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게 버킷 리스트라 하기는 그렇지만, 죽기전에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손으로 직접 그린 만화책 5권을 내보는 것이다.
어릴때 꿈은 만화가였다.
초등학교때부터 소년중앙, 보물섬, 새소년 같은 만화 잡지를 즐겨 보았다. 한글을 깨우친 것도 어쩌면 만화책을 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5학년쯤이었나, 짝이었던 친구가 연습장에 만화를 그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머리가 띵했다. 내가 왜 그 좋아하는 만화를 보고만 만족하고 있었는지.....
그렇게 그 친구에게 만화를 배워가며 나도 만화를 그려갔다.
중학교 3년, 꿈은 만화가였다. 고등학교 3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하면서 쓴 연습장보다 만화 그려서 쌓아둔 연습장이 더 많았다.
고등학교때는 만화 그리는 친구 몇명과 외지의 만화 동아리와 함께 만화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주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원고만 우편으로 보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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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현실은 꿈을 쫓게 해주지는 않았다.
당시 만화를 전공할 수 있는 학과는 공주전문대 만화학과 ...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 딱 하나 뿐이었다.
독학으로 그린 만화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음은 자명할 일이겠지만, 나는 원하는 학과에 원서조차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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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난 모대학의 공대생이 되었고, 친구는 어느 대학으로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몇년이 지난 어느 날, 동창들 모이는 일이 생겼는데 그때 같이 만화 그리던 친구도 참석하게 되었다.
술이 몇잔 돌고 각자 그간 있었던 일을 재밌게 얘기하던 중 그 친구와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너 요즘도 만화 그리나?"
"나? 에이.. 뭐 손 놓은지 오래됐지. 그냥 공대생이지 뭐."
"그래?"
그 친구의 얼굴이 약간 우울해보인다.
"난... 그래도 니는 끝까지 만화 그릴 줄 알았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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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말에 껄껄 웃으며, 그냥 어릴때 하던 치기였다고 애써 변명하고 넘겼지만 그 친구의 쓸쓸한 표정의 그 말은 내 마음에 계속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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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내가 만화 그릴때만큼 열정적이었던 적이 있었나?
단연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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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을 다니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업을 하고 뭘 하면서 20여년을 보내왔지만, 그때만큼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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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이텔부터 시작한 동호회나 여러가지 모임에서 써 두었던 글들을 모았다.
IT 업계가 워낙 흥망성쇠가 심했으니, 사이트가 폐쇄되면서 수 없이 썼던 글들이 날라가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그렇게 썼던 글들을 모아서 저장했다. 가끔가다 다시 읽어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런 감정만 자제하면,
내가 저 나이때, 저 시절에, 저 상황에 저런 마음을 갖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추억에 잠길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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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오기전에 형제들 식구와 식사를 했다.
매형이 말한다.
"너한테 사과할 일이 있다."
"무슨 일요?"
"내가 너 만화가 된다했을때, 제일 말렸다. 니가 공대 간 것도 다 나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니가 하고 싶은 거 하도록 두는게 더 좋았던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
"아이고.. 매형.. 그런 소리 하지 마쇼~ 지금이야 웹툰이 대세지 20년전에 그런게 있었나요? 쫄쫄 밥 굶고 살았을거요.. 어떤 길이었건 지금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런 마음 먹지 마요~"
대학 다닌다고 서울 왔을 때, 누나-매형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용돈도 받아 썼으니 내가 고마워 해야할 일이고, 설령 그때 누군가의 의견에 의해 내 길이 달라졌다 해도 결국 선택은 내가 했고 그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래도 내 손으로 그린 만화책을 5권 내보는 것.
ㅎㅎㅎㅎ 돈만 있으면 자기책 출판은 언제나 할 수 있으니, 책 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시작해야할 새로운 일이다.
그러니 그간 썼던 글이라도 모으면... 만화책 대신 글책이라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등학교때 3년간 썼던 일기장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나... 이후 인생의 긴 얘기들은 충분히 추억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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