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통일이 좋아요 14 > 한국전쟁 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왜 죽였을까?(2)
14편은 “한국전쟁 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 왜 죽였을까?” 두번째 시간으로 동영상 자료를 통해 이승만 정부와 미국이 왜 이렇게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미군정은 해방후 남한의 대부분의 공장과 토지, 자본을 강제로 접수했다. 그리고 친일자본가를 관리인으로 임명하여 민중들의 재산을 빼앗아 반역자들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라디오 드라마 - 화순탄광의 전쟁 1] 해방군
2. 1946년 8월15일 해방기념대회에 참가하여 ‘완전한 독립과 더 많은 쌀’을 요구하는 민중들을 미군은 무참히 학살하였다.
[라디오 드라마 - 화순탄광의 전쟁 2] 너릿재
3. 미군정 점령의 역사 속에서 죽고 다쳤던 수많은 광부들의 이야기.
[라디오 드라마 - 화순탄광의 전쟁 3] 전쟁
4. 230만 굶주린 민중들의 항쟁의 역사
[대구MBC뉴스] 대구 10월항쟁 발생원인과 과제
5. 해방후 우리나라 지배층은 모두 친일파였다.
해방 후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했던 이유
6. 해방된 한반도의 혼란속에서 친일 부역자들은 생존을 위해 무슨일이든 할 수 있었다.
[해방 70돌 특집 다큐] 반.역.사 - 1부
7.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반공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다듣사 38강 - 반민특위3, 빨갱이가 된 독립투사
8. 우익테러단체 투입, 방화-소개-초토화전술, 민간인 대량살상전술
광복후 친일파들의 잔혹한 학살 범죄 - 좌파 빨갱이 사냥 1
1945년 8월. 나의 아버지는 스무살 이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36년간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감격의 눈물도 잠시.. 미국은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당연히 처단되어야 했을 친일세력들이 미군정과 함께 다시 남한을 지배했다. 식민지 해방을 위해 일제와 싸웠던 아버지는 또다시 미군정과 친일세력들과 싸웠다. 아버지의 많은 벗들이 죽어갔다. 그 주검위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분단세력들은 지금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정의는 그때 이미 죽었었다.
이승만, 친일세력들과 함께 추진된 미국의 분단정책은 민중들의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48년 4월 단독선거 반대, 친일파 처단, 통일정부수립을 외치며 일어난 제주항쟁은 식민시대가 분단시대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겪게된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제주항쟁의 진압과정에서 미군이 채택한 우익테러단체 투입, 방화-소개-초토화전술, 민간인 대량살상전술 등은 미국이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제3세계에서 동일하게 재현된 진압작전의 한 선례가 되었다. (발췌 : 광복후 친일파들의 잔혹한 학살 범죄)
정치적 학살, 이념적 학살, 집단살해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대부분 정치적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반공정권 또는 인민정권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적하에 정치적 반대자나 그 동조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었으므로 이념적 학살의 성격도 강하다. 한편 미군에 의한 직접 학살의 경우에는 인종차별적 성격도 짙게 깔려 있었다.
국민국가 수립 과정에서의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학살
학살은 또한 해방 이후의 국민국가 수립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폭력, 내전의 와중에 일어났고 내전 당사자들이 국가가 사실상 학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학살, 국가폭력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 냉전체제 수립 과정에서 한반도에 우익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미국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외세에 의한 학살의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반면에 전쟁에 개입한 중국군의 경우, 학살 사례가 거의 보고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미군과는 크게 대비된다.
자신의 친일 전력을 반공으로 포장하면서 야만적인 학살의 최전선에 나섰다.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또한 일제하 폭력체제의 연장이기도 했다. 1948년 여순사건을 빌미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식민지 지배의 기둥이던 치안유지법의 연장으로서, 일제 말의 사상범 통제정책을 답습, 강화한 것이었다. 계엄령과 예비구금, 사상전향제도 역시 일제의 유산으로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이 제도들을 불법으로 적용하여 학살을 뒷받침했다. 이승만 정권의 극우 반공주의는 ‘반공’이라면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고 공산주의는 완전 박멸해야 한다는 파시즘 논리의 극치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일제하의 억압기구인 일제 군대와 경찰을 그대로 살려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았고, 이들은 자신의 친일 전력을 반공으로 포장하면서 야만적인 학살의 최전선에 나섰다.
