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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역사소설] 쾌남 봉창! #12
게시물ID : history_290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괴발살!
추천 : 0
조회수 : 44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0/24 22: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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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외면


취조를 받다보면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막 들이닥쳐.

관할 서장에다 일본 경시청의 뭐라던가, 하여간 어떤 놈이 다녀가는지도 잘 모르겠고. 여하튼 이놈저놈 들락날락 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취조실이 무슨 동물원도 아니고.

오늘따라 뭘 그렇게 구경 온 사람들이 많은지 제대로 취조 받을 틈도 없네.

뭐 얘기 좀 할 만하면 자꾸 문 밖에 나가서 지들끼리 소근거려.

높은 사람이 오니까 다르긴 다르더라고.


-야. 허리 쫙 피고 똑바로 앉아있어.

-갑자기 왜?

-높은 분들 오신다잖아. 빨리 똑바로 앉지 못해!

-근데 뭐 어쩌라고.

-이 자식이 진짜! 내가 요새 너무 잘 해 줬지?

-아. 걍 죽여. 어차피 죽을 거 맘대로 하라니까?

-야! 빨리 쟤 자세 좀 바로잡게 해 봐봐!

완전개판이야.

개판이긴 한데 솔직히 요새는 많이 편해지기는 했어.

내가 워낙에 솔직하게 다 얘기를 하니까 나름 형사나 검사하고도 신뢰가 생겼거든.

그 사람들이야, 뭐 하나라도 알아내고 캐내는 게 직업이니까 들볶아 대지만, 이쪽에서 속이려는 기색이 하나도 없는 걸 확실히 안 다음부터는 그럭저럭 잘 대해 줘. 처음에 비하면 폭언이나 욕도 확 줄었고.


이렇게 잡혀서 취조 받고 있는 내가 말하는 것도 좀 웃기기는 한데, 여기서도 정직이 최고인 것 같긴 해. 서로 신뢰가 쌓이거든.

하여간 견장에 무슨 별이니 꽃이니 잔뜩 달은 사람들이 잊을만 하면 오고가는데 요새 부쩍 심해. 아무리 내가 취조를 당하는 피의자 입장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사람 구경하러 많이 오면 이거야말로 수사방해 아닌가?

아니면, 내가 워낙에 거물급 죄인이라 한번 실물이라도 봐 두려고 그랬나?


취조실 창문 너머로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면 난 일부러 고개를 슬쩍 돌려 바깥쪽 창문을 쳐다봐.

-아. 공짜로는 못보지.

내 장난이 좀 심했나... 그날은 서류철로 머리통을 여러번 맞았어.

그래, 자제해야지. 내가 여기서 모범을 보여야 다음에 여기에 들어올 진짜배기 독립투사들이라도 대접을 받을 거 아냐. 나.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니라고.


그래...저번에는 어디까지 했더라...

맞아. 공장에서 사상범 비슷하게 오해받고 술 퍼먹으면서 연말연시를 보낸 일까지 했었지.

연말연시도 지나고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영 공장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

내가 여지껏 조선인이라 차별받은 것도 그렇고, 회사에서 대 놓고 뭐란 적은 없는데 은근히 따돌리면서 나만 보면 쉬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먹고 사는 건 조금 나아졌는데 기분이 영... 그래.

아주 살기가 갑갑하고 그렇더라고.


뭐 미련 없이 때려쳤지.

누군가 이렇게 말 할지도 모르겠어.

-야. 이거 너무 쉽게 때려치는 거 아냐?


글쎄. 내 생각은 좀 달라.

뭐랄까. 맘에 안 드는 건 맘에 안 드는 거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되지도 않는 급여에 구질구질하게 비비면서도 죽지 못해 오래 다녀야 하는 걸 뭐라고 할 수는 없지.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건 민족성이 어떻고 일본인이나 조선인의 문제도 아냐.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잖아?

근데 말야.

