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2)
[국정브리핑 2004-08-07 09:43]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소위 압도적인 군함과 화포를 장착하였기 때문에 첫 번째와 세 번째 전술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 왜수군을 격파했다.
그런데 조선의 함선이 왜선에 비해 견고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조선 수군이 세 번째 전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는 것을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 번째 전술을 사용하려면 적선을 먼거리에서도 격파시킬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강력한 화약무기가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왜군이 조총 등 당시 최첨단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왜수군이 조선 수군보다 더 우수한 화포 등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쟁이 일어나느냐 안 일어나느냐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쟁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철저한 침공준비를 한 후 조선을 공격한 왜군의 전력이 월등히 우세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소형무기에 있어서는 왜군이 앞섰지만 대형무기 즉 대포와 같은 대형무기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에도 조선이 월등히 앞서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형무기들은 임진왜란 때 갑자기 개발된 것이 아니라는데 더욱 놀랄만한 일이다.
이들 최첨단 무기들은 임진왜란보다 무려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에 이미 한국에서는 세계를 놀라게 할만한 대형무기들이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결실은 사실상 고려 말 고려를 최강의 군사 강국으로 만든 최무선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무선의 동판화. 최무선은 2003년 1월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설립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14인의 과학기술자 중 한 명으로 헌정됐다.
고려말 최무선이 등장하여 화약과 화포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고려 말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왜구를 격파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시대에 왜구(倭寇)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종 10년(1223)이다.
고려 말의 왜구는 침입횟수가 많은 것은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컸다. 많을 때는 200∼500척까지 떼지어 몰려들어 특정 해안지대는 물론 공주, 부여에도 왜구가 분산 침입했고 강화도 일대까지 침입하여 약탈했다. 한때 조정에서 천도론(遷都論)이 나올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했다.
왜구가 이와 같이 극성부린 이유는 일본이 남 북조로 갈려 60여 년간(1322∼1392) 내전에 휘말리면서 중앙정부의 위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자 일본 서부의 호족들이 곡식과 기타 필수품을 획득하기 위해 해적들을 조직하여 고려를 조직적으로 침입했기 때문이다.
왜구가 창궐한 원인 중에 하나는 고려 전략에도 기인한다. 고려는 왜구가 침입하면 일단 그들을 육지에 상륙시켜 놓고 요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육전(陸戰) 위주의 전술을 견지했다. 그러나 왜구의 장기가 백병전을 위주로 한 육전(陸戰)이므로 고려의 피해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육전에서 수전(水戰)으로 전략을 바꾸어 왜구들을 육지에 상륙시키지 않고 바다 위에서 격퇴하는 해전위주의 전술을 채택했다.
이때 왜구의 격퇴를 사실상 책임을 진 사람은 최무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무선은 고려 말엽인 충숙왕 12년(1325) 경북 영주(현재의 영천)에서 광흥창사 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무선이 무관으로 임관했을 때 고려 조정은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육전 위주에서 해전 위주의 전술로 바꾸었으므로 대대적으로 후속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박을 건조하고 강력한 수군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군함만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억제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내습하는 왜구의 숫자가 워낙 많은데다가 기존 수군의 전략 즉 충파나 육박전으로는 고려수군의 피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함선 내에 화포를 장착하여 바다에서 왜구의 배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으면서 격파하는 방법이다. 소위 세 번째 전술이다.
군산시 하구둑 남쪽 금강호 시민공원에 세워진 진포대첩비. 최무선의 화포를 장착한 고려 함선 80척은 우왕 6년(1380),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 2만여명이 타고 온 500여척의 배를 진포 앞바다(현 군산)에서 모조리 격파했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지만 세 번째 전술을 사용하려면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형 화약무기에 필요한 대용량의 화약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화약 무기 개발 상황을 보자. 학자들은 1232년 금나라에서 원시적인 폭탄인 진천뢰와 로켓의 원리에 의해 분사추진이 되는 불화살 비화창(飛火槍)이 등장하고 14세기초 원나라가 둥그런 탄환 혹은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유통식(有筒式) 화기인 화포(또는 총통)가 개발되었다고 추정한다. 이같은 화기류는 원군의 유럽 원정으로 아랍과 유럽 세계에, 그리고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고려에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은 화약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화약 제조법을 군사기밀인 극비사항으로 엄격히 통제했으므로 좀처럼 다른 나라에서 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1373년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왜구의 습격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있다. 근래에 왜구의 형세가 더욱 치열하니 바다에서 적을 추격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근절시키기 위해 배를 만들려고 한다. 그 배 위에서 사용할 기계, 화약, 유황, 염초 등의 물건을 조달할 방법이 없으니 명나라에서 분배해 달라’고 요청했다.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개국한 명나라도 왜구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으므로 왜구를 격퇴하겠다는 고려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지만 고려가 요청한 양을 모두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명나라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고려에서 요청한 양에서 턱도 없는 염초 50만 근과 유황 10만 근 만을 원조했다.
