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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눈을 떴다. 처음 보는 천장이다.
주황색의 천정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경험했던 주거용 텐트처럼 중앙이 높이 솟았다. 할로겐 램프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데, 남자는 자기 주변을 살폈다. 사방팔방 아무리 크게 보아도 1평을 넘지 못할 공간이었다. 바닥은 나일론 천이 팽팽하게 당겨진 모양새였고 한켠에는 노란색의 박스가 하나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벽은- 중앙의 높이 솟은 중심대를 기준으로 팔각형으로 나뉘었다. 그 중 하나의 면에 길고 가느다란 세로줄이 나있었다. 남자는 그 세로줄의 끄트머리에서 은색의 작은 지퍼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지퍼로 한발 내딛었다-그리고 중심을 잃고 균형을 잃은 어처구니 없는 모양새 그대로 쓰러졌다. 남자는 자기 몸을 돌아보았다. 눈에 보이는 출혈이나 외상은 없었다.
남자가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곳이라는 걸 깨닫는데 5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남자는 혹시, 그래도, 어쩌면, 온갖 불안한 상상과 한줄기 희망과 기대를 품은 채 기어가는 자세로 지퍼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남자를 밀어올리고 있는 바닥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남자는 손을 쭉 뻗어 지퍼를 잡았다. 그리고 힘껏 지퍼를 끌어내렸다. 그러자 바로 남자의 얼굴을 차가운 물이 덮쳤다. 짠 맛이 났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균형잡기에 다시 실패하고 다시 뒤로 넘어졌다. 차가운 물이 다시 남자의 몸을 때렸다. 남자는 넘어진 자세 그대로, 열어젖힌 출입구를 향해 기었다. 넘어지는 와중에 놓치 않고 있던 램프를 높이 들어 밖을 보았다.
밖은 온통 어둠이었다.
그리고 귀를 때리는 것은 거대한 물의 세계가 서로 부딪히며 밀려나고 쓸려 가며 내는 파열음 뿐-파도 소리 뿐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조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있던 장소는
구명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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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순간 도리어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남자는 지퍼를 올려 더 이상의 바닷물이 구명보트 안으로 더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천정 랜턴 앞부분의 필터를 조절하여 빛이 구명보트 안 전체로 퍼지게 했다. 바닥에는 이미 손등 높이로 바닷물이 들어와 있었지만, 지금은 이를 처리할 수도 없었다. 남자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물기를 대강 없애고 한쪽 구석에 몰아넣었다. 다음으로 남자가 한 일은 한켠에 있던 노란 박스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거기서 다음의 물품을 찾아냈다.
에너지바 6개
2L 식수 6통
조잡한 낚시도구(바늘과 실)
접이식 주머니칼
권총형 조명탄
지도, 나침반
작은 손거울
구명조끼(구명조끼에는 호루라기와 점멸등이 어깨 부분에 붙어있었다)
무전기와 예비배터리 2개
남자는 손거울로 자기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수염의 길이를 보건대, 남자는 자신이 최수 하루는 면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 말인즉, 적어도 하루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에너지바의 포장지에 인쇄된 내용이 맞다면, 에너지 하나의 열량은 1200kcal. 하루에 필요한 열량이 3000kcal이니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다면 간신히 죽지 않을 정도다. 물은 하루에 마시는 용도만 쓴다면 2L 한 통으로 사흘까지는 쓸 수 있을 것이다. 고작 바늘과 실 뿐이지만, 작은 물고기라도 걸린다면 그걸로 식량 보충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남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구명조끼를 입고 조명탄을 허리쪽 벨트에 묶었다. 그리고 다음은 무전기. 컴팩트한 사이즈의 일상생활용 무전기였다. 남자는 무전기를 만져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버튼을 누르고 주파수 휠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유효한 주파수를 감지하려 애를 썼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남자는 검색된 주파수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라고 했으나 어느 채널에서도 응답이 없었다.
나침반은 계속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나침반이나 지도나, 있어도 쓸모가 없었다. 숙련된 뱃사람이나 천문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대략적인 위치를 알겠지만 남자는 그런 지식이 전혀 없었다.
