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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게시물ID : phil_158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격렬한총잡이
추천 : 1
조회수 : 553회
댓글수 : 22개
등록시간 : 2017/10/04 18:32:53
 철학이라는걸 넘어서기 위해서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칸트 하이데거 기타등등의 대가들의 철학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루어졋고 반박이 나왔습니다. 철학만으로는 절대로 완벽한 것을 만들수 없어보입니다.
철학이 세상과 만나서 세상에 대한 탐구와 실용성으로 이어져야 비로서 완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완성을 위해서 세상이 필요하다면 세상에서 동떨어진 철학은 쓸모가 없는게 될것입니다. 세상은 글로 옮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글로 하는 철학도 불필요해지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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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4 19:30:29추천 0
철학이란 나에게 있어 세상이란 그리고 세상에게 있어서 나란? 세상과 나의 관계 설정이란 의미로 시작하지만

철학을 학문으로 보면 집단지성을 공유하는 장이라고 봐야죠.

집단 지성이란 인류를 의미하니 인류에게 세상이란 세상에게 인류란 이런 의미겠죠.

앞으로 인공지능이 개발될 때에 철학의 역할이 아주 중요해진다고 하네요.
댓글 15개 ▲
2017-10-04 20:45:37추천 0
단순히 관계설정이라면 소설과 차이는 무엇인가요? 잘쓴 소설책들을 보면 세상과 인간의 관계설정이 잘표현되어 있습니다.
2017-10-05 05:37:45추천 0
인문학이랑 철학이랑 차이가 뭐죠? 제가 역으로 질문하고 싶네요.
인문학은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철학은 세상에 관점에서 인간을 보나요?
세상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인간이 없으면 세상도 없겠죠?
물론 인간 없는 세상은 잘 돌아가겠지만 인간이란 관측자가 없는 세상이 잘 돌아가는 거죠.
소설을 보면은 피아 구분이 상당히 잘 되어 있고 뭔가 이야기가 진행이 되려면 두 명은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꼭 사람이 아닐지라도 무인도에 갇혀 있는 소설이라고 보자면 바다도 있고 땅도 있고 하늘도 있고 그렇잖아요.
바다도 땅도 하늘도 이런 것을 '너'라고 보고 그것을 관찰하는 대상을 '나'라고 봐야겠죠.
관측 대상이 없는데 관찰자의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이 없어도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데 세상이 없으면 인간이 존재할 수 없잖아요.
이 점에 있어서 뭔가 억울하고 분하기도 하지만 결국 세상이란 나라는 존재의 필연이 되는 거죠.
그래서 세상의 탐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내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요?
2017-10-05 08:53:30추천 0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511853&cid=42126&categoryId=42126