명나라로부터 충분한 양의 화약을 공급받지 못하자 사실상 함선에 화약무기를 장착하여 골머리 아픈 왜구를 격퇴하려는 계획은 큰 난관에 봉착한 셈이었다. 고려 조정은 결국 국내에서 화약 만드는 방법이 최상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최무선에게 그 임무를 맡긴 것이다.
최무선은 우선 과거에 화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염초에 반묘(유황)와 버드나무 숯(분탄)을 섞어 화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반묘와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를 만드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약을 만들기 위해 부엌 아궁이의 재나 마루 밑의 흙을 물에 타서 끓이는 등 수 없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초보적으로 염초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화약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보다 간편한 염초 제조법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염초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을 수소문했다. 우여곡절 끝에 염초 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 이원(李元)을 만났고 결국 이원으로부터 염초자취법이란 화약제조법을 알아냈다. 이것은 오늘날 흑색 화약(유연 화약)과 같은 것으로 질산칼륨 75%, 유황 10%, 목탄 15%를 화합하여 만든 화약을 말한다.
흑색 화약은 염초를 산화제로, 목탄을 가연제로 하고 여기에 점화촉진제인 유황으로 이를 압축 성형하는 것이다. 흑색 화약은 약 300℃로 가열하면 발화하면서 세차게 탄다. 대기 중에서 흑색 화약의 밀도가 1.5 정도일 때 발화 속도는 1∼3m/초로 매우 빠르지만 연소 속도는 10mm/초로 매우 작다. 그러나 압력이 높아지면 연소 속도는 증가한다. 흑색 화약은 예로부터 폭약 또는 추진약으로 널리 이용되었고 현재도 연소성이 좋고 긴 화염을 일으키므로 고체 추진체의 점화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 화통 등을 만들어 실험해본 후 자신감을 얻자,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건의했다. 1377년 고려는 드디어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임명했으며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을 조직했다.
국방군사연구소 발행 『한국무기 발달사』에 의하면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17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했다. 그가 개발한 무기는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화전(火箭), 주화(走火), 유화(流火), 촉천화(觸天火), 천산(穿山), 오룡전(五龍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질려포( 藜砲), 철탄자(鐵彈子) 등이다.
물론 이들 모두가 화통도감이 설치된 후에 최무선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다. 화통도감이 설치되기 전인 공민왕 5년(1356), 왕이 서북면 방어 병력의 열병식을 참관했는데 이때 총통에서 발사한 화살이 남강에서 순천사 남쪽까지 날라 갔다는 기록을 보면 고려는 이미 총통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총통 발사에 사용한 화약은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최무선은 이 직접 화약 만드는 법을 습득하자 기존에 개발되어 있던 화약무기를 개량하고 새로운 무기들을 독창적으로 개발했다는 것이 옳은 이야기로 보인다.
〈명나라 화포를 압도한 조선 화포〉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대장군, 이장군, 화포, 화통 등은 발사기 종류이고 화전,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은 피발사체 혹은 자체 폭발력을 지닌 로켓화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화포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대장군포는 쇠탄두가 달린 나무탄인 ‘차대전’과 ‘중전’을 평사로 쏘는 포인데, 조선시대에는 이것을 ‘장군화통’이라고 했다. 대장군포는 한쪽이 막힌 둥근 통 모양의 포신만으로 이루어졌는데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포의 내부 직경은 96.9밀리미터, 길이는 859.5mm, 중량이 62.8kg이다. 화약통에는 흑색 화약이 채워졌다 폭발하기 때문에 이 폭발력을 견딜수 있도록 몸통 벽 두께를 위치에 따라 다르게 하였는데 평균 34∼46mm이다. 외탄도 계산 결과 발사각이 45도일 때 탄의 비행거리는 1060m, 최대 고도는 270m이다.
