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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서열 #1
게시물ID : panic_975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크리스마스
추천 : 10
조회수 : 89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1/02 20: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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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1
 
1988년 늦여름은 20년이란 세월이 지난 탓에 기억 속에서 희미해 졌지만, 여전히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한 순간에 바뀌어 버린 생활공간 때문이기도 했고, 그해 벌어진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서울을 떠나 비안에서 보낸 두 달은 잊어버릴 때가 되면 생생한 꿈이 되어 나를 다시 찾아왔다.
1988년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남들은 곧 고3이다, 수험이다 무언가 준비하느라 바빴지만, 그해 겨울 아빠를 따라 미국에 가는 것이 정해진 나는 하릴없이 집에서 책이나 볼 뿐이었다.
방학이 끝나기 3일 전, 엄마와 아빠는 어딘가 떠나려는 듯 짐을 챙기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여행인줄 알았지만, 이불, 식기 등을 챙기는 것을 보니 여행은 아닌 것 같았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나의 눈빛을 알아차린 듯 엄마는 볼멘소리로 아빠에게 불평을 했다.
꼭 진짜 가야 해요?”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짐을 챙겼다. 엄마는 그런 아빠의 눈치를 살피듯 먼지 묻은 손을 문지르며 아빠의 주위를 맴돌았다.
아니, 성우도 이제 곧 고3이고 성아도 갓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냥 미국 갈 때까지 서울에 있으면 안 돼요?”
엄마는 아빠가 역정이라도 낼까봐 조마조마해 하는 얼굴이었다. 아빠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짐을 챙겼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안도인지 체념인지 모를 작은 한숨을 내쉬고 식기가 든 상자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집 밖에는 작은 용달차가 서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지만, 엄마와 아빠 모두 내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용달 기사만이 비안까지 간다고 우리의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아빠 차를 타고 비안으로 내려갔다. 저녁 늦게 서울에서 출발한 우리는 다음날 새벽에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군데군데 발라진 석회 사이로 진흙이 보이는 낡은 시골집이었다.
차가 멈추자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집 안에서 남자 한 명이 뛰어 나왔다. 샛노란 전구 아래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잔뜩 나 있는 남자는 큰아버지였다. 사업이 망했다는 소식 이후로 종적을 감춘 큰아버지가 낡은 시골집에 살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아빠를 보자마자 두 손을 움켜잡고 목이 메는 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아빠는 나와 동생이 신경 쓰이는 듯 차에 타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형제간에 돕고 살아야죠. 얼른 올라가세요.”
엄마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빠의 역정에 마지못해 차에서 내려 인사를 했다. 큰아버지는 몇 번이고 아빠와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빠는 큰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는 삐걱거리는 창호지 문을 열고 한 사람을 부축해 나왔다.
큰어머니였다.
.”
나는 큰어머니를 보자마자 뒤로 한 발 물러선 채 코를 막았다. 입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을 간신히 틀어막고, 놀란 눈으로 큰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버릇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큰아버지는 내 시선을 피했다. 엄마 역시 꽤나 놀란 표정으로 큰어머니를 바라보았지만, 곧 달려가 계단 내려오는 것을 부축했다.
큰어머니의 몸에서는 한여름 오징어가 썩는 것 같은 야릇한 냄새가 났다. 초점이 없는 눈은 어디를 보는지 마구 흔들렸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쾌활하고 사람 좋던 큰어머니의 충격적인 모습에 나는 선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세 사람이 큰어머니를 모시고 차문을 열었다. 아빠가 큰어머니를 거의 안듯이 들어 올린 순간, 차 뒤에서 쩔그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묶여 있던 것이 움직이면서 끌리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하얀 달빛 아래 그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것은 목에 쇠사슬을 매단 커다란 개였다. 아빠와 큰아버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오로지 큰어머니를 조수석에 앉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엄마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차 뒤에 가려 있던 개와 시선이 마주쳤다. 쇠사슬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개는 엄마를 발견하자마자, 새하얀 이빨에 침을 흘리면서 달려들었다.
쇠사슬이 쩔그렁거리면서 팽팽해지는 소리가 나고, 개는 미친 듯이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아이고고고, 아이고.”
깜짝 놀란 엄마는 바닥에 넘어져 뒷걸음질 치면서 비명을 질렀다. 큰어머니를 조수석에 앉히던 아빠와 큰아버지는 엄마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 빌어먹을 개/새/끼가.”
큰어머니의 다리를 잡고 있던 큰아버지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옆에 있던 부지깽이를 잡아 개에게 달려갔다.
이 개/새/끼가 평소에는 조용하더니 오늘은 또 왜 지랄이야?”
사정없이 휘두르는 부지깽이에 얻어맞은 개는 깨갱거리며 후다닥 자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빠는 큰어머니를 조수석에 앉힌 뒤 문을 닫고 엄마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엄마는 아직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가슴을 부여잡고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수씨.”
큰아버지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개집을 몇 번을 더 내려치고는 엄마에게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얼른 올라가시죠.”