해가 뜨자, 남자는 지퍼를 내려 다시 밖을 살폈다. 해는 동편에 있었다. 바닷물은 밤보다 거칠지 않았지만 그래도 구명보트를 연신 흔들어 댈 정도였다. 남자는 눈을 찌푸리며 최대한 멀리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육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없었다.
남자는 자기가 어떤 사고를 당한 것인지 기억해 내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영상들이 서로 뒤섞여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떤 것은 당황한 비행기 승무원이 패닉에 빠진 승객들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장면이었고, 또 어떤 것은 구명보트를 착용한 선원이 높은 파도에 휩쓸려 순식간에 갑판에서 사라진 장면이었다.
조금 더 냉정히 생각해 보려고 했다. 이 정도 구명보트라면 분명,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여객선에서 갖추고 있을 게 타당하다. 그렇다면, 그 정도 배가 사고를 당했다면 다른 승객들은? 그리고 선원들은?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배가 사고를 당했다면 응당 인근에 있는 다른 배에서-그것이 상선이든 유조선이든 구조를 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 못해도 눈을 뜬지 12시간이 지났음에도-바다 어디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물-마실 수 없는 바닷물이고 자신과 구명보트 뿐이었다.
그때-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파도의 거품도 아니고, 빛이 반사되어 착각한 것도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 형체를 갖춘 작은 것이 파도 위에서 이쪽을 향해 불안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는 구명보트에서 떨어지지 않게 한 손으로 줄을 꽉 잡고 최대한 몸을 기울여, 들어오는 파도의 타이밍에 맞춰 남은 손을 뻗었다. 유성 매직이었다. 기대했건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남자는 벽에다 사선 표시를 했다.
구명 보트 생활의 첫 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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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바는 고무타이어를 씹는 맛이 났지만 맛을 따지 입장이 아니었다. 시험 삼아 낚시바늘에다 에너지바에 있던 건포도 한 알을 끼워 줄을 내려보았다. 처음에는 빈 바늘만 올라왔다.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도전한 결과, 손바닥 크기의 물고기가 걸렸다. 나자는 낚시에 문외한이 자신이 해낸 성과에 놀라워하면서, 이 일을 지나고 나면 낚시를 취미로 배워야 겠다 결심했다. 불을 피울 만한 연료도, 장소도 없었기 때문에 주머니칼로 회를 쳐 생으로 먹는 수밖에 없었다. 아가미를 떼어내고 뱃속을 비워 바닷물로 씻어낸 뒤 주머니칼의 칼등으로 비늘을 벗겨 먹기 편하게 처리를 했다. 칼날이 상하지 않게 최대한 뼈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살을 발라내어 씹지도 않고 삼켰다. 양념이 없어 심심했지만-바닷물 때문에 그런지- 간이 된 듯해서 나쁘지 않았다. 보존할 방법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날 잡은 물고기는 그날 식량으로만 사용했다. 에너지바는 최대한 아껴먹고, 미끼는 낚은 물고기 살점이나 내장 일부를 사용했다.
용변은 엉덩이만 구명보트 밖으로 꺼낸 상태로 해결했다. 남자는, 용변 직후 낚시가 평소보다 잘 되는 것을 알았다.
틈틈히 무전기 채널을 돌려가며 구조 신호를 보냈다. 응답은 제로(0)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가장 필요한 건 무엇보다 식수였다. 남자는 유성마커로 물통에 눈금 표시를 해가며 그날 마셔야 하는 급수량을 정하고 그것을 따랐다. 하지만 아무리 아껴마신다 하여도 2주치 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 전에 구조되는 것이지만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바다 위에는 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모든 게 자신의 망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이따금 바다 위로 떠내려왔다는 것이다. 유성매직 다음으로 남자가 발견한 것은 여행용 손가방이었다. 안에는 클렌징폼, 바디워시, 치약 같은 위생용품이 있었다. 응급 구급상자를 통채로 건지기도 했다. 한번은 여성용 여행 트렁크 가방이 떠내려왔다. 여아용이었던 듯, 작은 사이즈의 속옷과 곰인형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그날 주운 속옷과 곰인형으로 자위를 하고 잠에 들었다.
