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시인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빛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 그 사실이 겨울 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 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어지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