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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농락한 명나라 사기꾼, 모문룡.txt[BGM]
게시물ID : history_138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동물의피
추천 : 19
조회수 : 4673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4/02/03 09:40:42
 
영화 은행나무 침대 OST
 
 
 
 
 
 
 
 
 
 
 
 
 
[자료 출처]루리웹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etc/327/read?articleId=20045075&bbsId=G005&itemId=145&pageIndex=2
글쓴이:이미르 님
 
 
 
 
단 한 명의 외국인 사기꾼에게 온 나라가, 그것도 8년 동안이나 농락당했다면 믿겠는가? 너무 거짓말 같다고?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우리 역사에서 말이다.
 
이 대담무쌍한 사기꾼의 이름은 모문룡이라고 한다. 모문룡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580번이나 언급되는데, 그 횟수에서 이 희대의 파렴치범이 조선 중기의 역사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문룡은 본래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1620년 무렵, 북쪽인 요양 지방으로 옮겨가 살았다. 그러다 1621년 7월, 명나라에 반기를 든 후금이 군대를 보내 요양성을 함락시키자 명나라 백성들을 이끌고 동남쪽으로 탈출하여 조선의 의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보낸 후금군이 1621년 12월 15일, 의주를 경유하여 몰래 강을 건너 모문룡을 습격하자 모문룡은 관복을 벗어던지고 군사들 속에 들어가 섞여서 달아나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미처 모문룡을 따라오지 못한 부하들과 명나라 난민들은 후금군에게 속수무책으로 살육 당했다.
 
후금군을 피해 달아난 모문룡이 선택한 곳은 평안북도 서쪽의 작은 섬인 가도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는데,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싸우는 육군에만 치중하여 10년이 넘게 해군을 제대로 양성하지 못해 가도를 공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후금의 압력이 더욱 가중되자 이를 피해 조선 땅으로 넘어오는 명나라 백성들은 더욱 많아졌고, 모문룡은 그들을 상대로 “후금이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안전한 땅인 가도로 오라!”고 선전활동을 벌였다. 낮설고 외진 조선 땅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던 명나라 백성들은 그나마 같은 나라 사람인 모문룡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가도는 명나라 피난민들로 날마다 북적거렸다.
 
모문룡은 몰려오는 명나라 백성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고, 조선 조정을 상대로 온갖 행패를 부렸다. 또한 본국인 명나라를 상대로 자신이 데리고 있는 요동의 백성 2~30만 명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해마다 20만 냥의 은을 받아냈다. 그러면서 그 중 상당수를 당시 명나라의 실권자였던 환관 위충현의 일당들에게 뇌물로 바쳤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위충현 일당과 손을 잡고 자신을 지켜줄 연줄로 삼기 위한 조치였다.
 
은자 문제는 명에서 지원받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식량은 쉽지 않았다. 가도는 작은 섬이어서, 수만 명이나 되는 명나라 유민들을 먹여 살릴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문룡은 명나라 조정에서 받은 은자를 가지고 조선과 곡식을 맞바꾸는 무역을 했는데, 조선 측에서도 잇따른 흉년으로 인해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잘 지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모문룡은 부하들을 평안도와 황해도에 상륙시켜 식량을 구하기 위한 약탈을 자주 벌였다.
 
그나마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느라 모문룡에게 일방적으로 퍼주지 않았고, 때문에 모문룡은 별로 재미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대명사대를 외치며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가 집권하게 되자, 드디어 모문룡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치며 조선을 향해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하며 실컷 이권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모문룡의 행태를 본 조선 조정에서는 “과연 우리가 저런 모문룡을 믿을 수 있을까?”를 두고 심각한 논의가 벌어졌다.
1623년 10월 25일, 조선 조정에서 열린 회의에서 인조가 신하들을 향해 “혹시 후금(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을 침공했을 때, 모문룡이 과연 군사를 보내 우리를 지원해 줄 수 있을까?”하고 질문을 던지자 정구라는 신하는 “그가 거느리고 있는 것이 모두 오합지졸인데 어떻게 쓸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러한 정구의 말에 인조 역시 “명나라 군사가 이미 모두 사기를 잃어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넉넉지 못할 터인데 어떻게 우리를 지원할 수 있겠는가?”하고 한탄한다. 즉, 이미 조선에서도 모문룡 일당의 전투력에 대해서 의문이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모문룡 일당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약탈과 범죄 행각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하는 꼴이 마치 임진왜란 때,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던 명군의 모습 같다. <인조실록> 인조 2년(1624년) 1월 7일 기사를 보면, 모문룡이 군사들이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민가에 함부로 들어가 백성들이 키우는 가축들을 마구 잡아먹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 뜻밖의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모문룡을 간절히 타일러 자질이 불량한 자들을 가도에서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에게 모문룡 일당의 횡포는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보다 못한 의주 부윤 이완이 행패를 부리는 모문룡 일당 중 몇 명을 붙잡아 곤장을 치자 그들이 오히려 성을 내며 “너희들은 우리 명나라의 속국인 주제에 어디 감히 대국의 백성들에게 매를 치느냐!”하고 조선 조정에 격렬한 항의를 했다. 난감해진 조정에서는 이완의 관직을 한 등급 깎는 것으로 겨우 그들의 분노를 달래야 했다.
 
