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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돈벌고 못버는 문제가 아닙니다. 병원이 망한다고요.
게시물ID : medical_194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존그레이
추천 : 20
조회수 : 2545회
댓글수 : 186개
등록시간 : 2017/08/14 1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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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제 소개부터 하지요.
저는 국가에서 운영하는(정확하게는, 나라에서 예산을 타서 적자를 보전하는)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있는 현직 의사입니다. 중증 척추질환과 척추 외상에 대한 수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즉시 혹은 빠른 시일 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마비가 생기는 등의 큰 문제가 있는 분들이 주로 저에게 오십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로컬(흔히 말하는 개인병원)에서 한다면, 제가 현재 받는 급여의 3배에서 5배까지는 너끈히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지금의 병원에 있습니다.

또한 저는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이며 흔히 말하는 '문빠'임을 밝힙니다. 문재인 정부의 대다수 정책과 적폐 청산 의지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지지를 보냅니다. 개인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님의 팬(정치인에게 팬심을 말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차치하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래 글의 논리나 근거에 문제를 제기하시는 것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저의 개인적인 성향 내지는 지위를 이유로 공격하시려 한다면 핀트가 좀 어긋낫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이 정부의 의료 정책은, 실수입니다. 네.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높이고, 의료비로 인해 파탄나는 가계를 줄이자는 대의에 누군들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현재의 정책을 그대로 강행하지는 않을겁니다. 그렇지만 대폭 수정하지 않는다면, 많은 중소병원들의 도산이 눈에 선하여 키보드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자극적으로 잡았고요.

이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병원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2. 의사들은 그래도 돈을 잘 벌지 않느냐.
맞습니다. 돈 잘 벌지요. 저만해도 나라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탓에 제 동기들의 절반도 채 못 되는 보수를 받고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나이 또래의 직장인 평균에 비해서는 훨씬 많은 급여를 받습니다.(이 자리까지 제가 올라오는데 걸린 시간과 비용같은건 생각 안하고 이야기 하도록 하지요.) 저는 제 급여에 별 불만이 없습니다. 막말로 지금보다 좀 줄어든다고 해도, 큰 불만은 없지 싶습니다.
대다수의 의사들은 저보다 더 법니다. 그러니 돈을 잘 버는게 맞지요. 개인병원을 운영하시는 분들은 제 30배 이상도 버시는 분이 있을겁니다. 그런 분들이 벌어갈 수 있는 부분을 날려버리자는 것도,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까짓 의사들을 지금보다 좀 궁핍하게 만들어본들 뭐 어떻겠습니까. 그런다고 밥을 굷을 정도가 될 리도 없을텐데.

3. 하지만 단순히 의사들이 돈을 적게 가져가게 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저 한사람이 내는 처방과 수술이 이 병원에서 차지하는 매출이 대략 3억이 넘어요. 그중에서 제 인건비는 3%도 안됩니다. 다른 의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한 사람이 내는 매출에서 10% 이상 가져가는 사람 잘 없을겁니다.(성형, 피부과가 아니고서는 그만큼 수익이 날 수가 없습니다.) 저 매출에는 간호사들, 방사선 기사들, 영상의학과 의사의 판독료, 약품 조제료, 마취료같은 수많은 항목들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모든 비급여를 급여화 한다는건, 저 매출의 수익률을 확 떨어뜨리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것도 모든 과입니다. 그러면, 병원은 운영이 될까요...?

4. 수가를 올려주면 되지 않겠냐? 네. 맞습니다. 수가를 올려주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적용해 왔던 수가의 원가보전률이 대략 75%정도였다는 겁니다. 즉, 100원짜리를 75원 주고 팔았다는 이야깁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100원짜리를 130원 받아서 대충 맞춰왔던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의 방향으로는 130원 받던 100원짜리를 75원 받던 것과 비슷하게 받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수가를 정말 100% 맞춰주지 않으면, 부대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병원 말고는 모조리 망하라는 이야기가 되는겁니다. 아주 간단한 산수지요.

5. 물론 의료라는 복잡다단한 시스템이 이렇게까지 단순할 리는 없으니, 현실적으로는 병원이 망하기까지 여러 중간 단계가 발생할겁니다. 의사들을 쥐어짜겠지요. 의사와 간호사, 방사선사, 행정직원들의 월급을 쥐어 짤것이고, 할 때 마다 적자폭이 큰 진료를 줄이라고 요구하던지, 최대한 싼 재료들을 사용하라던지 하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아래 글들에서 소아용 고어텍스 인조혈관 이야기 나왔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될겁니다.

5-1. 참,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는 모든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최저시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십니까? 당직 이야기인데요, 당직비가 최저시급 근처에도 못간다는것은 의료계에서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전공의 특별법이라는 것이 시행되어서 전공의들에게 주 88시간 이상의 근무를 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주 48시간 아닙니다. 88시간입니다.) 저도 다다음달 부터는 당직을 서게 되는데요, 계산해보니 저도 당직설 때 최저시급에 한참 못 미치는 돈을 받게 되더군요. 제 원래 시급이 아니라, 법정 최저시급도 못받는다고요. 정말입니다. 거짓말 아니예요. ^^
개인병원 의사들이 페라리를 굴리는 걸 보면서(정말입니다. 아마 성형외과일거예요.) 박탈감을 느끼는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는데요, 법정 최저시급은 좀 받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이 있습니다.

6. 이 문제가 의사들의 급여 내지는 도덕성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 참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대체 왜 '병원'이 망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걸까요?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들은 무사할겁니다. 지방의 거점 대학병원들도 무사하겠죠. 그 병원 의사들과 간호사들, 모든 직원들이 쥐어짜이기는 할 것이고, 저수가의 피해를 모든 환자들이 보기는 하겠지만, 그런 병원들이 망하기야 하겠습니까. 문제는 지방의 중소 병원들부터 차곡차곡 쓰러질거란 겁니다. 대학병원이 아니면 중한 환자를 보는 것을 지금보다 더 기피하는 의사들이 많아질것이고, 진료비가 조금만 커지는 상황이 되면, 더 큰 병원 가라고 환자를 돌려보내게 될겁니다. 개인병원들이야 원장들 개개인의 도덕성으로 어떻게든 양질의 진료를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물론 더 막장이 될 수도 있지만), 저같은 월급쟁이 의사들은 어쩌겠습니까? 병원 행정부에서 의사들을 닥달할겁니다. 적자를 만드는 진료는 하지말라고. 정 해야 되겠으면 최소한으로 하라고. 수술같은거 가급적 하지 말고, 약만 드리고 대학병원으로 보내라고. 그렇게 쥐어 짜도 안되는 병원은 망할것이고요.

7. 그러니 피해는, 바로 평범한 시민들이 보는겁니다. 지금의 수가체계를 대대적으로 손본다고 한들, 한번에 25%가 오르겠습니까? 그만한 재정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정부에서 내놓은 재원 조달 정책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이 문제가 문재인 케어의 핵심입니다.
병원들이 망할 것이고(혹은 망하기 직전에 내몰릴 것이고) 피해는 환자분들이 본다는것.
저는 막말로, 지금보다 급여가 더 줄어도 관계없습니다. 일을 보고 병원을 선택한거지, 돈 보고 선택한것은 애초에 아니었으니까요. 다른 의사들도 저처럼 쥐어짜여도,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지만 병원이 망해서, 의사들은 일자리가 없어지고, 환자들은 치료받을 기회가 아예 사라진다는데, 이건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사와 환자는 사실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모두가 이건 아니라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점심시간에 딴짓을 너무 오래 했네요. 환자 보러 가야겠습니다.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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