반공이 ‘국시’, ‘빨갱이’는 다른 인종?
종전 후 한국은 자유와 민주, 평등, 평화 같은 적극적 이념이 아니라 단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반공이 사실상 ‘국시’로 간주되는 단일 응집체가 되었다. 평등은 물론 통일과 평화와 민주와 자유라는 말까지도 불순한 말이 되었고, ‘평화통일’주장까지도 사상을 의심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수준의 맹신적 반공주의가 한반도의 남쪽을 휩쓸면서 사회 곳곳에 ‘레드 콤플렉스’가 굳게 뿌리내렸다.
김창룡이나 노덕술과 같은 친일파들이
이승만의 총애를 받은 이유는 이들이 좌익을 색출한다는 명분아래 이승만의 정적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친일파에게 독재자의 존재는 구원이었으며, 반대로 민주주의는 공포였다. 이것이 바로 사이비 공안세력의 탄생 배경이다.
종전 후에도 ‘빨갱이’는 거의 다른 인종으로 간주되었다.
이웃 부족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이 먹을 게 없어지는 사막지대 가뭄 때의 야만스런 부족들처럼, 종족이 다른 부족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먹어 치워버리는 식인종 부족들처럼, 이 땅의 우익들에게 빨갱이는 죽여도 괜찮고 고문을 하고 온갖 인권유린을 해도 괜찮은 다른 인종이었다. 그리고 이 땅의 민초들은 서슬 퍼런 그 기세에 눌러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했다. 심지어는 국가 범죄에 자신의 부모형제자매를 잃은 유족들까지도 자기 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거듭거듭 되뇌며 자신을 세뇌시켰다.
대한민국은 반공의 천국이 되었다.
대규모 집단학살과 뒤이어 정착한 맹신적 반공주의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랐다. 일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보신주의,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어심리,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가족주의, 사회 문제나 사회적 의무에 대한 무관심과 무소신과 무책임, 가진 자, 힘센 자에게 굴종하는 비굴함, 정도보다는 편법을 좇고 기만도 서슴지 않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영악한 물신숭배와 권력추구, 웬만한 인권유린에는 눈도 깜빡 안하는 극도의 인권 불감증, 극단적 잣대로 사상과 이념과 양심을 백안시하는 지적 풍조, 민주적 원칙과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 지역부터 전국까지 극우패거리들이 판치는 패권사회 등등이 모두 그 유산이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이렇듯 우리 사회를 불구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반공의 천국이 되었고, 이 나라에는 합리적 사고는 물론 중도적 사고조차도 설 땅이 없었다. 대다수의 대한민국인은 일종의 정신적 불구자였다.
한국전쟁은 일종의 '도박' 이었다.
한국전쟁은 해방공간의 난맥상을 세심하게 풀어내는 대신 일거에 폭력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 일종의 ‘도박’ 이었다. 그 책임에서는 북도, 남도,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서,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남쪽에는 극우반공체제의 기반이 굳혀졌으며, 미국은 여전히 남한의 강력한 후견자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유족회" 부분 발췌 http://coreawar.or.kr/xe/page_0201)
'100만명'이라는 민간인 대학살로 얻게 된 반공의 천국 대한민국. 그것은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요? 깨어있는 민중들에게는 살아있는 지옥이 되어 고통스런 시간이 주어졌고, 이는 사회 곳곳에 뿌리깊은 상처로 남아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미국에 빌붙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병들게 한 친일세력을 이제는 과감히 도려내어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우리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지지하고 응원해야겠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sunfull-movement/2211575854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