부하들에 못지않게 모문룡 자신도 채신없이 굴기는 마찬가지였다. 1624년 1월 22일에 일어났던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모문룡은 뒤늦게 조정에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선물을 보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나체의 여인을 상아에 조각하여 만든 춘의(春意)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누드 조각상인데, 개인 간에 주고받는 것도 아닌 일국의 행정부에 이런 음란성이 강한 물건을 선물로 보냈다니,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춘의를 받아든 승지 권진기는 모문룡의 무례한 작태를 꾸짖으며 다시 돌려보냈다고 한다.
 
나체 누드상을 선물로 보낼 정도로 경박했던 인물이니, 그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무렵 조선 측의 보고에 의하면 모문룡은 무기를 고치거나 군사 훈련도 전혀 하지 않았고, 후금과 한 번도 싸우지 않았으면서 18번을 이겼으며, 겨우 6명의 적군을 포획하고 나서 6만 명의 목을 얻었다고 명나라 본국에 거짓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모문룡은 있지도 않은 자신의 허위 공적을 날조한 책인 모대장전(毛大將傳)이라는 엉터리 책까지 펴내 주위에 뿌려 자신이 명나라를 위해 무슨 대단한 전공이라도 세운 것처럼 거짓말을 늘어놓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문룡은 더욱 더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말이 장군이지, 갈 곳 없는 난민과 부랑자들의 집합소에 불과한 가도를 맡고 있으면서도 모문룡은 자신이 조선을 다스리는 명나라 총독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의 부하인 모유견이 한 번은 한양의 왕궁에 들렀다가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문지기에게 제지되자 화가 나서 그대로 돌아가려 했다가 인조가 황급히 관원들을 불러 다시 오게 하여 부랴부랴 접견을 벌인 일도 있었다. 궁궐에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엄연한 예의인데 이런 기초적인 절차조차 무시한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모문룡의 행패를 근절시킬 수도 없었지만 이대로 계속 당하고 있는 것도 무척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인조와 조선 대신들을 경악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 모문룡이 가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고변이었다! 이 놀라운 사건을 폭로한 장본인은 예여청이란 사람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일단 모문룡이 가도 부근의 조선 백성들을 죽이고 상황을 파악한 다음 곧바로 한양으로 쳐들어가 한바탕 살육을 일삼은 후, 조선 왕실의 항복을 받아내려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이 밀지를 접한 인조와 대신들은 큰 충격을 받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모문룡의 조선 침탈 계획을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 병사에게 알리는 한편, 그가 후금에게 투항하거나 명나라 사신을 인질로 하여 조선을 공격할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아직 그가 정변을 일으키려 한다는 확실한 정황이 없으니 일단 병사를 정돈하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조선은 여전히 모문룡에게 막대한 양의 식량을 대주고 있었다. 1626년의 기록에 따르면 그 양이 무려 10만 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자국을 언제 침략할지 모르는 잠재적인 위험 요소에게 계속 지원을 해준다는 것이 우습지만, 명목상 모문룡은 명나라의 장수이니 그가 조선을 위협한다는 요인이 현실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를 함부로 대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모문룡의 반란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 지 6일 후인 같은 해 6월 17일, 모문룡은 편지를 보내 자신을 의심하는 조선에 대해 항의했다. 그 내용인즉슨, 나는 원래 성격이 솔직해서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고 지금 왕인 인조가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데 자신이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내가 뇌물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나는 성실하게 대했는데 끝내 이런 식으로 우롱을 당하다니 분하고 원통하다, 라는 요지였다.
 