이곳에서 발사하는 대전은 2.7kg의 쇠탄두가 앞에 달려 있고 그 가운데로부터 뒤쪽에 십자형으로 쇠날개가 4개 달려 있으며 쇠탄두, 날개 그리고 꼬리 부분에 쇠띠가 감겨 있었다. 형태가 로켓을 방불케 하는 대전은 목표를 한번에 파괴하는 위력을 가졌다. 대장군포는 주로 적의 성루, 성문, 성벽, 배 등을 파괴하는데 사용됐다. 같은 형태의 ‘이장군포’는 다소 규모가 작은데 640m의 비행거리와 120m/초의 속도를 가졌다. 또 그보다 작은 삼장군포와 둥근 돌탄을 재었다가 곡사로 발사하며 운반에 편리하게 조립식으로 만든 육화석포(六花石砲)도 있었다. 육석화포란 동으로 만들었는데 격목통과 포신의 길이가 330.6mm로 짧기 때문에 장약된 화약이 발사 후 포신 안에서 다 타지 못하고 일부 포신 밖으로 나가면서 타는데 그 불꽃이 여섯 가지 색깔을 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총의 무게는 121.8kg으로 이동할 때는 두 부분으로 분리하여 따로따로 운반하여 필요한 곳에서 간단히 조립하여 포격을 가할 수 있는 등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지리적 조건에서는 매우 위력적인 무기였다. 탄도 계산 결과에 의하면 탄의 속도는 최대 약 42m/초이며 45도 초기 경사각으로 발사할 때 최대 비행거리는 약 175m, 최대 비행 고도는 48m이다. 『고려사』에는 이 포로 수백 근의 돌탄을 쏘았다고 적혀 있다.
최무선이 사망한 지 12년이 지난 1407년,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기감(軍器監) 화약장(火藥匠) 33명에게 각각 쌀 1석씩을 내려 주었다. 제야(除夜)에 군기감에서 화산대(火山臺)를 대궐 가운데 베풀었는데, 화약의 맹렬하기가 전날에 배나 되어, 왜사(倭使)가 와서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제색(諸色) 장인(匠人)에게도 추포 50필을 내려 주었다.’
이 기록을 보면 군기감에 설치한 화산대에서 화약무기를 발사하는 실험을 했는데 화약의 위력이 기존 것의 2배에 이르고 거기에 참가했던 일본 사신들을 놀라게 하여, 화약장 33명에게 쌀 한 섬씩을 시상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정부에서는 화약과 이를 사용한 무기 제조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화포는 명나라 화포와의 대비 실험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명종 원년 11월 8일, 군기시 제조가 명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 중국 사람에게서 화포의 법을 전습하여 모화관(慕華館)에서 쏘아보았으나 별로 맹렬한 힘이 없어 40보 밖에 표적을 세우고 쏘았는데도 모두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포는 한 발이 방패에 맞았는데 도로 튕기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중국에서는 삼(杉)나무의 재를 쓰기 때문에 빠르고 맹렬한데 여기서는 버드나무 재를 쓰기 때문에 맹렬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기계가 매우 둔하여 우리나라 포만 못합니다.”
최무선에 의해 화약무기의 기술이 정착되자 최무선이 사망한 후에도 화약무기는 계속 개발되었고 이들 화포들을 분석하면 당시의 대형 무기들이 얼마나 우수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당시의 가장 큰 포는 날개를 가진 길쭉한 ‘대장군전’ 또는 둥근 주철탄을 발사하는 천자총통이다. 천자총통의 전체 길이는 1370mm이며 중량은 725kg, 포신 길이는 890mm이다. 여기에서 대장군전이란 천자총통에서 발사되던 탄이다. 대장군전의 전체 길이는 992mm이고 전체 중량은 29.84kg이다.
천자총통 시험발사 장면(해군사관학교). 천자총통에서 발사각 45도로 대장군전을 쏠 경우에는 사거리가 1645미터, 발사각을 30도로 하는 경우에는 1503미터이다. 철알탄 200개를 쏠 경우 발사각 45도로 664미터를 보낼 수 있었다.
대장군전을 쏠 경우 포신 끝에서 탄의 속도는 142m/초이다. 직경 20mm의 철알탄 200개를 쏘는 경우 포신 끝에서의 탄의 속도는 205m/초이다. 천자총통에서 발사각 45도로 대장군전을 쏠 경우에는 사거리 1,645m, 발사각을 30도로 하는 경우에는 1503m이다. 주철 200개를 쏠 경우 발사각 45도로 664m를 보낼 수 있었다.
지자총통 역시 ‘장군전’ 1개 또는 주철탄 200개를 함께 발사하는, 당시로서는 두번째로 큰 포이다. 전체 길이는 1171mm, 중량은 132kg이다. 장군전은 지자총통에서 발사되는 탄이다.
현자총통은 날개가 달린 길쭉하고 유선형인 ‘차대전’ 1개 또는 주철탄 100개를 발사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세번째로 큰 포이다. 지자총통이나 현자총통 모두 작동 원리는 천자총통과 같고, 다만 그것들보다 크기가 작고 위력이 약한 것이다.
