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봄이 온다고, 마냥 즐겁기만 하랴?
게시물ID : humorbest_14079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ynousia
추천 : 19
조회수 : 1899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7/04/03 23:23:03
원본글 작성시간 : 2017/04/03 19:57:54
옵션
  • 창작글
  • 외부펌금지

#51
또 그렇게 봄은 오는가 봅니다.
한결 매섭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웅숭그려가며 그 노기를 흩뜨릴 제, 자못 따스한 공기가 그 대기 속에서 새초롬히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대지 아래 잠잠히 잠들어 있던 새싹들은 덤불이나 등걸 틈새를 비집고 나와, 삐쭉, 새 낯을 틔워 내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방정맞게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는 뭇 짐승들 또한 그 위대한 자연의 순환을 실로 만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야흐로, 하얀 순백의 세상을 선사하곤 했던 겨울은 그렇게 시나브로 옅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겨우내 쥐 죽은 듯이 잠만 자대던 야옹이는 그런 새 날의 기운과 공명했는지, 어느새 언죽번죽 유난스러울 정도로 까탈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금 발정이 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야옹이를 중성화해야 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지금까지 2-3번 정도의 발정기를 거치면서 그 고민은 더욱더 번민이 되어 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발정기가 오면 당사자인 야옹이나 집사뿐만 아니라 주위 이웃사람들에게까지도 어느 정도 피해가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집사가 살고 있는 빌라는 꽤 지은 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방음이나 차음이 상당히 잘 되어 있었고, 또 그리 동물에게 인색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던 덕분으로 지금까지는 별 문제 없이 잘 지내올 수 있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앞날까지도 우리의 평화를 담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자식은 꼭 남들 다 자는 밤에 괴성을 질러대는 통에, 일단은 이웃 주민들은커녕 집사조차도 새벽에 잠을 깨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후로 쭉 같이 살려면 중성화 시술은 아무래도 필수일 것 같았습니다만, 문제는 아직까지도 야옹이의 향후 인생이 어떻게 될지 전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을 제대로 못 이룰지언정 여전히 집사의 생각으로는, 야옹이의 중성화 시술이 그리 탐탁하게 여겨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후로 쭉 같이 산다고 하더라도, 야옹이에게 처음 한두 번의 임신 기회는 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이런 순전히 자연주의적 배려에 대한 시도조차 뭇 반대 의견이나 부정적 시선이 따라다니는 것을 집사 또한 모르지 않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여러 가지 부정적 사항들과는 별개로, 아직까진, 이 한낱 맹물인 집사에게조차도, 임신과 출산은 자연이 선사한 선물이자 축복이며, 응당 기회가 되면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순전히 집사만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야옹이 또한 충분히 동의할 만한 생각이었습니다.
옆에서 발정 난 녀석의 눈을 보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동물병원으로 데려가 중성화 시술을 행하기보다는 수컷 단짝을 구해주는 게 더욱 맞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자연을 오롯이 인공적으로 꾸미고 있는 인간에게조차도 여전히 자연적인 일에 속해 있었습니다.
누가 발정 났다고 여자를 잡아다가 불임시술을 한단 말입니까? 
인간과 동물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래서 그에 따른 대처방안과 향후 생식 계획에 일정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본질적 의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다를 수 없다라는 것이 집사의 생각이었고 또 야옹이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어려운 길을 걷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야옹이에게 최소한 한 번 정도의 임신과 출산은 하게끔 하자라는 절충적 결론으로 도출되었던 것입니다.


옆에서 뒹굴거리고, 여기저기 긁어대고 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그 말도 못할 결핍, 욕망, 고통, 희열, 등등을 집사는 곰곰이 대리적으로나마 떠올려 보았습니다.
한때,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게 제1의 행복이라던, 어떤 회의주의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수한 생식적 욕망과 고통의 생채기들이 송곳 하나 때려 박을 길 없이 영혼과 육체에 갈겨넣은, 그 가없는 주홍글씨들이 무던히도 무겁고 버겁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을, 시공간을 달리하여 야옹이가 집사 옆에서 다시 한 번 더, 다르나마 비슷하게 겪고 있습니다.
손을 뻗어 그 녀석의 머리며, 등이며, 몸통을 부단히도 쓸어주었습니다.
너도 힘들겠구나, 야옹아.
야옹이의 눈이 이제는 게슴츠레, 고통에 겨운지, 희열에 겨운지, 그 농밀한 색정을 담고 집사를 향하고 있는데, 정작 집사는 야옹이에게 해 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다시금 손을 빠르게 놀리면서, 그 녀석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할 뿐이었습니다.
그러곤, 고통 속의 쾌락, 쾌락 속의 고통으로 온몸이 녹아날 그 녀석이 최대한 빨리 그 순간을 벗어나기만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주이상스를 말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피어나는, 아니, 고통 속에서야 비로소 피어나는, 그런 쾌락 말입니다.
그 주이상스를 절규하듯 원하는 생명들은 아직도 삶을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들일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만, 그럼에도 그런 생명들조차 그 주이상스를 한결같이 원하고 그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매우 난망하리라는 것 또한 거의 틀림없습니다.
심지어, 그 날개치듯 활짝 만개한 주이상스조차도 시나브로 시들고 썩어가는 꼴이란, 마치 신의 거룩한 지성소가 갉아먹히고 파괴되는 듯한 꼴볼견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조차 대면하고 직면한 채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차라리 그저, 그것을 뒤로 하고 눈돌린 채 삶을 흐릿하게 살아내라는 강렬한 유혹을 불러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쾌락은 쾌락일지언정, 그 쾌락이 번연히 피어나는 대지가 무수한 고통으로 점철돼 있다면야, 차라리 그 쾌락보다는 그 고통에 방점을 찍는 것이 더욱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엄혹한 주이상스란 쾌락을 바라기보다는, 잠잠한 영혼의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실전적이고 실용적인 삶의 노선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집사가 진작에 야옹이를 중성화했었던들, 이런 주이상스를 그 녀석은 굳이 맛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놓고는, 이제 와서 다시, 한사코 그 주이상스를 빨리 벗어나게 하려는 필사적 노력을 집사는 헛되이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옹이의 그 생식 본능을 - 얼마간이나마 - 막지 않으려고 다짐하면서도, 정작 그 본능이 표출될 때엔, 어떻게든 빨리 덮어버리려고 바둥거리는 이 모순.
그런 주이상스를 애초에 제거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이 선사한 임신과 출산의 축복, 그 생식의 장대한 드라마 속에서 주이상스는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어쭙잖게 하면서도, 정작 그런 주이상스 자체가 없는 한없이 편안한 삶을 무연히도 갈구하는 이 모순.
삶은 그 자체로 축복임을 무수히 확인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자 다짐하면서도, 차라리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제일 행복했을 것을, 왜 태어나서 이 고생인가 쓰디쓴 의문을 고통스럽게 뱉어대는 이 모순.  
그러니,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 거추장스러운 모순은 집사에게만 오로지 매어두고, 야옹이는 자신의 본능대로, 그 자연의 섭리대로, 훌훌 뛰어다닐 수 있게 되기만을,
그저 집사는 인간의 온갖 자질구레한 세계에 묶여 갈팡질팡거리게 놓아두고, 야옹이는 그 자신의 세계에서 자기 마음껏 훨훨 뛰어오를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IMG_1243 0000015574ms그림판.png


IMG_1243 0000004029ms그림판.png
    
    

  


출처 http://blog.naver.com/ha_eun_love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