인문학 안에 철학도 포함됩니다. 더 포괄적인 거에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인문학입니다.
소설을 보시면 다양한 관찰자 시점이 있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책을 보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의식의흐름 기법으로 주인공 스스로의 의식에 대해서 상세하게 풀어서 작성됩니다. 이때 등장하는 주인공 이외의 타자들은 전부 주인공의 의식에 반영됨으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어머니의 존재라던지 스완이라는 존재 같은 것은 주인공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뿐입니다.
이런 것도 피아구분이 가능할까요? 스스로의 의식을 서술한다면 의식은 화자로부터 타자화 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이렇게 1인칭 소설이면서 의식의 흐름기법이 사용된 소설에서 화자없이 세상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1인칭 소설들은 전부 화자의 의식에 반영된 세상을 말합니다. 화자가 없다면 세상에 대한 인식도 없고 세상의 존재가 사라지겠네요.
2017-10-05 18:20:29추천 0
태극과 무극을 보면 이해가 쉬운데 태극은 음양이란 피아 구분으로 에너지가 성립이 되고
무극은 음양이란 피아구분 자체가 없어서 에너지가 불성립 되죠.
어떤 이야기든 에너지가 있어야 진행이 될테니
화자가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하던 타자라는 개념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죠.
음양은 상대적이나 서로 필연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렇다고 둘의 차이가 없다고 해버리면
무극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범신론적 입장으로 보면 우주는 분모에 해당되고 우주의 개별적인 것들은 분자의 해당되는데
분자는 분모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분자가 분모랑 같다고 하면 뭔가 꼬이죠.
피아구분이 없어지고 분자 자체가 완전한데 앎이란 것을 추구할 이유도 없고 운동할 이유도 없겠죠.
피아구분이란 타자를 나와 완전히 별개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이에요.
2017-10-05 22:06:05추천 0
주관은 주관 스스로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수도 있고 자신의 감정, 느낌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1인칭이라도 타자가 없이 소설을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요? 아니라면 스스로의 기억을 떠올리고 감정과 느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2017-10-05 22:19:20추천 0
주관은 스스로 작용할 수 없어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뇌가 있어야 하고
뇌가 돌아가려면 열량도 있어야 하고 산소도 있어야 하고
지구의 중력도 있어야 하고 주관은 엄밀히 말해 타자로 인한 필연이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뭔가 떠올라야 그게 떠오르죠.
과거를 떠올린 다는 게 백지 상태를 보는 게 아니잖아요.
감정이나 느낌도 엄연히 피아구분이죠.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건 단 하나도 없어요.
우주의 있는 모든 입자들이 동일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면
고체와 액체와 기체의 대한 기준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깐요.
만질수도 없고 들을수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고 이렇게 될테니깐요.
신으로 부터 우리는 독립할 수 없다는 이야기죠.
소설도 독자라는 타자가 있어야지 없으면 일기장이란 것도 없죠.
일기장을 쓰려고 해도 종이랑 연필이란 타자가 있어야하고
자기 손이란 타자가 있어야하고 자연이란 환경도 있어야 하고 그렇죠.
2017-10-05 22:42:20추천 0
부처님 이야기로 보자면 요가의 배경이 나오는데
싯타르타(부처님)는 인간은 죽음이란 보편적 진리를 극복할 수 있는가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죽음을 극복한다면 육체라는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고행을 했어요.
하루의 콩 한 톨만 먹고 자신의 오줌을 먹으며 육체를 훼손시키면서 고통에 익숙해지려고 하죠.
부처가 깨달은 것은 세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굳이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행 중에 알았죠.
뭐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내용을 전하고자 한다는 것인데
나중에는 부처님의 수행법이 요가로 전승된 것이고요.
어쨌든 정신이란 게 육신으로 독립적일 수 없다는 거죠.
육신이란 타자가 필연이 되죠.
2017-10-06 00:28:29추천 1
1.불교나 기독교 사상을 공부하신적 없는 것 같네요. 둘다 육체를 넘어선 것이 있고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2.요가는 불교보다 훨씬 옛날부터 내려왔습니다.
https://ko.m.wikipedia.org/wiki/요가

3.주관은 어린아기에게도 있고 지금 당신에게도 있습니다. 어린아기가 객관을 의식속으로 받아들일때 뇌, 산소, 에너지 개념을 모릅니다. 이것들은 나중에 교육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된 것이겠지요. 당신은 이것들에 대해서 교육을 받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주관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이것들이 없다고 주관이 없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감각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없어졌다고 추측할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주관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4.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지요.
인과님이 말하고자 하는바는 철학은 세상과 나의 관계 맺기 인데 인과님의 생각은 세상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존재이고 인간은 세상에 속할 뿐이라는 말인가요?
이게 맞다면 이미 세상과 자신의 관계맺기를 끝냈는데 왜 철학을 하시나요?
2017-10-06 19:46:13추천 0
3.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주관의 유무를 결론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니깐 저도 믿음을 가질 텐데
동물 다큐나 과학 다큐나 강의나 이런 것을 접할수록 자유론과 결정론의 대립이 4:96 정도로 치우치게 되네요.
옛날 사람들은 인간의 주관을 다 인정하며 살았겠지만
최근에 뇌과학자들의 영향으로 주관은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4. 관계가 꼭 좋게 맺힐 순 없죠.
문학 중에서도 원수에게 한이 맺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람이 뭐든지 하게 되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중요한 건 신을 아군으로 생각하던 적으로 생각하던 관계가 맺히면 에너지가 생긴다는 건데
저 같은 경우 신이랑 아군이 되려고 세상을 알고자 했는데 알면 알수록 아군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사춘기가 되면 부모를 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있는 것이죠.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봐야 하 듯 좋은 면만 생각하다가 나쁜 면을 접하면서 틀어지는데
지금의 저는 신의 대한 애정도 분노도 없고 대체로 무관심하니깐
그래서 철학을 왜 하냐고 물으면 무관심한 만큼 대답할 수 있겠네요.
따지고 보면 소심한 이신론이죠.
2017-10-06 22:38:46추천 0
1.단어를 잘못 이해한 것 같네요.
주관은 객관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주관2 [主觀]
[명사]
2.외부 세계ㆍ현실 따위를 인식, 체험, 평가하는 의식과 의지를 가진 존재.

개인의 의식과 의지를 주로 뜻합니다.

