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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그리고 민비란 명칭에 대한 집약과 설명
게시물ID : history_291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xtoo
추천 : 2
조회수 : 155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1/29 07:13:52
1.명성황후의 호칭에 대한 설명

명성황후에 대한 온,오프라인의 많은 논쟁들중 가장 대표적인 성격은 명성황후에 대한 

인물평이고 또 하나는 명성황후의 호칭에 대한 논쟁일것이다. 앞서 인물평에 대한 논

쟁은 많은 항목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니 생략하고 해당 항목에서는 그 호칭 논쟁에 대

해 여러 의문과 진실과 왜곡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한 결을 맺고자 한다.

이 논쟁의 시발점은 항상 이와 같다. 명성황후의 인물평에 대한 논쟁중 그 주장에 대

한 찬성파든 반대파든 어느 한쪽에서 명성황후 혹은 민비라고 자신들이 믿는 명칭을 

사용하면 으례 그렇듯 그 호칭의 잘잘못못 시비를 가르기 시작한다. 

명성황후를 긍정적으로 보는쪽과 부정적으로 보는쪽 그리고 그 가운대 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비단 역사를 전공했다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 의문을 

품지않고 자신이 옳다며 사생결단을 치루고 있으니 그 가운대 껴있는 일반인들의 시선

은 그 논쟁의 판정과는 별개로 항상 여론이 강항곳으로 이리저리 쏠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명성황후 긍정파는 이 문제에 대해 당연히 명성황후라 명칭하니 탈이 없겠으나 

어디서든 항상 문제는 명성황후 부정파들의 시각이다.

향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느말은 일제(식민시대)의 잔재이니 또 어느말은 알

고봤더니 우리말이더라. 닭도리탕 논쟁이 그러하다. 

이 닭도리탕과 명성황후가 무슨 관계고 하니, 여태 닭도리탕이 일본어 잔재인줄 알았

더니 우리말이라는 여론이 생기더라 이거 우리가 여태 명성황후의 명칭 '민비'는 일제

의 비하라고 배웠는데 가뜩이나 명성황후 싫은데 이것도 닭도리탕처럼 알고봤더니 일

제의 잔재가 아니라 우리말(실제로 일제강점 이전에 조선에서 쓰였던 말)아니야? 맞네 

맞어

대게는 그렇다. 또 이것이 닭도리탕처럼 실제로 일제의 잔재가 아니라면 응당 맞는 말

일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겠지.

해서 논쟁 시비가 일어났다. 그들은 일제시대 이전에 '민비'라고 쓰여진 사료를 찾아 

그 당위성을 입증해야 했다. 어느 사람은 사료를 찾는 노력을 했을태고 또 어느 사람

은 그저 남들이 옆에서 듣고 다시 또듣고 여러길레의 필터링을 거친 인터넷의 특정글

만 보고 그것을 맹신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단순히 조선왕조실록에서 달랑 '민비'만을 

검색하고 조선왕조실록(를 비롯한 한국사인터넷데이터베이스)에서 민비가 나오니까 옳

다구나 하면서 만족한다. 

틀렸다. 인터넷에 남아있는 이러한 논쟁의 기록들에서 저들이 주장했던 조선왕조실록

의 민비는 현대에 그것을 DB와 국역을 하면서 현대 학자들이 번역하며 주석을 달아놓

았던 그 '민비'라는 단어를 보고 흥분했더라.. 

당연히 조선왕조실록을 비롯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그 '민비'라는 원문은 찾을수가 

없다. 이걸 지적하니 그렇게 찾고 찾아서 내놓은 자료란게 중암문집,왜놈대장보거라,

매천야록등 이었는데 중암문집은 1912년(경술국치는 1910년) 간행되었고 그 저자는 김

평묵이란 사람으로 1891년에 이미 사망했다. 이중 '민비'란 단어가 행장(책 앞장에 간

행인이 쓰는 그 책 저자의 연대기를 주르륵 쓴 일종의 연표다)이 나오니 그 의미가 없

고, 왜놈대장보거라는 1934년 쓰여진 책이니 또 그 의미가 사라진다. 

남은건 매천야록인데 이 매천야록을 설명하기 앞서 매천야록에서 나온 '민비'란 단어

가 1910년 이전의 기록물인데 왜 일제의 잔재가 아니라는 입증증거가 안되는지에 대한 
배경설명이 필요할듯하다. 그래서 이 항목을 분리하여 설명코자 한다.