얼핏 들으면 모문룡이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모문룡은 뒤로는 명나라 사신들에게 조선이 명나라를 버리고 후금과 손잡으려 한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비방을 늘어놓았다. 모문룡의 편지는 적반하장의 극치를 달리는 뻔뻔함이었다.
 
조선에서 엄청난 양의 곡식을 타내 얻어먹으면서도 모문룡은 명나라 조정을 상대로 로비를 하여 수십만 냥의 은자와 곡식을 더 받아갔다. 그 양이 해마다 늘어나 1626년에는 은자만 50만 냥에 달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조선의 비변사에서는 한 가지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요동 방면에서 후금군을 방어하는 명군 총사령관인 원숭환에게 모문룡이 저지르는 일들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당시 사악한 환관 위충현 일당들이 득세하고 있던 명나라 조정에서 원숭환은 보기 드물게 강직한 애국자로 평소부터 위충현 일당들을 매우 증오하고 있었다.
 
비변사에서는 이런 원숭환에게 “가도의 모문룡 군영의 수만 명은 오직 본국에서 먹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는데, 금년에 지급한 수효가 이미 15만 석이 넘었으니, 결코 지탱할 수 없는 형세이다.”라는 글을 넣은 편지를 보내자고 제안했으며, 인조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는 일과 동시에 아직 모문룡의 조선 침탈 여부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 상황이니 좀 더 모문룡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가도에 첩자를 보내 염탐토록 하는 한편, 모문룡의 군사 행동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알아보기 위해서 청룡산 일대에 군사를 정비하도록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아예 먼저 군사를 일으켜 모문룡을 공격해 근심거리를 없애자는 의견도 제시했지만, 인조는 “명나라 사람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왔는데, 분명하지 않은 일로써 경솔하게 손을 대는 것은 안 될 일이다.”라고 거부했다. 논리적으로 판단해 보면, 인조의 말이 맞다.
 
이런 논의가 오고갈 무렵인 1626년 9월 18일, 평안감사 윤훤은 한 통의 장계를 올렸는데 모문룡의 군사들 중 굶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아 그 시체가 가도에 즐비하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인조는 장만을 평안도 지역에 보내 정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다음 달인 10월 7일, 그는 돌아와서 윤훤과 같은 말을 했다. 더욱 놀란 것은 명나라 백성들이 그렇게 많이 굶주려 죽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모문룡은 그들을 명나라 본토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모문룡은 해마다 조선은 물론이고 명나라 본국에서도 막대한 곡식을 들여왔는데, 어째서 그의 근거지인 가도에서 저렇게 굶어죽는 명나라 백성들이 많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모문룡이 백성들에게 곡식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참상이 벌어질 수 있겠는가. 혹시 그는 조선과 명으로부터 곡식을 받은 다음, 그것을 후금에게 다시 팔아넘기는 방식의 밀무역을 벌인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모문룡은 왜 명나라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음에도 그들을 명나라 본토로 들여보내지 않으려 했을까? 명나라에서도 흉년과 반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조선보다는 사정이 나을 텐데.
 
그 이유는 모문룡이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방패막이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즉, 자신이 수만 명의 명나라 백성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워 조선과 명나라를 상대로 “이 사람들에게 먹일 곡식이 필요하니 나에게 보내라.”하고 말하며 막대한 양의 은자와 곡식을 받은 다음, 그것을 후금과의 밀무역으로 빼돌려 부정한 이익을 챙기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가도의 난민들은 모문룡에게 붙잡힌 인질이 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상, 그들을 계속 굶어죽게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모문룡이 횡포를 부린다지만 수만 명의 가도 난민들이 모두 굶어 죽게 했다가는 나중에 명나라 본국으로부터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 조정에서는 결국 모문룡에게 또다시 많은 양의 곡식을 제공하기로 한다. 당시 조선에서도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조선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문룡은 또 다시 편지를 보내어 조선 조정을 조롱했는데 조선 변방의 관리들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식으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도 전혀 없었고, 더욱이 끝에 가서는 자기가 다음 해에 명나라에 알려 그러한 역적(?)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없애겠다고 허풍을 늘어놓았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엉터리 편지였다. 모문룡은 이 편지를 통해 자신이 반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탈하려 한다는 말들에 대한 일종의 야유와 패러디(?)를 한 것이다.
 
해가 바뀐 1627년 1월 17일, 후금은 3만의 군사를 보내 조선을 침공하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전쟁이 터지자 인조와 대신들은 서둘러 대책 회의를 가졌는데 여기서도 모문룡이 언급된다. 개전 소식을 들은 인조가 처음 꺼낸 말은 “저들 후금 군사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인가?”였다.
 