총통 못지 않게 중요한 무기로는 완구(碗口)가 있다. 완구는 시한폭탄 원리의 진천뢰 또는 둥근 돌탄을 곡사로 발사하는 중세기 우리나라의 절구포이다.
『융원필비』에는 ‘완구는 바리 모양으로 생겼으며 구멍으로 탄을 설치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완구이다’라고 했다. 이 포를 쏘면 돌탄에 의해 허물어지거나 분쇄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성을 공격할 때 첫째가는 화약무기였다.
완구는 크기에 따라 별대완구,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 소소완구 등 다섯 가지가 있었다. 완구는 고려시대의 육화석포를 계승한 것으로 고려 때의 것은 조립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의 것은 일체식으로 주조되었다. '별대완구'의 경우 구경 370mm, 외경 480mm, 총 길이 860mm, 중량 656.7kg으로 매우 큰 무기였다. 별대완구로 71kg이나 나가는 둥근 돌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는 496m, 비진천뢰를 발사할 때는 434m이다.
학자들은 최무선이 기존에 있던 로켓화기인 화전을 보다 개량하고 새로운 개념의 ‘주화’를 발명했다고 추정한다. 화전은 화살에 달린 화약통에 불을 단 다음 화살에 활을 재어 날리는 무기이지만 주화는 화전과는 달리 화살의 화약통에 불을 달아 자체 추진력으로 불화살이 날아가게 한 무기이다. 화전과 주화는 추진 화약의 작용에 의한 분사추진식 화살로서 추진 원리는 지금의 로켓과 같지만 적군에게 주는 파괴력은 주화가 화전보다 월등하다.
주화는 1448년(세종30년)때 금촉주화→세주화→금촉소주화→소·중·대주화를 거쳐 소·중·대신기전(神機箭)으로 불리며 화차에서 발사할 수 있는 자동화무기로 변한다.
임진왜란 때 그 위력을 발휘한 신기전은 전쟁에서 표적을 태워버리는 무기로 쓰였으며 '기화'라 하여 불, 연기, 소리 등을 통한 신호 수단으로도 쓰였다(「행주대첩, 첨단과학 무기 사용해 가능」, 국정브리핑, 2004.03.29 참조).
신기전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것은 약통 앞부분에 발화통이 붙어있어 목표물에 도착할 즈음 폭발했다. 당시의 다른 화기와는 달리 비행 중에 불과 연기를 분출하며 큰 소리를 내는데다가 목표물을 향해 비행한 뒤 스스로 폭발해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대형 화전은 성을 방어할 때나 해전에서 체적이 크고 불이 잘 붙지 않는 목표물을 태우기 위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세계 해전사를 다시 쓰게 한 고려 수군〉
최무선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서 군함에 화포를 장착하여 적들의 배를 파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우여곡절 끝에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하고 화통도감의 판서가 되어 화약무기를 만들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데 그의 진가는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다.
우왕 6년(1380),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 2만여 명이 500여 척의 배로 진포(현 군산)에 상륙하여 내륙을 휩쓸고 다녔다. 고려 조정은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羅世, 원래 원나라 사람으로 귀화하여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워 당시 2등공신이 되었으며 진포대첩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승진했다)와 함께 최무선을 부원수로 삼아 전선 80여척을 동원 왜구를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왜구들은 주력이 이미 상륙하였고 선박들을 모두 연결하여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무장한 고려 군함은 왜선에 다가가 포격을 퍼부었다. 이 당시 화포, 화통, 질려포 등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로켓무기인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이 전선 깊숙이 날라가 500여 척의 선단을 단 한 척도 남김없이 격멸했다.
운봉 황산의 이성계 대첩비. 최무선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배를 모두 잃은 왜구 잔병은 충청도 옥천과 경상도 상주, 김천을 거쳐 남하하다가 후에 조선왕조를 세우는 이성계에 의해 지리산 밑의 운봉(雲峰)에서 완전히 섬멸된다.
진포바다 싸움은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소각하였는데…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배를 지키던 적병들은 거의 타죽었으며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자들도 많았다.’
최무선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배를 모두 잃은 왜구 잔병은 충청도 옥천과 경상도 상주, 김천을 거쳐 남하하다가 후에 조선왕조를 세우는 이성계에 의해 지리산 밑의 운봉(雲峰)에서 완전히 섬멸된다. 이 전투가 유명한 남원의 운봉 황산대첩으로 이때도 최무선의 화기가 사용되어 그 위력을 발휘했다.