2.일제강점 이전 한반도에서 '민비'란 단어가 나올수도 나와선 안되는 이유

대한제국 혹은 조선 범위를 넓혀 한반도(한국) 대륙(중국) 열도(일본) 그리고 꼽사리

로 월남(배트남) 정도가 동아시아 중국의 한자,유교문화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단

이라 볼수 있고 그 동아시아 사상의 뿌리인 유교와 문자인 한자가 존재한다.
한반도의 왕조국가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그 토대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날수가 없

는데 왕조국가를 지탱해왔던 이 유교라는 종교 혹은 학문의 기원은 고대 전설에나 나

오는 하나라부터 은을 거쳐 주나라에 이르러 그 틀이 완성되기까지의 집대성한 역사라 

볼수 있고,불경 성경과 같은 유교의 경전 사서삼경또한 주나라때의 예의범절,법과 사

회 장례 왕제 제사까지 설명하는걸 시작으로 한다.

이중 본론에 규합하는 내용이 천자(혹은 다른말로 황제인데 이 황제란 명칭은 알다시

피 진시황제가 만들었던 명칭인데 후략 설명)에 대한 언급인데 천자 풀어말하면 하늘

의 아들 하늘이란뜻이 내포된만큼 또 고대의 사상에서 종교적인 단어다. 

제정이 분리된 시대에서 일치된 시대까지 이어지면서 종교지도자였던 제사장(주술사)

과 정치지도자였던 왕이 합일되면서 왕이 즉 하늘(신)의 아들이 하늘(신)에게 제사지

내는것을 천자라 풀이할수 있는데 비단 중국에서는 천자란 명칭이 있다면 고조선에서

는 단검(종교)왕검(정치)이란 개념이 있고 이 아래로 삼한(천군:종교,간:정치)에 이르

러 바다건너 일본의 덴노(천황,하늘의 황제)까지 제정의 같은 맥락이다.

보다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 크리스트교사의 성상파괴운동(신의 모습을 만들지 말라의 

맥락의 우상숭배 배척등) 이슬람의 우상숭배 금지등 원론적 내용과 불교의 불상(이것

역시 우상숭배)등으로 그 원류인 인도에서 부처의 모습(불상)이 금기시 했던점(역시 

원론적)과 마찬가지로 이 동아시아의 종교인 유교또한 이러한 원론적 측면이 있다.(우

상숭배) 즉 신성시하면서 그 천자와 관련된 모든것들은 금기시 하는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던 보편적 사상이었고 유교에서는 더 나아가 현대 지금에서도 우리가 

이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존재감이 현대에서도 그럴진대 그 원류인 그때에는 어땠겠는

가 생각하면 보다 이해하기 쉬울것이다.

'이름' 중요한 키워드가 나왔다. 유교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했다. 아니 유교뿐만 아니

라 전세계 인간이란 생명채가 문명을 시작하면서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던 떄가 있었겠

냐만, 유교 경전 예기 곡례 <상> 부분에 보다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천자의 이름에 대

한 피휘(그 이름과 같은 단어들을 바꾸는것따위를 일으키는말)와 부르는 법에 대해 자

세히 언급이 되어있는데 요컨데 천자 즉 황제의 이름을 쓰질 않는다는것이다.(위에 설

명한 금기에 대한 내용) 황제는 황제일뿐이지 그 무엇도 아니게 되는것이다. 이름뿐만 

아니라 그 황제의 성씨 즉 국성(나라의 성씨 당과 조선은 이씨고 명은 주씨고 고려는 

왕씨등)또한 철저히 피휘되어왔다. 

이것이 황제의 피휘에 대한 설명이고 그 직위의 순서에 따라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에 

해당하는 예법이나 백성들의 이름에 대한 예는 그 내용이 방대해 혹여 필요하다면 따

로 항목을 내어 설명하는것으로 갈음한다.

본론으로 돌아가 황제의 이름,피휘에 대한 설명이 납득이 되었다면 이것이 '민비'와 

무슨상관인지 설명코자 한다.