모문룡이 가도에 머물면서 후금 내 명나라 백성들을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역할을 하여 후금에게 눈엣가시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별다른 무력이 없던 모문룡이 후금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지는 못했다. 인조의 저 말에는 ‘후금 군사들이 저 꼴보기 싫은 애물단지 모문룡을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심정이 은연중에 담겨 있었다.
 
이틀 후인 19일,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백성들에게 교서를 지어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밝히면서 “모문룡이 막대한 군량을 독촉하는 바람에 보내는 바람에 백성들이 곤궁에 빠지고 국고는 탕갈되었으니 이것이 내가 민심을 잃어버린 원인이 되었다.”라고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후금 군사들이 조선을 파죽지세로 유린하고 조선과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맺기로 하여 일단 전쟁은 끝났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이번 전쟁의 처리 여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말로만 오랑캐 후금을 정벌하겠다고 하다가 막상 전쟁이 터지자 한 명의 군사도 보내지 않고 조선의 위기를 수수방관만 하고 있던 모문룡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하냐는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가도에 틀어박혀 가만히 있다가 전쟁이 다 끝나자 모문룡은 군사를 보냈는데, 그가 보낸 군사들이 싸운 상대(?)는 다름 아닌 조선 백성들이었다.
 
1627년 4월 17일, 김기종이 조정에 보낸 장계에 따르면 용골 산성의 첩서를 가지고 오던 사람이 모문룡 군사에게 피살되었고, 후금군에 잡혀 있다 도망해 돌아온 조선 백성 수백 명도 역시 살해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 모문룡의 군사들이 안융창에 있는 피난민들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마구 죽여 그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며, 정주에 피난을 갔던 조선 백성 1만여 명도 공격하니 겁에 질린 백성들이 물에 뛰어들어 겨우 3백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비보까지 전해져왔다.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김여수에게 군사 1백 명을 주어 모문룡 일당의 잔인무도한 만행을 저지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살육을 하여 부득이하게 싸우는 일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런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러 놓고 모문룡은 참으로 뻔뻔하게 굴었는데, 5월 14일 조선 대신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조선 국왕과 한 집안 같은 사이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는 한편 모문룡은 조선에 윤훤, 이완, 정호, 남이흥 같은 음흉한 신하들이 많아 그들이 나랏일을 망치고 있다는 황당무계한 편지까지 보냈다. 그가 언급한 ‘음흉한 신하들’은 자신의 비리를 적발하여 조정에 보고했던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자들을 ‘음흉하다’며 모함하는 모문룡의 속내에서 진짜 ‘음흉한’ 자의 속내가 비춰진다. 그리고 일개 외국인 장수로서 조선 내부의 인사 문제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은 엄연한 내정간섭인데도 불구하고 모문룡은 자신이 한 말의 심각성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이런 말을 보낸 후, 모문룡은 군선 50척을 이끌고 의주로 향했다. 조선이 정묘호란을 당한 3개월 전에는 꿈쩍도 않던 모문룡이 전쟁이 다 끝난 지금에 와서야 새삼스럽게 군사를 의주로 보내겠다고 한다. 갑자기 용감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6월 16일, 김기종이 보낸 장계에 따르면 모문룡이 이끌던 군사들이 후금군 기병 20명을 만나자 무기를 버리고 군선에 올라타 모두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개중에는 배에 미처 타지 못해 물에 뛰어드는 병사들까지 있었다고 하니, 모문룡의 군사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전투력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꼴사나운 추태를 보였으면서도 모문룡은 7월 1일, 자신을 접대하는 조선 측 책임자인 이홍주에게 패문을 보내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과 심양으로 가서 후금군을 무찔러 1만 명을 죽인 대승을 거두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바로 한 달 전에 고작 후금군 20명을 만나자 겁을 먹고 정신없이 도망치던 모문룡의 군사가 무슨 수로 1만 명을 죽였단 말인가?
 
또, 4개월 전 조선이 후금의 침략을 당하던 때에 한 명의 군사도 보내 주지 않고 가도에 쥐 죽은 듯이 틀어박혀 있던 모문룡이 이제 와서 무슨 수로 그들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단 말인가? 자신이 당한 수치를 숨기려 한다지만 너무나 어이없는 처사이다.
 