운이 좋을 때면 건과일이나 과자봉지를 발견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쓰레기가 흘러들었다. 개중에 쓸만한 것은 건져서 사용했다. 예를 들면 빈 PET나 플라스틱통은 비를 받을 수 있었다. 아직 한번도 비를 맞이한 적은 없었지만, 모자란 식수를 보충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헛되지 않았는지, 식수가 마침내 2L 한 통만 남았을 때 비가 내렸다. 남자는 그동안 모아온 통을 모두 꺼내 구명보트 밖에 내놓고 밧줄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남자는 그날 충분한 양의 식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남자는 보트 쪽으로 떠내려오는 쓰레기들을 고르고 골라, 앞으로 생활에 필요할지 모르는 것들만 선별했다. 작은 공이 떠내려오면, 유성매직으로 공에다 구조 메시지를 적어놓고 옷가지를 묶어 잘 보이도록 한 다음 바다로 띄워보냈다. 공을 건질 때마다 그렇게 흘러보냈다. 공은 한결같은 방향으로 계속 흘렀다.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 남자를 엄습한 건,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바다 위, 홀로 떠 있는 구명보트 안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주변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물 뿐이고 무전기는 어디서도 응답이 없었다. 낚시로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였기에, 나중에 가서는 굳이 먹지도 않을 물고기인데 잡아서 방생해주기도 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남자는 언제 올지 모르는 구조대를 상상하고, 구조된 이후 어떻게 살지 상상을 하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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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매직으로 칠한 사선이 20개가 되던 날, 남자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벌써 3주가 지났지만 도통 구조대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따금 흘러오는 조난의 잔해들은 생존에 보탬이 될 뿐, 생존 그 이상의 것을 갈구하는 남자의 욕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남자는 끝이 없는 북쪽 바다를 응시하다, 며칠 전 주운 공을 바다 위로 던졌다. 공은 잠시 떨어진 바다 그 자리에 멈춘 듯하더니 남쪽을 향해 모습을 감췄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남자는 자신을 질책했다. 지금도 그렇게, 지금까지 흘러보낸 모든 공들은 남쪽으로 흘렀다. 그러고보면 지금까지 떠내려온 물건들도 전부, 북쪽 방향에서 온 것들이었다. 그쪽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북쪽을 향해 가야 한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천문과 지리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수온이 얼음처럼 차갑지 않고 바람이나 기후로 미루어보아 사람이 생존 불가능한 해역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기억은 명쾌하지 않았지만, 가끔 떠내려오는 물건들로 보아 분명 그곳에 뭔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해류는 계속 북쪽에서 남쪽으로만 흘렀다. 남자는 자신이 해류를 거슬러 얼마나 헤엄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구명보트를 끌어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구명보트보다 작은, 충분히 인력으로 북쪽을 향해 이끌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남자는 그동안 모아온 PET 병을 모아서 밧줄로 서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동안 많은 양의 빈 PET병과 밧줄이 흘러왔기 때문에 재료는 부족하지 않았다. 남자는 혼자 올라탈 수 있는 작은 카누 크기의 뗏목을 만들었다. 노는 바다에서 떠내려온 나무판자를 주머니칼로 깎아서 마련했다. 그 자신의 몸 말고는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비닐에 식수며 에너지바를 넣고 단단히 입구를 봉했다. 그리고 그 밧줄을 PET 병으로 만든 뗏목에 묶었다. 준비는 끝났다. 해가 뜨고, 남자는 뗏목을 바다 위로 띄웠다. 노를 좌우로 저어가며, 남자는 북쪽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채 구명보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남자는 기겁하며 되돌아갔다. 간신히 구명보트로 올라온 남자는 눈앞에 나타난 불청객의 존재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구명보트 쪽으로 천천히 몰아치는 파도의 잔물살을 가르며 물 위로 절반쯤 드러낸 반달 모양의 지느러미.
상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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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에 걸어놓은 랜턴의 불이 희미해졌다. 밤에,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사용했는데도 벌써 배터리가 떨어졌다. 결국 남자는 랜턴의 불을 껐다. 암흑 속에서의 정적은 사고보다 공포를 더욱 상기시켰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자는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공포를 간신히 짓누르며, 억지로 사고를 가동시켜 생각을 시작했다.