우왕9년(1383)에 또 다시 왜구들이 120척의 배로 침입해 왔으나 정지 장군이 화포를 장착한 군함 47척으로 왜구의 선박 120척을 추격하여 남해 관음포에 이르러 화포로 왜구들이 갖고 있던 선박을 모두 격멸한다. 승기를 잡은 고려 조정은 왜구를 원천적으로 근절시키기 위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키로 하고 1389년에 박위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전선 100척을 동원하여 대마도 토벌에 나선다. 고려군은 30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왜구 소굴을 철저히 파괴하고 인질로 잡혀있던 고려 백성 100여명을 구출해서 귀국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가 한선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선의 구조가 평저선이기 때문이다. 배에서 화포를 발사하면 배는 큰 충격을 받는다. 특히 재료가 나무로 되어 있고 배수량이 일정한 규모라면 심한 진동을 받으며 흔들린다. 이러한 진동과 흔들림은 배의 안정성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화포의 명중률에도 큰 영향을 주는데 고려의 전함은 평저선이므로 포 사격시 발생하는 진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후일 임진왜란이 발발된 후 왜군이 화포를 장착한 조선 수군의 위력에 놀라 조선 수군과 마찬가지로 화포를 설치하지만 용골이 하나뿐인 구조로 인하여 조선 수군에 비해 화포의 명중률이 현저하게 낮았다. 왜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연전연패한 가장 큰 요인 중에 하나이다.
여하튼 최무선의 중요성은 진포 앞바다의 해전이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선박에 화포를 설치하여 정박 중인 적선을 완파했고 관음포에서는 바다에서 함포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해전을 치루었다는 점에서 더욱 높게 평가된다.
유럽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해전을 벌인 것은 고려보다 무려 2백 년이나 늦은 1571년 10월 7일 아침,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연합 함대가 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레판토 해전이다.
레판토 해전도. 1571년 10월 7일 신성동맹의 기독교 함대와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가 전투에 돌입했지만 강력한 대포를 장착한 기독교 함대가 승리했다. 이 전투는 기독교 진영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승리한 첫번째 전투다.
당시에 세계의 주도권은 이슬람교로 무장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슐레이만 대제로 불리는 슐레이만 1세(재위 1520∼1566)는 오스만 제국에 미증유의 번영을 가져왔고 서방 세계의 분쟁에 중재자로 나서는 한편 제국의 통치 기구를 확고하게 다졌다. 그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여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다뉴브 강을 넘었고 세계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청동거상이 설치되었던 로도스 섬을 점령했다. 그러나 슐레이만은 육군 이외에 비장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함대가 그것이다. 오스만 함대는 합스부르크 함대를 격파하고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연안을 제압했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했고 키프로스 섬을 점령했다. 이 당시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자 로마교황 피우스 5세는 유럽을 규합하여 반 오스만 연합을 결성했다.
교황과 에스파니아는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를 동맹으로 끌어 드린 후 오스트리아 카알 5세의 서자인 돈 환으로 하여금 연합함대를 이끌게 했다. 마침 오스만 함대는 키프로스 작전 후 군함들의 보수를 위해 지중해 코린트 만 어귀의 레판토 항구에 정박해 있었는데 돈 환이 거느린 신성동맹(神聖同盟)의 그리스도교도 함대가 다가오자 오스만 함대의 사령관 메흐메트 알리는 선박들이 완전하게 보수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그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항을 명령했다. 양쪽 세력은 비슷했지만 200척을 넘는 갤리선과 약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린 투르크 측이 수적으로 다소 우세했다.
그러나 오스만 함대는 그리스도 교도 함대에 신형 무기 즉 대포가 탑재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강력한 대포를 비치한 신형 베네치아 갤리선에서 예상치 못한 포격을 하자 투르크 함대는 곧바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정오경 이미 전세는 그리스도 군에게 넘어갔고 오후 4시에 승리를 거두었다. 투르크 군의 100 척이 넘는 군함들이 나포되었고 거의 1만 명이나 되는 장병들이 생포되었다.
이 전투는 기독교 진영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최초의 승리였다. 레판토 해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곧바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쇠퇴의 길로 넘어가고 역사의 주도권은 이후 바다를 누비는 국가가 차지한다.
그러므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비롯하여 영국과 프랑스군의 해군이 격돌한 트라팔가 해전도 최무선이 화약무기를 선박에 장착하기 시작한 아이디어를 답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함대를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은 세계 해전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음을 감안할 때 그의 비중은 세계 어느 과학자와 견주어 볼 때 결코 낮다고 볼 수 없다(「세계 해전사 바꾼 최무선의 화포」, 국정브리핑, 2004.02.16 참조).
이종호(
[email protected]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