모문룡은 조선에게서 곡식만이 아닌 인삼도 받기를 원했는데, 굶주린 가도의 난민들에게 인삼탕을 끓여 먹이려는 생각에서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인삼을 명나라의 고관이나 후금에 뇌물로 보내는 중계 무역에 이용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를 접견한 회례관 황호는 “남의 재물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탐하는 장사꾼과 같다.”라고 혹평했다.
 
황호가 “지금 조선도 국고가 탕진되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 줄 수 없다.”라고 거절하자 모문룡은 앙심을 품고 해가 바뀐 1628년 2월 26일, 조선 측 인사들에게 악담이 잔뜩 담긴 글을 보냈다. 내용인즉슨 자신이 밤에 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매우 불길한 징조가 있으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조선의 종묘사직이 멸망하는 재앙이 닥친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모문룡이 천문 관찰 운운한 부분은 사실상 조선에 대한 협박이다. 내가 한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너희 나라와 왕실이 망할 테니, 어디 한 번 두고 보라는 투의 공갈이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안하무인격으로 굴던 모문룡, 그러나 드디어 그의 운명에 먹구름이 드리울 징조가 나타난다. 1628년, 어리석은 명나라 황제 천계제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숭정제가 새로 즉위하면서 지금까지 명나라 조정의 실권자였던 환관 위충현이 몰락하고 말았다. 위충현은 모문룡으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그의 부정을 눈감아 주었는데, 그가 죽게 되자 자연스럽게 모문룡의 뒤를 봐주던 세력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숭중제는 환관 위충현에게 권력을 맡겨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형과는 달리,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던 인물이었다. 새롭게 개혁을 하여 나라를 쇄신해 보려던 숭정제에게 마침 모문룡의 일이 보고되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도 모문룡의 군대 2만 6천 명이 1년간 소비한 군량이 거의 10여만 석에 이르는데도 후금을 상대로 싸워서 잃어버린 요동의 땅을 한 치도 얻지 못했고, 국가의 재정을 이토록 허비하고 있으니 병부에 칙령을 내려 참작해서 처리하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동안 모문룡은 위충현 일당과 손을 잡고 뇌물을 바쳐, 조정의 눈을 속여 왔는데 이제 위충현 일파를 척결한 새 황제가 즉위했으니, 더 이상 그의 운명도 무사치 못하리라는 예상이 쉽게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문룡은 자신의 앞길은 전혀 살피지 못하고 조선을 상대로 더욱 더 심한 행패를 부리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실로 가련할 뿐이다.
 
1628년 10월 2일자 <인조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모문룡의 부하인 모유견 등 7인의 장수가 병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의주성 안으로 들어와 후금의 첩자를 찾겠다는 핑계를 대고 민가를 뒤져보고는 근처 고을을 노략질하자, 놀란 조선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보름 후인 17일에는 더욱 기가 막힌 기사가 나오는데, 모문룡이 역관(통역자) 장예충을 상대로 “후금이 나를 유예로 삼으려 한다.”라는 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모문룡이 언급한 ‘유예’라는 인물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북송 시절, 제남부의 장관을 지내고 있었는데 여진족의 금나라가 공격하자 항복하고, 금이 세운 괴뢰국인 대제국의 황제가 되었던 사람이다.
 
즉, 모문룡이 ‘후금이 나를 유예로 삼으려 한다.’고 한 말은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의 후금(청)이 자신을 꼭두각시 황제로 세우려고 한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상당히 오만하기까지 한 말이다. 그 말 속에는 조선의 임금은 물론이고 명나라의 황제마저 깎아내리는 방자함이 담겨있다.
 
이 말을 접한 인조는 매우 분개하여 “모문룡은 짐승과 다름없다. 황제 같은 지존에게도 꺼리는 바가 없는 자이니 예로써 책망할 수 없다. 그의 뜻을 보건대 이미 발호할 기미가 드러났다.”라고 탄식했다. 명나라 천계제가 사망했을 때, 모문룡은 가도에서 이 소식을 듣고도 풍악을 연주하며 주연을 벌였다고 한다. 엄연한 명나라의 신하인 모문룡으로서는 군주인 황제가 죽으면 음악과 잔치를 그치고 상복을 입고 제사에 임해야 하는데, 그는 이런 기초적인 절차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다.
 