그날, 상어가 나타난 이후로 상어는 계속 구명보트 주변을 맴돌았다. 딱히 공격을 하지는 않았지만, 없어졌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서 남자를 놀라게 했다. 상어 때문에 기껏 만든 뗏목과 그와 함께 남자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식인 상어가 아닐지도 모르잖아. 지레 겁을 먹은 건 아닐까? 하고 남자는 고민했다. 그래서 미끼용으로 보관 중이던 물고기 내장을 플라스틱 통 하나에 치덕치덕 발라 피를 묻혀 바다로 보냈다. 아니나다를까, 상어는 피 냄새를 맡고는 플라스틱 통을 먹이로 착각하여 한번에 집어삼켰다. 바다로 튀어나온 상어의 이빨은 톱날처럼 날카롭고 커다랬다. 생김새는 영화에서나 보던 백상아리 같았다. 남자는 생전 상어를 직접 본 적이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했다-저 상어는 위험하다.
상어는 이 구명보트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상어는 구명보트를 따르듯, 조용히 물결 위로 지느러미를 드러낸 채 남쪽으로 천천히 흘렀다. 가끔 상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싶으면, 상어는 으레 구명보트를 중심으로 한바퀴를 돌아 다시 남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한번 피냄새를 맡은 상어는 구명보트 주변을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떠내려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초점을 맞추며 흔들리는 물체에 집중했다. 새로운 표류물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생김새, 색깔이 기억에 낯이 익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물체가 구명보트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남자는 공포에 찬 비명을 질렀다.
공이었다.
밧줄로 돌돌 묶어놓고, 색깔있는 옷가지로 표시를 해 둔, 유성매직으로 구조메시지를 적었던
남자가 흘려보낸 공이었다.
그런 공들이 그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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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남자가 줄곧 남쪽으로만 흐른다고 생각했던 해류는, 어쩌면 한방향이 아니라 원형이라 남쪽으로 흐르다 빙글빙글 돌아 한바퀴 다시 되돌아온 건 아닐까. 그런 해류가 있을수도 있다. 그런데 그동안 나침반이 북쪽에서 자침이 바뀐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남자의 기억에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침반은 줄곧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만약 남자가 생각한 것처럼, 해류가 계속 돌고 있었다면 응당 나침반도 움직여야 했다. 나침반이 고장난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무전기를 잡고, 아무 채널에다 살려달라 소리질렀다. 그러기를 한 시간 계속해서, 여분의 배터리마저 모두 소진해 버리자 목소리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났다.
남자가 날짜 기록하는 것을 멈춘 것은 50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 상어가 갑자기 떠다니는 뗏목을 공격하여 산산조각을 낸 것이다.
공격의 이유는 추측도 가질 않았다. 그 전에, 왜 상어는 구명보트 주변만을 멤도는 걸까. 상어가 나타난 뒤부터 잡은 물고기 피도 커다란 물통에 담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구명보트 안은 피와 오물냄새로 코가 막힐 지경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어의 의도가 파악되질 않았다.
랜턴이 계속 깜빡였다. 조명마저 불안정하니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남자는 랜턴의 스위치를 끄고 아예 랜턴을 천정에서 떼내어버렸다.
그리고 남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랜턴을 떼어낸 자리에서
남자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발견했다.
작은 동전만한 크기에, 계속 깜빡거리는 랜턴 불빛에 반사되는 동그란 유리, 동공처럼 가운데 검은 구멍을 통해 반사되는 남자의 어이없어 하는 모습.
초소형 카메라였다.
남자는 조심스레 카메라를 집었다. 떼어내려 했지만 보트의 중심에 접착이 되어 있는 것인지 남자의 손으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몸을 뉘였다.
이 상황 자체가 누군가의 농간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 의심은 전부터 있었다. 이제는 그것이 확신으로 바뀐 것이다. 혼자 남겨진 구명보트, 꼭 물자가 필요한 타이밍에 떠내려오는 생존물품,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현상들, 천정에 숨겨진 초소형 카메라... 이 모든 게 너무나 작위적이고 노골적이었다.
긍정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하려 했다. 우선은 카메라부터. 보통 이 정도 구명보트에서 저런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던가? 아니, 남자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 구명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하는 일종의 블랙박스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이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단계를 넘어서,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설득을 해야 한다. 그러다 마침내 도달한 사고의 끝에는, 어쩌면 자기가 처한 상황 자체가 어떤 TV쇼의 컨셉 프로그램이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이르렀다. 이 바다처럼 보이는 것은 커다란 세트장이고, 자신은 지금 천정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로 모습이 방송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방송이 끝나면 스탭들이 웃으며 들어와 자신을 진정시킬 것이고, 후일담 식으로 두어 번 초청받아 인터뷰를 하고나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오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인정해 버리기에, 지금 남자는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이를테면
첫날 이후, 처음으로 손거울을 집어들었다.
