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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주의) 한국 진보와 정체성 정치학
게시물ID : sisa_10006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eunzehn
추천 : 2
조회수 : 32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2/06 14: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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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의당을 위시한 진보진영의 행보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많은 시민들이 공유하는 감정일 것입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희대의 재난이 국가의 신뢰도를 바닥까지 떨어뜨린지 1년. 이제 겨우 그 후폭풍으로부터 벗어나 재건이 시작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봉에 서야할 진보는 이상할 정도로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당장에 이번의 법인세 안건만 해도 정의당을 대표한다 할 수 있는 3인이 각각 반대/기권/기권을 던졌지요.

한편 해줬으면 하는 일에는 건성건성인 이 양반들이 좀 하지 말았으면 하는 일에는 또 지나치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페미니즘. 워마드의 강남역 시위에 알바노조가 참여한 것으로 시작해 SJ 레스토랑 건에서 점입가경을 보여주더니 현재는 완전히 한몸이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건이 무엇이 됐든간에 진보단체가 집회를 가졌다 하면 페미당당을 비롯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깃발을 찾아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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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러한 현상은 비교적 최근, 아무리 시기를 빨리 잡아도 2010년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진보진영 내에서 여성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동운동 라인에서는 80년대 운동권 특유의 마초주의 잔재가 드러나는 사례들이 종종 보이기도 했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 패러다임 시프트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유재일씨처럼 여성주의 카르텔의 암약으로 보는 분들도 있고, 80년대 마초 운동권 아재들의 죄의식의 발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허나 저는 이 일련의 현상을 철저하게 전략적인 체질전환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흐름이 북미의 리버럴 진영이 밟아온 행보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할 무렵 이런 이야기를 많이들 들으셨을겁니다.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인종주의가 작용했다는 점에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사실 이는 비단 백인들에게 국한된 문제도, 그들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지난 20년간 미국(과 캐나다)의 정치판 자체가 인종과 성별로 대표되는 개인의 정체성(identity)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의 장이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의 포스트 냉전 분위기 속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미국의 리버럴 진보주의자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공산권의 대폭망은 민주당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찬물을 끼얹었고, 클린턴 행정부도 여소야대의 의회 상황에서 정책적인 좌향좌를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90년대 특유의 미묘한 회의주의로 인해 뭔가 새로운 비전으로 대중을 사로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여기서 민주당이 착안한 것이 80년대 후반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다양한 소수자 인권운동이었습니다. 마침 3세대에 진입한 페미니즘은 성소수자 운동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흑인운동 역시 흑인여성운동이나 자연주의 흑인운동 등으로 다원화되던 참이었습니다. 민주당은 '소수자들의 대변자'라는 포지션을 잡아 정책이나 비전이 아닌 인종, 성별 등 개인이 느끼는 소속감과 정체성에 호소해 지지층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표현하자면 '제발 여자라면/흑인이라면/동성애자라면 민주당 찍읍시다'가 강력한 정치적 전략이 된 셈이죠. 이것이 바로 정체성 정치입니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두 가지의 호재로 인해 좌파 정치의 꽃으로 떠오르게 되는데, 하나는 조지 W 부시의 등장이고 또 하나는 소수자 집단의 분화 및 증식입니다. 부시와 체니를 비롯한 네오콘은 전통적/기독교적 가치를 긍정하면서 '소수자의 대변자' 민주당이 맞서 싸워야 할 명확한 '악'이 되어주었고, 동성애자, 무성애자,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등 갈수록 세분화되는 소수자 집단들은 정체성 정치학이 어필할 수 있는 폭넓은 토양을 제공해주었습니다(이 이면에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은 미국 젊은이들의 소속감에 대한 갈망이 강하게 작용했는데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따로 얘기해보겠습니다).


한편 이렇게 고공행진하던 정체성 정치학은 아이러니하게도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시대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부시라는 거대한 악의 축, 소수자들이 힘을 모아서 타도해야 할 '적'이 사라져버린 거죠. 그리고 하나의 깃발 하에 지지자들을 응집시켜주던 압제자가 사라지자 리버럴 진영은 아주 골때리는 선택을 합니다. 바로 '소수자'가 아닌 사람은 곧 '압제자'라는 기막히는 이분법을 시전한 것입니다. 백인, 남성, 이성애자들이 아주 은밀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유색인, 여성, 동성애자를 탄압하고 있다. 바야흐로 체계적인 압제(systemic oppression)가 진보의 새로운 키워드로 떠오르게 되고, 여기서부터 소위 말하는 'PC충'(현지에서는 social justice warrior, SJW라고들 부릅니다)의 광기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체계적 압제로부터 소수자들을 해방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리버럴 지지자들은 백인, 남성, 이성애자를 사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 속성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이 입이라도 열려 했다간 바로 'check your privilege!(네 특권을 생각하라!)'라는 일갈과 함께 재갈이 물려졌습니다. 심지어 백인+남성+이성애자라면? 그 어떤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든 발언권은 없다고 보면 되는 수준이었죠.