천자 다시 말해 황제의 상징은 예나 지금이나 용인데 그 용이든 황제는 혼자가 아니다

. 황제의 부인 황후(그 상징은 봉황)가 곁에 있다. 그 황후의 신분의 격은 황제와 동

일하다. 부부일심동체라 했던가 다시말해 저 위에 나열되어있는 황제의 예법은 남성에

서 여성으로 바뀔뿐 그대로 적용된다. 황제와 황후의 이름을 쓰질 않고 직위만을 말한

다. '민비'즉 성씨+직위란 명칭은 황제와 황후에겐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황제와 황후란 직위도 바로쓰지도 않았는지 황제 자신을 지칭하는 짐,신하가 지칭하는 

폐하(황제가 걷는 계단의 수와 명칭인 폐) 혹은 금,황,성상,주상 황후를 지칭하는 중

전,중궁전(中 황제가 사는 궁 중앙에 있는 건물에 산다하며)등 이렇듯 다양하게 파생

되어있다.

황실의 명칭에 대해 황제의 가계도를 보자
황제의 정실 황후,황제의 첩중 직위가 가장 높고 자신의 궁을 받은 첩 즉 후궁인 '황

비' 그 순서 아래로 '황빈'이 있고 아래로 계속 궁녀(황제의 여자)들의 직위가 존재한

다 이것이 내명부의 품계도이며

황제의 후계자인 황태자,태자가아닌 황자,황녀가 있으며 
황제의 형제를 친왕(친왕제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일본의 덴노가의 그것 그리고 우리가 

일제식민시절 겪어야 했던 그것) 즉 왕이라 불렀으며 
이 친왕가에서 또 내려가다 보면 왕의 정실 비, 왕의 첩 빈,왕의 후계자 세자,왕과 왕

비의 자식 왕자 왕녀 혹은 '대군',왕과 첩의 자식 왕자 혹은 '군' 왕의 형제들 이하 

동일 생략

이 대략적인 품계도인데 아까 지나가며 언급했던 진시황제가 황제란 명칭을 만든 이유

에 대해 설명을 안할수가 없다. 

앞서 말했든 하은주대까지의 천자란 명칭은 종교를 뜻했고 그 정치적인 명칭은 왕을 

뜻했다(결국 천자나 왕이나 같은사람을 가리키지만) 그러나 이것이 춘추전국시대를 거

치면서 기존에는 주나라를 위시한 아래 제후국들의 위계질서(군신관계,왕과 신하)가 

존재했다면(그래서 주나라가 천자와 왕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었을떄) 그 이후에는 그 

많은 제후국들이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왕으로 칭하면서 위계질서가 붕괴되고 찢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때에도 주나라가 멸망하기전까진 천자국(종교적 의미로써)의 직위와 

명분은 유지하였으나 빛좋은 개살구일뿐 일본 전국시대때 덴노의 위상과 흡사하다.

이 혼란을 진나라가 접수하며 그동안 많아져 흔해진 왕이란 명칭을 탈피하기 위해 새

로히 제정일치된 황제란 명칭을 만들었으니 이시점부터 비로소 천자와 황제가 동일한 

의미가 된다.

결국은 명칭의 변천사일뿐 황제>왕>제후,황후>왕비>부인등 계급(군신관계)는 변함이 

없는데 그러면 한반도 고려 혹은 조선은 중국의 신하인가?(혹은 속국인가?)에 대한 질

문은 필자가 답을 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아니다라고 외칠것이다.

짥막하게 설명하면 '외왕내제'란 키워드인데 앞서 말했듯 중국은 천자란 명칭이었고 

고조선은 단군왕검이란 명칭 고구려는 태왕(태양의 왕)등 천손사상에 맞춰 자신들만의 

고유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유교=율령이 한반도에 자리잡고 중국의 시스

템이 자기들 모습으로 탈바꿈하면서 적용되고 그 상황에서 당시 동아시아 국제 외교세

력간 밸런스에 의해 조정되는 모습또한 있다.쩃든 그 상황에서 한반도에서든 일본이든 

슈퍼갑 중국에서 쓰는 황제의 직위를 사용하는것에 대해 눈치가 보이는 실정이기도 하

고.(수양제대에 일본에서 중국으로 국서를 보내는데 그 국서의 내용이 일본을 황제로 

지칭해 보내는 바람에 그 국서를 들고간 사신이 기절초풍하여 그대로 문서를 들고 도

망간 일도 있다.)

