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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freeboard_16284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진한커피
추천 : 2
조회수 : 12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9/14 11:09:25
나는 외조부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유는 흔하디 흔한 부모님때문이었는데, 두 분은 술을 마시고 싸우며 불화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을 보내고 다시 부모님 손에 우리들이 쥐어졌을때도 
아빠나 엄마가 술을 먹고 귀가하시면 외할아버지집으로 우리 누나와 함께 도망가곤했으니까

불화가 이어지고 초등학교4학년 쯤 두분은 이혼을 하셨다.
예상한 결과라 그렇게 충격적이지도 않았고 나에겐 누나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있었으니까

다만 나와 누나는 아빠가 양육권을 지녔었는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외할아버지집이 너무 멀어 혼자 갈 수 없는 게 너무 싫었다.
아빠는 내가 외할아버지집에 가는 게 탐탁치 않으셨겠지만
어렸을 때 나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아빠는 새어미니와 재혼하셨다.
두 번의 여자가 바뀌었었는데 잘 어울리지 못하셨나보다.
그리고 누나는 아버지의 양육에 불만을 느끼고 어머니 밑으로 갔다.
나에게 있어서는 혼자 아닌 홀로서기가 시작된 것이다.

중학교 때 
특별활동 부에 들어갔는데 얼마나 사람을 때리던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집에선 고립된 듯한 느낌
중학교 1학년
나는 가출을 시도했다.
온갖 꾀병 술수를 가지고 내가 느끼는 이 지옥을 탈출하고 싶었다.
나는 갈 곳이 없어 엄마 밑으로 갔다.
친엄마는 나를 받아주셨고 새아버지도 계셨다.
아빠 밑에 있을 때 보다 더욱 자유로웠고 편안했다.
나를 받아달라고 떼를 썼지만 어머니는 나를 받아주지 않으셨다.

부모님들끼리 얘기가 끝나고 난 다시 아빠 밑으로 가게 되었다.
다시 지옥같은 학교생활, 집에선 고립된 듯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적어도 나는 그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같이 안산으로 돈 벌러 가자고 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중학교때처럼 구타와 모욕은 없어졌지만 학교라는 것 자체가 싫어졌었나보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눈치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무엇보다 안산에 지낼 곳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믿었다.

그날로 짐을 부랴부랴 짐을 챙겨 안산으로 올라와보니 친구의 말은 속된 말로 개 뻥 이었다.
지낼 곳으 없어 놀이터에서 잠을 잤고 밥 먹을 돈이 없어서 컵라면 하나 사다가 잔뜩 불려서 먹었다.

그러는 중에도 집 만큼은 가기 싫었다.
돌아가면 갖은 핍박과 구박이 기다릴 것이 뻔했고 다시는 그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궁여지책끝에 나는 숙식이 해결되는 곳에 나이를 속이고 취직했고 등본을 떼어 오라는 말에 갖은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렇게 근근히 살아갈 무렵 나는 지금의 사장님을 만났다.

17살 때 
나이를 속여 지금의 사장님네 가게에 취직하였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이 속인 걸 밝히고 사죄했다.

사장님네 가게가 번창 할 때 여러곳을 다니며 일을 했고 다소 부당하더라도, 다소 합리적이지 않고 내가 손을 보더라도 나는 묵묵히 참고 했다.

사장님은 지금 그러신다.

일을 하다 보면 고비도 온다고, 너만 힘들고 지치는게 아니라고,  다들 힘들고 사장님도 힘들다고 

그렇게 견뎠다.

그러던 중 다녔던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받은 장학금을 반환하라고...
나는 분명 돈이 없어 놀이터에서 자고 컵라면을 잔뜩 불려 먹었는데 말이다.
알아보니 내가 받기로 한 장학금을 부모님이 대신 받고 반환하라고 하니 내가 가지고 집을 나갔다고 했다.

처음으로 죽고싶었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에게 상처를 받고 척을 지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대화는 하지만 살갑지 않다.
사무적이고 통용적이며 격에만 맞춰 대화한다.

그리곤 나는 일에 더욱 더 몰입했다.

17살 때 격주로 월 2회쉬고 12시간 근무 75만원을 받았다.
18살 때 똑같은 조건으로 80만원을 받았다
19살 때 똑같은 조건으로 100만원을 받았고
20살 ~23살까지 연에 10만원씩 올라 130만원을 받았다.
괜찮았다
나는 사장님과 함께라면 성공 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괜찮았다
남들이 뭐라건 나는 나의 길을 간다고 말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24살 나는 140만원으로 올려받았고 일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졌다.

25살 때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정말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은 친구이며, 결혼 할 예정이다.
다만 그 예정이 아직 멀었지만
여저친구를 만남과 동시에 사장님에게 위기가 왔다.
스스로 자처한 위기였다고 나는 판단하지만 나는 그 위기를 넘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사무실에서 2~3시간 씩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일에만 투자한 적도 있고 1년 내내 휴뮤를 얻어보지 못한 경험도 있었다.

추석, 구정은 말 할 필요도 없이 쉬지 않았고

그럼에도 그 위기는 업종을 바꿔야 할 만큼 컸다.

그게 인상적이셨는지 나를 양아들로 삼아주셨다.
너무나 기뻤다. 드디어 나에게 마음 놓고 사심없이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일주일에 100시간을 넘게 일해도 양아들이란 말에합리화가 되었고 , 급여를 150만원만 받아도 양아들이란 말에 나는 불만을 품지 않았다.
양엄마 보험료가 내 카드에서 나가도 합리화를 했고 빚 때문에 독촉전화를 받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간간히 시간을 내며 만나온 여자친구는 당연히 나에 대한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 내내 일에만 시간을 사용했으니까

여자친구는 지치고 감당하기 힘들다고 했다.

나는 내가 양아들이란 말에 취해 앞으로 함께 할 가족에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과 함께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지금
내 나이 28

어제 용기를 내어 그만둔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돌아온 대답은 칼로 찔러버릴까라는 말과 온갖 욕설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10년이 넘는 정과 양아들이란 포장지에 쌓인 불과한 한낱 돈 안드는 직원이었다는것을

공허하다.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 인 줄 알았다.
나는 정말 축복 받은 줄 알았다.

자, 다시 지옥속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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