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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파락호의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86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법고창신
추천 : 15
조회수 : 1241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7/08/15 14: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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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동점의 19세기 조선의 남쪽 영남 안동에 서산 김흥락(1827~1899)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조선중기, 임진왜란 당시 유명한 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의 11대 종손으로 학문적 연원으로는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을 이어받은 직전제자였으며, 사미헌 장복추, 한주 이진상과 더불어 영남의 3학사라고 일컫어졌던 대학자였다.
그는 참봉,지평,우부승지에 천거되기도 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을 학문에만 전념한 선비였다.
그의 문하생 중에는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기암 이중업, 백하 김대락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특히 독립운동에 참여한 제자들이 많았었다.
석주 이상룡(1858~1932), 일송 김동삼(1878~1937), 백하 김대락(1845~1914) 같은 이는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삼한갑족 우당 이회영(1867~1932)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의 성지이자 요람이라고 할수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였다.
석주 이상룡은 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이승만 탄핵후,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어쨌든,서산이 살던 당시의 조선은 근대화의 물결이 태동되던 시기였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의 집적거림을 받던 시대였다.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한 직후인 을미년에는  왕비 민씨가 일본의 양아치들에게 살해당하자 조선의 선비와 백성들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김흥락 역시 심정적으로 의병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이미 연로하여서 대신 그의 사촌 동생 김회락이 의병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회락은 일본군과 싸워 패하여 사촌형 김흥락의 집, 즉 학봉종가로 숨어들었는데
일본군들이 학봉종가에 침입해 김회락을 잡아가려 하였다.
일본군들은 김회락을 잡아가면서 김흥락과 그의 동생 김승락 등 10여명의 의성김씨 종가 어른들을 마당에 무릎 꿇리고 집안의 패물들을 노략질 해 갔으며
종가의 살림살이를 격파해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의성김씨 종가의 가장 큰 어른이자 안동지역사회와 조선유림의 큰어른인 서산 김흥락이 듣도보도못한 섬나라 호종자[胡種子]들에게 욕을 당할때
당시 10살 소년이던 서산의 손자가 그 광경을 묵묵히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 손자의 이름은 김용환(김응걸의 아들. 김응모의 양자)이다.
김용환은 요즘말로 엄친아중의 엄친아였다.
할아버지의 학덕과 공로 덕에 나라에 인정받아 어린나이에 혜릉참봉 직을 제수 받았다.
참봉은 요즘으로 치면 공공건물, 문화재시설의 경비를 담당하는 관리원, 즉 경비아저씨라고 할수 있는데
김용환은 할아버지 서산의 뒤를 이어 의성김씨 종가의 13대 종손이 되었다.
그가 24살이 되던 1910년 경술년에는 나라가 일본에게 강제 합병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0살때인 1896년 할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욕을 당하던 그 뼈아픈 광경을 보고 자란 김용환은 암울한 시기에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김용환은 1911년 김상태 의병진에 참가하였고 만주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전해주다 발각되어 체포를 당해 고초를 치룬적도 있었다.
그는 석방 후 조선 독립운동이 가망없다고 낙담했는지 주구장창 노름을 즐겼다.
허구헌날 주색잡기를 좇았으며 큰 판을 벌여 노름을 하느라 대대로 종가에 내려오던 전답18만평(현재 시가 약 200억)을 다 팔아먹어버렸다.
심지어 본인이 살던 종가집까지 노름하다가 날려버려 의성김씨 지손들이 눈물을 머금고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되사온 적도 있다.
그러나 김용환은 멈추지 않고 노름을 하였다.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인생은 한방이라며 노름꾼들과 사이좋게 노름을 하였다.
어떤 때에는 돈을 크게 잃었을때는 '새벽 몽둥이'라고 크게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면 노름이 벌어지던 장소의 주변에 있던 김용환의 부하 20여명이 동둥을 들고 노름판돈을 덮쳐서 쓸어서 자루에 담아오는 수법을 쓰기도 했다.
김용환의 먼 일가들과 그 지역주민들은 김용환을 '아이고..학봉선생,서산김흥락 후손이 왜 저모양인가? 집안 다 말아먹는 종손이다. 라고 하면서
손가락질을 해대며 욕을 하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역사에 다시 없을 파락호라고도 평가했다.
김용환의 딸 김후옹이 장성하여 서씨문중에 시집갈때 시댁에서 김용환의 집으로 돈을 맡겨 혼수품을 사오라 하였는데
김용환은 이마저도 노름에 사용하고는 김후옹의 친할머니가 쓰던 헌 오동나무 장롱을 가져가게 했다.
그리고 1946년 김용환은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품중에 만주 독립군으로 군자금을 보낸 증서들이 발견되었고 그제서야 그가 노름꾼으로 위장해 그 많은 돈들을
만주독립군에게 조달해준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조차 모르던 사실이었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 항일광복운동에 참여하다가 낙담하고는 노름으로 한평생을 산 양반이라고만 알았는데..
그 많고 많은 종가의 재산을 탈탈 털어 만주의 광복운동가들에게 모두 보내주었다니!!!!!
특히 혼수금까지 아버지에게 뺏겨 아버지를 원망하였던 딸 김후옹으로서는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숨이 차는 상황이었다.
그는 훗날 아버지 김용환 선생이 1995년 건국훈장을 추서받게되자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존경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여 남겼다.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데

 
 
덧붙이는 글: 김용환은 조부 김흥락의 제자 기산 이중업의 딸과 결혼했다.
이중업은 동부승지를 지낸 향산 이만도(1842~1910:진성이씨로 퇴계이황의 10대손.)의 아들인데
 향산은 경술국치후 24일간의 단식끝에 자정순국한 조선의 자헌대부이자 선비였다.
이중업의 부인이자 김용환의  장모가 되는 김락 여사는 김용환과 같은 의성김씨 집안 분으로 학봉의 형 구봉 김수일의 후손이며 백하 김대락의
친누이이다. 
김락 여사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왜경에게 잡혀 고문을 당해 두눈까지 잃었으나 남편과 자식을 광복운동의 대열에 뛰어들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의 오빠 김대락은 류인식, 김동삼,하중환 등과 함께 안동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한 인물로 경술국치후 66세의 노구로 일가족들을 이끌고 매부인 석주이상룡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들은 그토록 나라의 광복을 위해 온 집안 사람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처절히 희생하였다.
작금의 사회지도층들의 행태를 보자면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하여 해먹고 또 해먹지만
이 분들은 학연에다 지연, 혈연,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해 모두 목숨과 전재산을 바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했다.
이러한 예는 동서고금에 전무후무한 것으로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진정한 책무를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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