일본은 바다건너 불구경이란 심정으로 그떄부터 열심히 황제국이라고 떠들며 지냈다지

만 중국이나 한반도나 뭐씹는 소리로 흘려들었을뿐이고 그마저도 덴노(제정일치)가 실

권하고 그 정권이 쇼군(사무라이,무신정권)으로 넘어가면서 쇼군을 일왕(제정분리)으

로 지칭하면서 유야무야넘어가게 된다 이것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전까지의 동아시아 

세계의 외교관이었다.

그러면 한반도 삼국시대를 넘어 통일신라-고려-조선은 어떠한가
황제를 지칭하지 않았을뿐 그 명칭을 섞어 자주국으로써 중국의 실 제후들과는 다르게 

사용하였다. 해서 고려사를 보면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되기 이전까지 황제국에서 쓰던 

종묘를 사용했으며 고려왕을 지칭하는 명사를 황제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황제

가 아닐뿐이지 그 유교의 피휘로써 모든것을 쓰였다. 해서 원나라 이전까지의 고려왕

계보를 보면 조선처럼 태조 혜종 정종 광종등을 쓰고 자신들만의 연호를 사용했고 거

기에 맞춰 왕실의 내명부 또한 황제국과 동일하였다. 고려왕의 정실은 '왕후' 고려왕

의 첩은 '왕비'

그리고 일부 고려의 왕후들의 성씨가 바뀐 흔적이 보이는데 그 왕후들의 본래 성씨가 

왕씨여서 외가의 성씨로 바꾼 사례다. 고려 왕사 초기에는 근친혼으로 이루어졌고 근

친혼 그리고 왕후의 성씨를 지우기 위해 왕후의 성씨를 외가(왕건의 혼인동맹으로 이

루어 졌던 지역유지들의 성씨)로 개성한다.

또 일본에서 고려로 보낸 외교문서에서 고려왕을 고려황제로 지칭한 사례도 존재한다.
(일본측의 실수이긴 하나 자신들의 왕도 천황이니 고려왕도 고려황제거니 같은 맥락)


이었던 고려였지만 몽골이 쳐들어왔다. 그 시점부터 고려에서 자주국으로 쓰던 황제들

의 명칭은 모두 저 위에서 그토록 설명한 중국 제후국의 명칭으로 '격하'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 [일제강점기 일제의 친왕 이왕가.]

그렇게 원나라를 거치면서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으로 새로히 시작한다.
대한제국>일제>대한민국으로 거치면서 대한제국을 복권한 대한민국과는 다르게 고려>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조선에서는 고려를 복권할 이유도 없고 해서도 안됬기때문에(역

성혁명의 당위성) 원나라간섭기떄부터의 고려왕사가 복권되질 않았다. 현대에 와서 저

시대의 왕들을 복권할곳이 있겠는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탄생이후 명나라와의 군신관계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조선에

서는 고려 원간섭기때의 명칭을 집어 던지고 고려 원간섭기 이전때 자주국이 쓰던 황

제의 명칭들을 쓰였다. 다만 이후 중국의 눈치떄문에 황제를 칭할수는 없었지만 중국

의 암묵적 방치와 예전부터 사용했다는 등의 변명조로 고려조와 마찬가지인 외왕내제

가 되었다. 그래도 눈치가 보였는지 왕의 정실을 생전에 왕비라고 지칭했다 사후 왕후

로 올린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왕에게 묘호를 주는것 역시 사후관례로 본듯

조선은 일부일처제 왕의 정실은 단 한명뿐이었고 자연스레 왕비가 왕후가 되는것이나 

이게 안되는 사례가 있으니 '폐비' 쫒겨난 장희빈이 그러했고 왕이 쫒겨나 폐비가 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사례가 그러했고 태종의 분노를 사 400여년동안 폐비가 된 태종의 

계비 신덕왕후가 그러하다.

태종실록을 비롯 400년동안 신덕왕후(강비,태종 이성계의 계비 2번째부인 왕자의 난의 

조연)가 복권되기 전까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확히 신덕왕후와 신의왕후(태종의 모 

태종 이성계의 정실)간의 명칭구분이 일어난다. 신의왕후는 '신의왕후'라고 표기한 방

면 신덕왕후는 '강비'로 표기되어있다. 앞서 말했듯 왕의 정실은 '왕후' 첩은 '왕비'

가 된다. 살다가 왕후로 죽었던 신덕왕후가 태종의 핏줄이 왕이 자리했던 조선에서 후

궁(첩)취급 받았던것이다. 

