재의 격투 배경으로 등장해 열악함에 주목하기 어려운데,
-국내 문학사상 최초로 강제동원을 다룬 한수산 작가의 소설 [까마귀]에 잘 묘사됐다.
-나가사키, 하시마를 주 무대로 한 한수산의 작품은 치밀한 취재와 방대한 자료수집으로 03년에 5권짜리 대작으로 출간.
-지난해 창비에서 [군함도]로 개정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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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은 젖은 머리를 털며 '된장국' 속으로 텀벙 들어섰다. 먹는 된장국이 아니다. 욕탕의 대형 욕조 속으로 들어서는 것을 된장국에 들어간다고들 말했다. 이 물이 이게 욕탕 물이냐? 미소시루(된장국)지. 묵은 때를 불리거나 더운물에 피로를 빠지게 하기에는 너무 더럽고 걸쩍지근할 정도로 거무튀튀했다. 수많은 인부들이 채 탄가루가 가시지 않은 몸으로 욕조에 들어가는 것이 원인의 하나이기도 했지만, 워낙 물이 부족한 시설로써는 탕의 물을 자주 갈아댈 수가 없었다. 욕탕에 대한 불만은 그래서 인부들의 가장 큰 불만의 하나로 늘 팥죽처럼 끓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이 짓이라도 하는 거지, 어느 놈이 이 물에 씻고 싶어서 씻는다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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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부장
-탈출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많은 조선인이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시도를 했다.
-바다에 무모하게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고, 일본인에게 잡혀 맞아죽기도 했다.
서정우(2001년 별세)
-14살때 하시마에 징용됐다. 나는 매일 쇠약해졌다.
-일을 쉬면 감독이 사무소로 끌고가 마구 구타한다. 일하겠소 라고 말할때까지 죽도록 맞았다.
-제방위로 조선방향을 보며 몇번이나 바다에 들어가 죽으려 했는지 모른다.
-동료중에 자살한 사람, 탈출하다 죽은 사람이 40-50명은 됐다.
김호경부장
-다카자네 대표와 시바타 국장은 오랜 노력끝에 조선인 피폭문제, 나가사키 조선소와 다카시마 탄광
-하시마 탄광 강제징용 자료를 수집, 정리했는데 특히 1986년 하시마 한구석에 버려진 [매화장인허증]을 무더기로 입수
-거기서 사망한 조선인이 1925-45년까지 122명.
-강제동원기인 1938-45년 사망자가 56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매화장인증]은 사망자 발생시 관청이 발급하는 공문서다. 이 기록엔 사망자 신원, 일시, 원인, 매장화장 여부가 기록된다.
-조선인의 원인은... 병사.익사.발육뷸량.역병.변사.자살.추락 뇌진탕.두개골골절.매몰질식.두부타박상.복부내장파열 등으로 기록되어있다.
-조선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한눈에 보인다.
-일하다 맞아죽고, 도망가다 빠져죽고, 노무계에 맞아죽은 한맺힌 사연은 건조한 의학 용어속에 은폐되어있다.
-하시마는 1974 폐광 후 무인도가 되었다.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가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고,
-한국정부와 시민들이 과거사에 눈을 감는동안,
-참혹했던 강제동원의 진실은 망각의 늪속에 깊숙이 잠겨갔다.
현재. 김호경부장
-이 바닥까지 가라앉을 뻔한 역사의 진실이 대중 눈높이로 인양되는데 영화[군함도]가 큰역할을 한건 맞다.
-영화의 긍정적 덕목은 덧붙일 필요도 없으나, 극장 근처에 들렀다가 관람을 마치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류승완 감독의 팬임에도 그렇다.
-상업적 영화라도 완성도 잣대는 언제든 유효하다고 본다.
-그러나 군함도는 놀랍도록 전형적인 캐릭터. 신파가 강해 작위적 감동에 이입하기 곤혹스럽다.
-징용을 최초로 다룬 영화인데 섬세한 리얼리즘과 절제된 구성으로 냉정한 앵글이었다면 울림이 훨씬 크지 않았을까?
-거창한 스케일의 폭발 액션 블록버스터는 그 다음에 속편정도로 나왔으면 어땠을까...
-영화 마지막에서 조선인은 군함도를 집단 탈출하지만 해피엔딩이라 볼 수 없다.
-소희를 비롯한 조선인 일행은 나가사키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을 보며 어리둥절해한다.
-그럼 당시 나가사키는 어땠을까?
-1945.08.09일부터 12.31일까지 피폭 사망자는 나가사키 전체 7만 4천명.
-조선인은 1만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미군이 나가사키를 공격한건 군수시설 파괴가 목적.
-그 핵심 타깃은 미쓰비시 조선소였다.
배한섭 1926년생 경남 남해군 문의리
-10시에 원자탄이 터졌다.(실제론 11시 2분)
-아이고, 고마 나무뿌리고 뭐고 싹 뽑혀나가는데 우째? 딱 엎드렸어.
-막 흙날아오고 돌 날아와서 맞고 해도 뭐 꼼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 허리 흉터가 있거든요. 흉터가 여 많이 있어요.
-조선소 안에 병원이 있어서 40일 넘게 치료 받았어요 뼈가 상해서 꼼짝을 못했거든
김한수 1918년생 대전 용전동
-조선소에서 일하던 공장이 폭탄에서 3.2키로 떨어졌어
-폭발 직후 큰 철문에 깔렸지. 근데 피가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 옷이 뻘건거야
-살려고 살려고 기어나와서 병원으로 기어갔는데 병원은 송장 투성이라 사람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난리였어
-공장에 조선인이 2천명 있었는데, 산사람은 몇 없어 80%는 죽었을거야
-하나는 얼굴이 다탔는데, 뭘 먹일라면 입을 못벌려서 참대(왕대)를 잘라 입에 넣어서 거기에 밥을 쑤셔넣어줬어
-먹어야 살아나니깐 억지로 매길라고
-그니까 싫다는거야 그래서 [자식아 넌 먹어야 살아! 먹어야 살아서 같이 나가지!] 하니까 성을 내더니
-[너 이자식 나 낫기만 해봐라] 그러더라고
-그랬는데.. 결국은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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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요약
1.하시마 섬의 참상은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2.박근혜 정부는 일제강제징용조사를 중지시켰다.
3.최초로 강제징용을 다루는 영화는 역사를 중시해서 만들면 안되었을까
글쓰다가 박근혜 조사 중지 대목에서 분개하고
마지막 김한수씨 증언에서 눈물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