같은 날인 17일자 기사에는 모문룡 일당들이 저지르는 행패가 더욱 상세하게 열거되는데, 모문룡의 부하인 유천총이 병사 2백을 이끌고 풍천에 와서 마을들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들을 욕보였다고 하며, 11월 22일에는 아예 사람을 시켜 명나라로 파견되는 조선의 사절단인 동지사 일행이 가진 은과 인삼까지 빼앗아 갔다고 한다. 모문룡은 한 나라의 외교 사절이 국가 간의 만남에 쓰일 선물마저도 멋대로 빼앗을 정도로 탐욕스럽고 사납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는지, 나중에는 모문룡의 하인인 왕학승이 같은 집 종 15명을 거느리고 평양 인근의 군현들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약탈을 하고 심지어 조선의 관원인 수령을 불법 구금하고 모독하기까지 했다. 정말 안하무인으로 횡포를 부리는 꼬락서니에 4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도 분통이 치민다.
 
이러한 모문룡 패거리의 포악질에 조정에서는 다시 한 번 대책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회의 내용에서도 별다른 해결책은 논의되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재상인 김류는 “모문룡이 저러는 것은 그의 천성이니 별 문제야 없지 않느냐.”라며 한가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인조는 1629년 3월, 특진관 이경직을 보내 모문룡의 본거지인 가도에 보내 그의 동정을 알아오게 한다. 가도를 방문하고 모문룡과 만난 이경직은 “그의 군세가 너무나 피폐해져 있으며 군대 수를 과장하고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면서 명나라에 거짓 보고나 올리고 있습니다. 도망쳐 온 명나라 백성들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와 붙어 있는 것이지 정말로 복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군율도 엉망이며, 병력과 장비도 전혀 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모문룡과 그가 해온 일의 진면목을 이보다 더 잘 말해주는 대목이 있을까?
 
그런데 1629년 4월 27일, 그동안 가도에 눌러 앉아 조선을 지겹게 하던 모문룡이 원숭환을 만나기 위해 산동 반도의 등주로 떠났다. 원숭환이 그와 만나 군사에 관련된 일을 논하려 한다고 소환한 것이다. 하지만 모문룡은 내심 원숭환이 두려웠는지 40척이나 되는 전함을 이끌고 나섰다.
 
주인이 없는데도 모문룡의 부하들은 평소에 하던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또다시 노략질을 저질렀다. <인조실록> 인조 7년(1629년) 5월 9일 기사에 따르면 모문룡의 부하 장수인 곡승은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산 등지로 가서 주민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하여 강변 일대가 시끄러웠다고 한다. 몇 번 재미를 본 도적질을 쉽게 끊기란 어려웠나 보다.
 
그건 그렇고 원숭환을 만나러 간 모문룡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문룡은 1629년 6월 5일, 2만 8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쌍도(雙島)로 향하여 이미 와있던 원숭환과 만난다. 쌍도에서 그와 만난 원숭환은 다음날 모문룡을 전격 체포하여 참수해 버렸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형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가 저지른 죄목들을 낱낱이 성토했다.
 
“장수가 외부에 있을 때는 문관의 감독을 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거부하였고, 있지도 않은 승전 사실을 조작하여 허위 보고를 했으며, 사사로이 시장을 열어 오랑캐(후금)와 내통하였으며, 상선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조선 백성들을 마구 죽여 이웃 나라에 피해를 끼쳤으며, 10년 동안 수만 석의 곡식을 받아 가면서도 한 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너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을 살려둬서 무엇에 쓰겠느냐?”
 
실로 추상같은 원숭환의 기세에 모문룡은 물론이고 그가 데려갔던 2만 8천 명의 부하들도 기가 죽어 누구 하나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숭환이 언급한 모문룡의 죄목은 모두 사실이었으니,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모문룡의 처형 소식은 곧바로 조선에 보고되었고, 얼마 안 가 원숭환 자신이 조선에 직접 사건의 내용을 서신으로 보낸다. 모문룡이 가도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인조의 덕분으로 호사를 누렸는데,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명나라에 수치를 끼쳤으니 자신이 황제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그를 제거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같은 명나라 사람인 원숭환이 직접 나서서 징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원숭환이 보기에도 모문룡은 가만히 놔둘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부류였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이로써 지난 수십 년 간 가도를 불법 점거하며 조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혀온 추악한 간상 모리배는 제거되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하나 생기는 데, 그동안 모문룡은 대체 조선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양곡을 받아 챙겼을까? <인조실록> 인조 7년(1629년)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관향사 성준구가 “모문룡에게 보낸 곡식이 모두 26만 8천 7백여 석입니다.”라고 보고한다.
 
임란의 피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개 사기꾼에게 저렇게 많은 곡식을 제공할 여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차라리 저 양곡을 국내의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이나 병사들에게 제공했다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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