장희빈의 신세는 끝내 왕후로의 복권은 커녕 왕비조차 못되고 '빈첩'로써 겨우 복권한 

경종이었고

연산군,광해군 사례는 영원히 폐비로 기록만 될뿐이다.


이로써 조선시대에서 '민비' 즉 성씨+비 라는 용례가 명성황후에겐 맞지 않는다는것에 

대한 배경설명이 일단락 되었다. 

돌고돌아 민비를 주창하는자들이 가져온 사례중 유일하게 논란이 되는 매천야록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우선 매천야록을 설명하는 1장에서 밝히듯 1910년 매천야록 저자 황현의 사망이후 광

복이전까지 후손들이 필사하면서 후대로 비밀리에 보관해오다(그 매천야록에 수록된 

항일내용떄문에 일제에 의해 사라질까 두려워) 광복이후 그 필사본을 발견하여 첫 한

국사DB화 했고 그것이 지금의 매천야록이다.

매천야록에서 나오는 '민비'란 명칭은 크게 매천야록의 1894년 이전까지 기록인 일종

의 연표와 그 이후 황현의 사견이 남긴 일기로 구분짖는데 그중 갑오이전(1894년 이전

) 下권 8장 대왕대비조씨(신정왕후,헌종의 모)승하에 대한 기사이며 원문은
庚寅四月十七日丙辰, 大王大妃趙氏昇遐, 壽八十三, 諡曰神貞, 祔葬綏陵, 上于君人之德

, 無一允蹈, 而惟事大妃以孝謹聞, 然自閔妃預政以來, 大妃畏其氣㷔, 常斂避之, 又趙成

夏·寧夏等死, 私宗凋瘁, 益悲傷无聊, 國家禍變因仍, 其艱險萬狀, 皆備甞之, 甞對宮人

流涕, 歎不死。
내용은 신정왕후의 승하를 다룰뿐이다.
이 문장의 '민비'란 단어의 한건을 제와한 황현의 저서(매천야록,오하기문외 수많은 

저서)는 물론이고 조선내 모든기록을 통틀어 존재하질 않는데 황현본인또한 이 문장을 

제외한 자신의 저서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명성황후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위에서 설명

한 '중전,중궁전'등 극히 자연스러운 황제국에서 쓰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저 문장에 톡 튀어나온 '민비'란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는게 옳은가?
앞서 말했듯 '성씨+비'는 첩의 용법이었고 매천야록은 경술국치 이후 후손들의 필사본

이다. 

이걸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면 

1.황현 본인의 오기 

2.후손의 필사중의 오기 

3.황현 본인이 작성한 경우 대왕대비조씨 승하(신정왕후)내용상 유교예기 예법에 의한 

신정왕후 명성황후(윗사람 아랫사람간)의 압존법 

4. 황현 본인이 작성했고 실제로 '민비'란 명칭이 당대에 사용되었다

정도가 되는데 이중 4번의 사례는 조선 500년사의 무거운 반례와 중국과 일본의 교차

검증으로 그 신뢰가 성립되질 않는다.

이 4번의 사례에 대한 반증으로써 중국과 일본의 교차검증을 한것과 그 결과는

a.우선 중국측 기록인 명청실록과 조선왕조실록간 상호기록에서 조선과 중국의 명칭에 

대한 비교이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에서 '성씨+비'의 사례는 위와 같이 열거하였고 비

와 후의 별개로 구분점은 중국측과도 동일하다. 
예시로 중국의 황후는 황후로 표기하였으나 그 후궁은 x비로 표기하였고 중국측의 기

록에서는 조선왕과 왕비를 지칭하며 직접적으로 이왕으로 언급한다. 반대로 조선왕조

실록을 포함 조선쪽 기록에서 이왕이란 기록은 존재하질 않는다(외왕내제)

b.일본과 조선측의 교차검증이다. 일본과의 관계는 중국보다 매우 복잡하기 짝이 없는

데 우선 오랫동안 조선과 일본간의 서로 통상을 대마도를 거쳐 진행했는데 중국 조선 

일본등 이런 국가간의 국서(외교문서)는 상대적으로 원본을 찾기가 어려운데 다만 실

록등의 편찬기록물을 보면 대강의 내용은 파악할수가 있다. 

