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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께 이렇게 촌스럽고 미련한 순정을 드릴게요.
게시물ID : gomin_14111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청파동
추천 : 12
조회수 : 1234회
댓글수 : 23개
등록시간 : 2015/04/18 21: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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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씨가 참 좋아요. 오늘은 그래요.
벚꽃은 이미 지고 당신은 진작 나를 잊었어요.
하지만 내년에도 벚꽃은 필거에요. 그래서 나는 우리를 절대 잊지 못해요.
못 한다않는다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거 에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당신을 잊지 못하는 내가 끔찍하다면, 그건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님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지금 내 앞으로는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가 지나가요. 달그락 거리는 수레를 끌고요. 할머니 뒤로는 흔치 않은 베이지 색의 하늘이 보여요. 하늘 색깔이 저런 날도 있네요. 내가 저 나이가 되면, 내 기억의 수레도 텅텅 비어서 저렇게 요란한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백년의 세월을 넘어 어느 날 발견된 낡은 연애편지처럼, 언젠가는 이 글도 너에게 닿을까요? 써놓고 보니 너무도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나 원래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2.
그러니까, 오빠 이름 세 글자를 해석하면 숲에서 바라 본 하늘의 별이라는 뜻이네? 꼭 인디언 이름 같다!”라고 내가 놀라워했던 거 기억하나요. 내 이름은 고운 꽃송이라는 뜻이에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헤어지고 가끔 잠이 들어야 하는 날에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내가 있는 곳은 울창한 숲. 그 위로는 까만 밤하늘. 그리고 쏟아지는 별이 보인다고 상상했어요. 그런 상상을 하다보면 나는 내 이름처럼 보잘 것 없는 꽃송이가 돼요. 그게 너무 슬펐어요. 나는 아무리 드높게 자라도, 활짝 피어도 영원히 너한테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너는 나한테 너무나 큰 사람이었고, 이제는 멀리에 있기까지 한 사람까지 되어버렸어요.
 

3.
그대. 진솔한 사람이었어요. 늘 자신감 넘쳤지만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 아픈 사람이나 불쌍한 사람이 보이면 가까운 편의점 ATM에서 돈을 찾아 기부하는, 그런 따듯한 사람이었어요. 흔치 않은 과거의 문제로 힘들어했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삶을 사랑하는 사람. 여느 남자들처럼 축구와 맥주, 오아시스의 노래에 열광하고 가끔 술에 취해 운동화 한 짝을 잃어버려 난처해하던, 조금은 어이없이 웃기던 사람이었어요.
 

마주 앉아 있을 때면 턱을 괴고 미술품을 감상하듯 흐뭇하게 내 얼굴을 바라봤어요. 곤란하거나 난처할 때면 두 번째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긁적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보이는 오빠 손목의 볼록한 뼈를 무지무지 사랑했어요.
내가 이유 없이 엉엉 울 때면 따듯한 목소리로 오른손을 심장 근처에 대봐, 그러면 심장 박동이 느껴질 거야. 너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마.”라고 말해줬어요.
 

 

4.
왜 내게 울음을 그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는, 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나를 떠났나요.
 
 

5.
나는 아직까지도 잘 몰라요.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왜 내가 싫어졌는지.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니까,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살아요. 너는 나보다 늘 똑똑했으니까. 나보다 큰 사람이었으니까. 그 시간 속에서 너는 내게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이 와중에 참 신기하고도 웃긴 건, 지금 이런 내 마음이 노희경 작가의 어느 드라마 대사랑 완벽하게 똑같다는 거 에요. 세상에 이런 이별을 겪는 건 나 한 명 뿐은 아니구나 싶어서 어제는 좀 위로가 됐어요.)
 

아니. 사실은 너무나 잘 알아요. 어쩌면 당신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는데. 세상에 막 적응하기 시작하던 어린 남자였는데. 늘 보살펴주길 바라고 제 멋대로 구는 내가 얼마나 버거웠을까요. 난 왜 이렇게 어렸을까요. 왜 그 소중함을 이제야 깨달았을까요. 내가 너무 밉지만 한 때 네가 나를 사랑해 주었기에, 나는 제멋대로 망가질 수조차 없어. 혹시나, 언젠가, 망가진 내 모습을 보고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던 그 시간들조차 후회하면 어떻게 해요.
 

 

6.
나는 지금 daft punksomething about us를 듣고 있어요. 맞아요. 이 노래의 가사처럼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닐지도 몰라요. 혹시나 여전히 나를 싫어하는 오빠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나한테 또 한 번 질릴 수도 있겠죠. 아니 어쩌면 이 생애에서 나는 오빠에게 알맞은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래도 꼭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이 곳을 가르쳐 준건 당신이었으니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 희망이니까. 당신은 내게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가르쳐주었으니, 나는 당신께 이렇게 촌스럽고 미련한 순정을 드릴게요. Sally가 될게요. 밥도 잘 먹고 책도 많이 읽어서 우리 만났던 처음처럼 예뻐져 있을게요. 살아있을게요.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은 감히 할 수가 없으니 그립다고만 쓸래요.
 

 

우리 꼭 다시 만나요.
정말 많이 보고 싶어요.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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