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야. 우리 둘 다 무명이던 시절 기억나?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한 독자였던 그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말이야. 아직도 그때 쓴 원고를 보면 그 시절의 애틋함이 떠올라서 서글퍼져. 그 모든 감정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거 같아서. 넌 그 시절이 지긋지긋했다고 늘 말했지만, 난 가끔은 그때가 그리웠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서가 아니라, 서로 말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토막글 하나에 울고 웃던 그 시절이 난 정말 그리웠던 거야.
선화야. 내가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노라 선언한 그날 기억나니? 꿈을 좇기엔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며 네 품 안에서 울던 그날 말이야. 너와는 달리 내겐 그 모든 좌절을 겪어낼 힘이 없었던 거야. 그래도 난 괜찮다고 생각했어. 여전히 너의 글을 보면 즐거웠고, 그 꿈틀거리는 욕망은 가라앉았거든. 그 갈망이 단지 하룻밤의 울음으로 달래질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먼 훗날의 일이었지.
선화야. 나의 글이 어떤 살인사건과 연관되어 화제가 되었을 때 너는 분개했지. 하지만 난 그게 마냥 속상하지만은 않았어. 아니, 오히려 기뻤지. 비록 뉴스에선 폭력 소설이니 모방범죄니 하고 떠들어대도, 그래도 그렇게라도 입에 오르내리고 한 번이라도 내 글이 더 읽히는 게 좋았거든. 관심이 잦아들 때 나는 결심을 하나 했어. 다시 무명으로 돌아가기 싫었으니까. 그 꿈틀거리는 갈망이 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기분이었으니까.
선화야. 너는 나의 글이 날 것 그대로라 좋다고 했지. 금기 같은 거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그 모든 폭력성과 욕망, 추악함을 모두 끄집어내 준다고. 그걸 현실에서 재현하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어. 그건, 살아있는 육체의 힘줄을 모조리 꺼내 잘라버리고,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흩뿌려 짓밟고, 눈알을 끄집어내 터트려버리고, 그 조각난 모든 시체를 가지고 노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역겨운 일이었어. 하지만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났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지.
선화야. 시체로 어질러진 방안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어. 운 좋게 내가 수사망을 뚫고 잡히지 않는다 해도 나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다시 관심이 잦아들면 나는 또다시 나의 글을 재현할 거고 언젠가는 잡히게 될 거야. 그토록 재미없는 결말이라니. 난 대신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어. 바로 소설을 쓰는 것.
선화야. 우리를 주인공으로 한 글을 썼어. 셰익스피어는 오래전 죽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영생을 살아가. 비록 우리의 육신은 지금 죽어 썩어가겠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창작물이 되어 영생을 살아가는 거야. 그러니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말아. 사랑해 선화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