특히나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북미대륙 특유의 개인 감정 존중 문화가 아주 환장할 앙상블을 이루면서 '어떤 이유로든 소수자가 기분이 나쁘다면 비소수자가 유죄'라는 풍토가 보편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백인이 할로윈때 포카혼타스 분장을 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에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한 교수는 인종차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고,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사회과학 강사들이 보이콧을 당했으며 트랜스젠더 호칭 관련 논쟁을 학부생들에게 보여준 한 조교는 징계위원회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황당한 사건이 터질때마다 진보 지지자들은 '정의가 구현되었다!'며 손뼉을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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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정체성 정치의 폭주는 결국 한바퀴 돌아서 리버럴 진영의 뒷통수를 후려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었습니다. 트럼프가 한 일은 간단합니다. 그간 소수자에 해당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지 않았던 '백인'이라는 요소를 정체성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백인인게 뭐 어때서?'라는 물음으로 그간 SJW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애초에 힘든 삶을 살고 있었던 저소득 저학력층을 응집시킨 것이죠. 이것이 때아닌 21세기에 백인우월주의가 부활하게 된 연유입니다.

이렇게 트럼프가 지지세력을 끌어모으는동안 민주당의 지지층은 오히려 와해되었습니다. 왜냐? SJW들이 보수 지지자들보다도 같은 리버럴 진영의 백인, 남성, 이성애자들에게 더욱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일베보다도 오유가 페미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간 저 카테고리에 속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10년 이상의 시간동안 끊임없는 참회와 공개적 자아비판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나마 정체성 정치에 상대적으로 덜 연연하는 버니 샌더스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그마저도 힐러리 클린턴에게, 그것도 석연치 않은 방식으로 패배했죠. 그들은 이 시점에서 의욕을 잃었습니다. 트럼프를 막아야한다고는 하지만 그걸 외치는게 자신들을 10년간 쥐어박은 사람들이니 투표장에 나갈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이죠. 실제로 지난 미 대선은 트럼프의 선전이 아닌 힐러리의 졸전의 결과였습니다.


다시 한국 이야기로 돌아와봅시다. 미국 리버럴에게 있어 정체성 정치학은 결과적으로 독이 든 사과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좌파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고 20년의 시간동안 정치판을 지배해온 것 역시 사실입니다. 2017년 현재 기준으로도 '백인 정체성'이라는 변수가 하나 추가되었을 뿐, 미국 정계는 여전히 정책선거 따윈 뒷전으로 물러난 채 정체성 정치의 룰에 따라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독이 든 사과는 누구에게 가장 절실할까요? 좌파의 헤게모니를 가져오고자 하는 집단. 변두리 세력에서 벗어나 정치권의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집단. 바로 정의당과 민주당 일부에 자리잡은 운동권계 진보세력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정체성 정치가 10년 뒤에 부메랑으로 날아오든, 한국판 트럼프가 등판하든 그런건 별로 알 바가 아닙니다. 진보/중도까지만 휘어잡아도 지금에 비해 어마어마한 힘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은 단일민족까진 아니더라도 단일인종 국가에 가깝습니다. 즉 정체성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카드가 여성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으로 제한되는 셈이고, 이 두 분야는 현재 한국여성단체연합으로 대표되는 여성계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그들이 진보진영의 메인스트림으로 대두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며, 이는 20년 전 미국이 그랬던것처럼 한국의 정치지형을 자신들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전략적인 행보입니다. 그것도 이미 그 유효성이 충분히 입증된 필승전략이죠.

지금이야말로, 이럴 때일수록 시민들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망해가는 '좆진보'의 발악으로 웃어넘기기에는 걸려있는 가치들이 너무 중요합니다. Identity politics의 종착역은 결국 양극으로 치닫는 극단주의임을 이미 미국이 온 몸으로 보인 바 있습니다.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정책과 행동으로 말하는 진실한 정치를 지키기 위해 소위 '진보진영'의 소수자 프레임에서 경계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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