이중 조일간의 외교문서는 까다로운것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문서의 내용과 일

본에서 조선으로 보내는 문서의 내용이 상이하기 떄문이다. 주로 조선 혹은 일본측 지

칭하는 명사에 대한 부분인데 일본에서 계속 황제국을 지칭하면서 그 격을 왜곡하며 

보내는것을 중간에 낀 대마도주가 고생좀 했나보다 서로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것들을 

암묵적으로 묵인하에 대마도주의 국서위조사건이 여러차례 있어왔다. 그러던 와중 이 

서로간 오고가던 국서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때는 일본의 쇼군정치가 끝나고 메이

지유신 즉 제정이 분리된 상황에서 다시금 제정일치가 되면서 그 정권을 덴노:천황이 

가져가게 되면서다. 

기존에는 쇼군(일왕)의 명의로 발신되었던 국서가 덴노(천황)명의로 조선에 보내게 되

니 그 때가 1868년 운요호사건 직전이다. 이때 일본에서 보낸 국서의 내용중 황제를 

지칭하는 단어를 포함하여 여럿 이유로 당시 흥선대원군이 거부하니 그 빌미로 이후 

강화도조약까지 일어나게 되는데 이 국서를 보내게 된 배경에는 일본의 정한론대두 또

한 하나의 원인으로 보고있다. 쨋든 이러한 분위기에서 파악할수 있는 국서(외교문서)

의 황제지칭을 함으로써 국가간의 위계가 조선=일본에서 조선<일본으로 됨으로써 같이 

들어가는 외교적 수사또한 a케이스와 같이 중국이 조선에 보내던 양식으로 보내지니 (

즉 이왕이라 문서에 작성하면서) 국가간 상호존대하던 사이에서 갑자기 반말하는 상황

으로 바뀌는 외교적 결례가 된다. 또한 메이지유신 시점 전후로 일본내의 기록에서 조

선왕과 왕비를 지칭하는 명칭이 이와같이 바뀌게 된다. *일본 외무성쪽 기록을 포함한 

일본내 공공기관 문서를 DB한 아카이브에서 1870년대 조선주제 일본인이(문서성격상 

일본의 스파이)일본 자국으로 발신한 문서의 내용중에 '민비'란 단어가 등장하고 이 

사례가 '민비'란 단어 기록의 최초사례가 되며 이 기록을 필두로 일본내 기관,민간에

서 발행한 문서 혹은 책자등에서 명성황후의 명칭으로 '민비'를 쓰는것을 찾을수가 있

다. 일본 국회도서관 인터넷데이터베이스에서 가장 빠른 기록중 190x년대 초 일본인의 

조선여행기 에서 '민비릉'이란 명칭을 사용하는것을 찾을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때에 조선에서의 '민비'란 기록은 찾을수 없다.

이 검증에서 매천야록의 해석중 4번의 항목으로 위에 쌓인 증거들을 무시할수 있는가?

이 외교관계를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면  

중국=대기업회장 조선=중소하청기업사장 일본=조폭사체기업사장겸회장
조선이 중국의 하청일을 하긴 하지만 중국의 자회사는 아니기에 자기들끼리 회사를 운

영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조폭일하면서 민폐끼치면서 천대받던 일본이 자기직함은 

회장이고 조선은 사장이니까 내 밑이다 라고 하는 양상이다.



3.조선 왕사의 명칭 변천사

청일전쟁 그 이후의 갑오개혁으로 중국과의 군신관계가 끝나고 조선의 호칭법은 고려 

초기때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것이며 그 이후 대한제국 선포함으로써 

직접 황제라 칭했고 일본의 강제병합이후론 내선일체따위의 양상으로 황제국의 친왕가

로써 편입하게 된다. 앞서 설명한 고려 원나라간섭이후 그대로 멸망과 함께 조선이 등

장함으로써 고려후대의 왕사는 복권이 되질 않았지만 조선-대한제국의 경우 대한제국

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뀐것이 아닌 외세의 침략으로 그 국가적 지위를 잃었다가 후에 

다시 찾았고 또 그로 말미암아 대한제국대까지 복권과 계승을 하였기에 
친왕가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것은 당연한것이다.(이왕과 민비) 

이 사례와는 별개로 일본의 덴노명칭에 대한 한국내 논란에 대해서 작금 일본에서 명

성황후와 순정효,순명호황후의 명칭을 친왕가의 명칭 민비,윤비로 사용하고 있는 마당

에 대한민국에서 덴노의 명칭을 굳이 맞춰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만이 남는다.


