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베오베에 민간인학살관련글 해서 자료조사
게시물ID : history_137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Iamtalker
추천 : 6
조회수 : 3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1/24 12:40:46
[약간김]어릴 적엔 몰랐는데 커서 알게된 풍경에 대해
http://todayhumor.com/?bestofbest_145664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학살사건
------------------------------------------------------------
문경양민 학살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B%AC%B8%EA%B2%BD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
문경 양민학살 사건(聞慶良民虐殺事件)은 1949년 12월 24일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주민들을 살해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을 말한다 당시 학살로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을 포함해 모두 86명이 목숨을 잃었다이 사건은 이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공비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하지만 참여정부 들어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과거사 청산에 의해 2008년 여름 사건 진상과 가해 부대 책임자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B%85%B8%EA%B7%BC%EB%A6%AC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老斤里良民虐殺事件, 영어: No Gun Ri Massacre)은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한 전쟁 범죄이다.

거창_양민_학살_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A%B1%B0%EC%B0%BD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
거창 양민 학살 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은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을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6·25 전쟁 후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 소탕을 위하여 주둔하였던 대한민국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연대장 오익경(吳益慶) 대령, 제3대대 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의 작전에 의하여 감행된 민간인 학살 범죄로, 동년 3월 29일 동군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보고로 공개되었다. 동년 2월 11일 동대대장 직접 지휘로 부락민을 신원초등학교에 집합하게 한 후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500여명을(한동석 소령이 공비들과 내통한 자 187명 학살했다고 보고했다.) 박산(朴山)에서 총살하였다

산청·함양_양민_학살_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C%82%B0%EC%B2%AD%C2%B7%ED%95%A8%EC%96%91_%EC%96%91%EB%AF%BC_%ED%95%99%EC%82%B4_%EC%82%AC%EA%B1%B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07696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山清・咸陽良民虐殺事件)은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 주민에게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산청·함양 양민학살사건은 51년 2월 8일 공비토벌에 나선 국군 제11사단(화랑부대·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에 의해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일대 12개 마을 주민 705명이 통비분자의 누명을 쓰고 집단학살당한 사건이다. 또한 거창양민학살은 산청·함양에서 학살을 자행한 이들 군인이 사흘 후인 11일 거창군 신원면에서 같은 명목으로 719명을 산골짜기에 끌고가 총살한 6·25양민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보도연맹_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B%B3%B4%EB%8F%84%EC%97%B0%EB%A7%B9_%EC%82%AC%EA%B1%B4
보도연맹 사건(保導聯盟事件)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 극우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확인된 희생자만 4934명에 달하고[1], 증언들에 따르면 최대 20만 명[2][3][4] 남짓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5]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이 사건에는 미군도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에 개입했다.[6]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철저히 은폐했고 금기시해 보도연맹이라는 존재가 잊혀져 왔지만, 1990년대 말에 전국 각지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보도연맹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임이 확인됐다.

국민방위군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B%AF%BC%EB%B0%A9%EC%9C%84%EA%B5%B0%EC%82%AC%EA%B1%B4
국민방위군 사건(國民防衛軍 事件)은 한국전쟁중 1951년 1월 1·4 후퇴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을 말한다.

여수·순천_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C%97%AC%EC%88%98%C2%B7%EC%88%9C%EC%B2%9C_%EC%82%AC%EA%B1%B4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줄여서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 우익인사 16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정부 진압군경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제주_4·3_사건
http://ko.wikipedia.org/wiki/%EC%A0%9C%EC%A3%BC_4%C2%B73_%EC%82%AC%EA%B1%B4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규정하고있다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16]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17]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및 기타)에 달한다. (진압작전 중 사망한 군인은 180여명, 사망 경찰관은 140여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18]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극우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
전쟁시 인간이란 얼마나 쉽게 광기에 물들수 있으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평화는 그야말로 얼마나 쉽게 깨질수 있는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또한 권력이란게 얼마나 쉽게 인간을 파멸시킬수 있는지도.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