거울 속 남자의 수염은, 첫날과 다름없는 길이 그대로였다.
남자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생겼었던가.
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인가.
분명 단편적인 기억들은 존재한다. 당황하는 승객들을 진정시키는 비행기 승무원… 누구?
이상했다. 분명 다른 기억의 조각 속에서, 그는 선원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비행기 승무원이라니? 그럼 자신은 배가 아니라 비행기를 탔었단 말인가? 아니, 그렇다면 대체 기억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선원의 이미지는 무엇이었나.
남자는 왜 자신이 비행기 승무원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지 강한 의문이 들었다. 왜 이런 기억을 그냥 넘어갔던 것이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마땅한 답이 있을리 만무했다.
분명 첫날, 남자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물고기 회 치는 법을 알았고 여러 도구 만드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 것은 도대체 언제 배웠던 걸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 자신을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재차 말하는 것이지만-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만약 이 모든 게, 남자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것이 망상이 아니라는 사실 하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남자의 기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오래된 영상 속에서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한 남자가 방송사의 농간으로 그의 인생 전체가 생방송 라이브 방송되는-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교묘히 짜여진 픽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또 너무나 위험했다. 그 자신은 분명 상어와 맞닿들여 위기를 겪지 않았던가. 그런 위기조차 조작된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대체 이 상황들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스너프? 그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적절한 타이밍에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이 흘러오는 것인가.
이유도, 배경도 모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자신의 생존을 바라면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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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결심했다. 54일째 되던 밤이었다.
남자는 그동안 모아놓은 피와 오물을 몽땅 바다에 뿌렸다. 낮이었다면, 구명보트 주변으로 피색깔 바닷물이 물에 잉크 탄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으리라. 이제 바다 속으로 피냄새가 퍼질 것이고 근방에 있는 상어는 자연스레 구명보트 쪽으로 다가올테지. 남자는 어두운 하늘을 향해 조명탄을 쐈다. 선명한 오렌지 빛이 하늘로 솟았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검은색의 시야가 붉게 변하며 넘실거리는 파도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이성적인 반달 모양의 지느러미가 눈에 들어왔다. 상어가 뿌려놓은 핏물 사이에서 철벅거리며 헤엄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상어를 향해 마지막 조명탄을 겨눴다.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났다. 눈이 멀듯 선명한 핏빛 탄환이 긴 꼬리를 남기며 상어에게 날아가 박혔다. 상어가 갑작스런 고통에 놀라며 물 속으로 숨었다. 조명탄은 물 속에서도 타올랐다. 빛이 꺼질 때, 상어는 다시금 물 위로 올라왔지만 그 전처럼 기운 넘쳐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결심했다. 아직 어슴프레한 빛의 잔여물이 남아있는 동안 끝장을 봐야 한다고. 주머니칼 쥔 손에 힘이 들었다. 남자는 구명보트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현실을 직시하며, 자신을 에워싼 정체모를 절대적인 힘에 저항하기 위해, 점점 어두워지는 불빛을 향해 헤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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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죽었어!”
“상어가 나올 때는 바다에 들어가면 안 돼. 몇 번이나 말했잖아.”
“상어는 못 죽여?”
“못 죽여. 상어가 나올 때 바다에 들어가면 그대로 게임오버야.”
“이번에 생성한 캐릭터는 체력, 근력 스탯이 높았거든. 조명탄을 쏴서 상어도 비실비실 거리길래 막타 치면 죽을 줄 알았지.”
“바보야. 애초에 상어를 ‘죽인다’는 선택지가 없다니까.”
“무전기는 며칠째부터 쓸 수 있어?”
“55일이야.”
“망할 하루만 더 있었음 되는건데.”
“무전기 연락이 되어야 다른 조난자들하고도 만나고 히로인하고도 이어져.”
“별 수 있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뭐.”
“이번에는 꼭 깨길 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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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눈을 떴다. 처음 보는 천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