4.기타 배경설명

a.피휘와 같은 맥락으로 왕조가 현대까지 이어져온 일본의 경우 그 덴노의 성씨를 사

용하질 않는다. 일본측의 설명을 빌어 만세일통이라 하는데 지금까지 역성혁명없는것

을 대단히 자부한다더라 이와 함께 현인신 즉 신에게 성씨는 불가불하며 근친혼이 아

닌 외부에서 덴노가로 들어오는 경우 (즉 혼인) 여성의 성씨를 삭제한다. 

지금 일본의 황후들의 표기법은 위와같이 일맥상통한다.이걸 잘 알고 또 해외 왕국을 

지칭할때 맞춰사용하는 일본에서 굳이 현대에 와서 명성황후의 명칭을 '민비'라고 사

용하는 이유에 대해 다들 짐작은 하시는지

b.동아시아에서 예로부터 본명의 사용은 꺼려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작명법이라든지 

아명은 천하게 지어야 오래 산다는등의 미신이 뒷받침하고 있는데 성씨 태명 아명 본

명 자,호 택호등 본명의 사용대신 사회에서 사용하는 이름과(여성의 경우 택호) 지인

들끼리 사용하는 이름등 명백히 구분을 하여 사용을 하였다.

왕실의 경우 여기에 더 나아가 존호(귀한이름)과 시호(사후 받는 이름)을 받았으며 생

전에 받아 사용하는 존호에 사후 그 존호와 더해서 내리는것이 시호(사후사용하는)이

다. 연산군 광해군의 연산과 광해란 이름은 그들의 본명이 아닌 '존호'이다.

여성의 경우 대게 그 본명을 알기가 어려운데 이름이란 것이 사회적 신분의 일종일때 

여성의 경우 결혼전이면 직계가족내에서는 아명을 쓸것이고(또한 그 본명을 따로 받았

는지 아닌지는 의문 족보에 여성의 이름을 적는경우는 없다고 표현할정도로 드물다)밖

으론 xx댁 애기씨,아씨였다 결혼후에는 택호(xx댁 혹은 신사임당 같은 당호명)를 쓰니 

본명을 알길이 없다. 이것에 이어져 명성황후의 본명에 대한 논란도 있는것이 일반적

으로 알려진 자영이란 이름은 1980년대 일개 소설에서 창작된 이름이 첫 기록이라 신

빙성이 없으며 조선시대 왕비들의 족보인 열성왕비세보에서 기록된 아영이란 이름이 

유력할 따름이다. 혹은 민치록,여흥민씨의 족보항렬을 토대로 그쪽 종친에서는 '정호'

가 아니었을까 언급하고있다.
 



5. 맺음


이번글을 끝으로 인터넷상에서의 명성황후 호칭논쟁에 대해 마무리를 지었으면 하지만 

인간이란게 그러하듯 이러한 소모적 논쟁이 끝날꺼라 생각치는 않는다. 다만 호칭에 

대해 어느정도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었다 평가하며 본문의 내용이 길어지면서 필자가 

생략한 부분 혹은 놓친 내용에 대해 질문 혹은 지적할것이 있다면 응당 받아들이며 다

만 당부가 있다면 본문에 나와있는데 다시금 똑같은 내용의 질문은 삼가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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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블로그에 작성된 내용을 그대로 옴겨온거라 문체가 평어체로 이루어졌습니다. 요 몇년간 해당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집약해서 하나의 짥막한 글로 작성하려다 보니 이것저것 빠듯하게 생각이 밀려와 본인이 생각하기에 다소 보완해야할 내용이 있다고 생각은 들지만 문체 다듬는것도 그렇고 논문도 아닌데 막상 치려하니 힘드네요. 

우선 주요 논점에 대해선 설명을 해 두었으며 해당 글의 주요점은 '민비'란 단어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것이지, 명성황후의 인물평에 대한 글은 아닌점을 미리 밝힙니다. 그에 대한 호불호의 논쟁은 이 '성씨+비'혹은 '이왕'의 사례와는 맞지 않으며 이것이 식민의 잔재냐 아니냐를 따질뿐입니다. 



출처 http://novamundi.egloos.com/4432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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