2. 제 나름대로 정리하려 하지만 인과님의 답이 솔직히 어떤 맥락을 가지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저는 세상과 관계맺기가 철학의 목표라면 인과님은 이미 철학을 완성했으므로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인과님은 갑자기 신 얘기를 하십니다. 신에게 무관심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질문과 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저는 전혀 '관계'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느낍니다. 동문서답처럼 느껴져서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려워보입니다.
2017-10-07 17:44:56추천 0
언어가지고 따지면 곤란하죠.
제가 주관을 사전적 의미로 사용한 게 아니고 신이라는 것도 제가 설명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님이 유추를 해야 하고요.
인식의 해상도보다 언어의 해상도가 더 낮은데 언어의 한계성을 인정 해야죠.
세상 = 우주 = 신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인데요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신에게 무관심하다고 하면 맥락이 풀리는지요?
세상과의 관계 맺기는 세상 따위에서 내가 살아갈 필요가 있는가? 반대로 나 따위가 세상에서 살아갈 필요가 있는지의 과정도 있으니
철학하는 사람 중에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 있는 것이죠.
2017-10-07 18:05:18추천 0
제 글을 보더라도 주관의 유는 자유론을 의미하는 말이고 주관의 무는 결정론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글 속에서 제가 표현하는 주관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텐데요.
세상을 아는 도중에 세상이 무서워졌다. -> 알기를 포기 하고도 싶다. 이런 의미인데 완성이랑은 거리가 멀죠.
철학을 완성했으면 이런 사이트에서 질문을 하지도 않았겠죠.
무엇보다 여기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가 삶에서 에너지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집단지성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겠죠.
2017-10-07 22:28:01추천 0
1.제가 주관이란 단어를 먼저 썼는데 그것을 다른뜻으로 쓰셨다는 것은 제 글을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생각했다는 말이 되겠네요. 결국 동문서답을 하신 것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말했는데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면 되겠다고 말하는건 동문서답이라고 표현할수 있는 상황 같네요. 그리고 이것은 언어의 한계성보다는 독해력이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게 맞는 추론인 것 같네요.

2.세상과 신이 같다는 것은 인과님이 임의적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세상과 신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또 인과님은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신이랑 아군이 되려고 세상을 알고자 했는데... "
여기서 4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는 것은 존재한다.
신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세상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세상을 알면 신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알면 신의 성향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신의 성향이 세상에 반영되어 있다는 말이지 세상=신이라는 주장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신의 창조물일 경우에도 세상은 신의 성향을 반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세상이 곧 신이라면
"세상 따위에서 내가 살아갈 필요가 있는가? 반대로 나 따위가 세상에서 살아갈 필요가 있는지의 과정도 있으니" 이런 주장을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건 단 하나도 없어요." 이렇게 주장하셨기 때문에 나 라는 것도 세상에서 속한 존재일 뿐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게 맞습니다.
인과님의 주장으로만 정리하면
세상은 곧 신이다.
나는 세상에 존재한다.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고로 나는 세상에 포함된다.
세상은 곧 신이기 때문에 나는 신의 일부이거나 신이다.
그런데 인과님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셨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맞는 주장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2017-10-09 08:21:07추천 0
저는 신의 일부일 뿐이지 신이 아니므로 철학은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격렬한총잡이님이 정리하신 거 다 인정을 하고 물어봅시다.
저의 주장은 타자의 종속된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격렬한총잡이님이 말한 주관은 스스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말하는 타자란 정신을 가두고 있는 육체를 의미해요.
2017-10-09 10:25:13추천 0
타자라는 것은 인식과정을 통해서 추리한 것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그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인식과정을 거치기 이전의 의식을 떠올려보면 타자는 어떠한 형체도 의미도 없는 인식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들을 인식과정과 추리를 통해서 타자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객관과 다르게 의식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식과정과 추리라는 것이 필요없는 직관적인 것들 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들은 존재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인식할 수도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식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은 인식가능하고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존재합니다.
이렇게 의식자체가 존재를 창조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의식이 무에서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 존재는 의식에 영향을 줄 수 있게됩니다. 외부의 타자가 없더라도 스스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입니다.
2017-10-05 00:30:34추천 0
활자보다 현실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활자로 형상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인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인식자체가 언어이기도 합니다. 인식과 언어가 곧 현실이기도 합니다.

언어나 활자는 도구적 존재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목적이나 진리라고 하기 보다요.
2017-10-05 04:48:58추천 0
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언어의 해상도 보다 인식의 해상도가 더 높다는 내용인 거 같은데 언어라는 도구에 의존하다 보니 결국 우리는 더 낮은 해상도를 통해서 세상을 봐야 된다. 그런 거 같네요.
2017-10-05 08:35:02추천 0
인과님 먼저 글을 읽으세요.
2017-10-05 18:47:03추천 0
글은 읽어놨어요. 할 말은 없네요. 할 말이 없다는 거 자체가 철학에 대해서 열정이 부족한 듯
2017-10-12 07:59:23추천 0
옳고 그름을 판단한기 위한 심도깊은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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