나는 성격이 좀 유별난가봐. 그렇게 구차하게라도 비비면서 이 악물고 있다가 뭔가 죽을병이 생길 때까지 억지로 참는 게 걍 싫더라고.

처음에는 나도 얼추 남들 흉내 내면서 그럭저럭 살기는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팍 때려쳐. 그런 성격인거 맞아.


뭐랄까. 밸이 꼴린다고나 할까?

내 잘못이 없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태클을 걸어오면 도저히 못 참는다고 할까.

여하튼 그래.

그리고 별로 길지도 않은 인생에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봐야 남는 게 뭐 있겠어.

그저, 나쁜 일 하지 말고,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최대한 신나게 살자.

이게 내 생각이야.

만약 내게 주의나 사상이란 게 있다면 쾌락적 개인주의랄까?

뭐 그런 거라고.


여튼 뒷구녕으로 이봉창이는 사상범이니 어쩌네 하는 소리를 듣는 것도 질렸고, 무슨 주의니 사상이니 하는 얘기는 잘 알지도 못하니 되도록 안 할까 해.

뭘 알아야 얘기를 하던가 말던가 하지.

그 다음? 뻔하지 뭐. 매번 같은 패턴이야.

오사카나 고베의 항구근처를 떠돌며 다시 일용노동직이나 찾을 수밖에.


왜 그렇게 사냐고 묻지 말아줬음 해.

난 적어도 내 소신에 따라서 때려친거니까.

뭐가 어쨌건 누구 피해 준적도 없고. 처자식도 없으니 나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 고생시킨 적도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그때그때 조금 편하자고 말야.

영 마음에도 안 드는 직장에 평생 죽어라 들러붙어 있을 생각은 코딱지만큼도 없다고.

그렇다고 이게 팔자니 어쩌니 주절주절 넋두리 하는 것도 지저분하잖아?

그렇게 전전하다가 아는 데서 직장을 하나 소개 받았어.

이번에는 일본인이 하는 비누가게야. 이번에는 제대로 작심을 했지.

조선인 이름 걸고 살기가 이렇게 힘들다면 걍 일본인 기노시타 쇼조로 살자!


이것도 무슨 깊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일본에서 일본사람으로 사는 게 훨씬 편했으니까. 내 마음은 자꾸 넌 조선인이야,라고 말했지만 경험이 자꾸 나를 일본인으로 살라고 하더라고.

-괜히 조선인이라고 밝혀서 손해 볼 거 없잖아? 여긴 일본이라고!


그래. 계산적인 거 맞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가끔씩 내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헷갈리기는 해.

근데 이제는 조선인도 일본인도 모두 한식구라더니, 막상 일본에 와보니 조선놈, 일본인 따로 있더라고. 그런데 뭣도 모르고 내가 조선인 이봉창으로 계속 살려고 했더니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 그럼 계속 일본인으로 행세하는 게 편하냐? 꼭 그렇지만도 않아.

일본인으로 살려고 해도 언제 또 조선인이라고 밝혀져서 저번처럼 피해를 입을까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냐.


아, 진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한번은 조선인 했다가, 일본인 했다를 반복해.

누가 좀 제대로 지도 해 줄 사람이 있다면 독립운동 하는 시늉이라도 한번 해 볼 텐데... 내가 독립운동하고 무슨 인연이 있기를 하나 연줄이 있기를 하나. 걍 아쉽지 뭐.


어찌어찌 해서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만 가고 새 직장에서는 언제부터 나올 거냐고 자꾸 물어보고, 남은 돈은 줄어만 가고...

-에라. 모르겠다. 이번에는 이봉창이 아니라 기노시타 쇼조, 비누가게 점원으로 새출발이다!


이렇게 된 거라고.

사람이 줏대가 없다고?

걍 지겹더라도 이봉창이는 원래 그런갑다 해 주면 좋겠어.

나라고 이름까지 바꿔가며 일본사람 흉내나 내면서 사는 게 마냥 즐거웠을까?

나도 다 살아보려고 그랬던 거야.

하여튼 그건 그렇고,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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