큰아버지는 아빠로부터 열쇠를 받아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뒷좌석에서 자고 있는 동생을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동생은 아직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큰아버지는 다시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을 한 뒤 아빠의 차를 타고 집을 떠났다. 엄마는 아직 개가 뛰어 나올까봐 무서운지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열린 방문 사이로 큰어머니 몸에서 나던 야릇한 냄새가 다시 흘러 나왔다.
큰아버지는 원래 방직회사를 운영했다. 수출 사기를 당하기 전까지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던 큰아버지는 하루아침에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일 년에 두 번 꼬박꼬박 만났던 가족모임에도 나오지 않고 종적을 감췄다.
그런 큰아버지가 여름방학이 끝나기 얼마 전 아빠에게 연락을 했다. 큰어머니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큰아버지는 더 이상 가망은 없지만, 큰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고 아빠에게 말했다.
큰어머니는 언젠가 큰아버지가 다시 사업을 일으켜 가족끼리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빠는 가족들 중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뒷바라지를 해준 큰아버지에 대한 보답이었다.
아빠는 미국에 가기 전까지 휴직을 했다. 그리고 원래 살던 집과, 차를 모두 큰아버지에게 빌려준 뒤 우리를 데리고 비안에 내려왔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부자리를 피면서 엄마는 계속 한숨을 쉬었다. 큰어머니와 아버지가 살던 방은 지독한 냄새 때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기에, 옆에 있던 방을 사용했다.
미국 갈 때까지만 참아.”
무려 3개월이에요. 3개월 동안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아요? 애들은 또 어쩌구요?”
엄마가 따지듯 아빠에게 화를 냈다. 동생은 이미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3개월 걸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그리고 아빠는 자리에 누웠다. 아빠는 말을 하기 전 망설인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엄마는 여전히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누웠다.
그날 밤 나는 밤새 개가 짖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동생이 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친구들과 놀러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빨리 집으로 보내달라는 투정 섞인 울음이었다. 엄마가 이제 여기가 집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동생은 막무가내로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방 밖으로 나가자 어제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던 개가 집 밖에서 엎드려 있었다. 순간 오금이 저려 한 걸음 물러섰지만, 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당에는 수탉과 암탉 몇 마리가 걸어 다니고 있었다.
, 화장실.”
나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다리에 힘을 주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아빠는 무슨 일인지 이해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바깥에 있는 창고를 가리켰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 급한 마음에 창고로 달려가자,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다 썩어가는 판자로 겨우 가려놓은 화장실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린내가 뿜어져 나왔다.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안으로 뛰어 들어 지퍼를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오줌이 쏟아져 나왔다. 굵은 오줌발에 오래된 똥들이 파헤쳐지면서 기분 나쁜 냄새가 올라왔다. 코를 막고 변기 안을 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며 오줌을 털어 냈다.
, 으아악.”
고개를 돌린 곳에는 커다란 거미가 한 마리 있었다. 거미는 방금 잡은 사마귀를 몸에서 나온 거미줄로 돌돌 말아 뜯어 먹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마귀의 고통스러운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느낌을 받으며 지퍼도 잠그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화장실 앞 웅덩이에서 물이 튀어 신발이 더러워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방 가까이 도착해 겨우 숨을 돌리자, 이번에는 쇠사슬에 묶여 있던 개가 내 쪽을 바라보며 짖기 시작했다.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쇠사슬을 팽팽하게 끌며 위협적으로 짖었다.
이 녀석. 조용히 안 해?”
아빠가 방에서 나와 소리를 쳤지만, 개는 짖는 것을 멈출 줄 몰랐다. 저녁에 큰아버지가 휘둘렀던 부지깽이를 들자, 그제야 꼬리를 말고 집으로 들어갔다.
 
동생은 한참의 설명 끝에 자신이 이곳 비안으로 이사를 왔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조금 있으면 미국 갈 거니까, 그때 까지만 참으렴.”
엄마의 말에 동생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침밥을 먹고 화장실에 갈 때 쯤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따라가 달랬지만, 동생은 자리에 주저앉아 서울로 가고 싶다고 계속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나는 아빠를 따라 마을로 나갔다. 아빠는 내게 학교의 위치, 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보건소, 집까지 오는 길 등 마을 곳곳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집에 오기 전 음료수를 사서 다른 집에 들렀다.
대부분이 석회와 진흙을 이용해 만든 집이었지만, 아빠가 들린 곳은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옥이었다.
뉘쇼?”
아빠의 방문에 문을 열어 준 것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였다. 아빠와 비슷한 연배 같았지만, 조금 늘어진 볼 살과 툭 튀어 나온 입이 묘하게 경박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제 새로 이사 온 기형철이라고 합니다.”
, 기형철 씨. 기형철 씨. 가만, 기형철 씨라고 하면 기형민씨 동생 아니신가?”
아빠의 이름을 몇 번 되뇌던 남자는 이제야 누군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맞습니다. 형님은 형수님 문제로 잠시 서울에 올라가셨고, 그동안 제가 잠깐 집에서 지내게 됐습니다.”
, 그러시오?”
남자는 퉁명스러운 표정이었다. 귀찮게 왜 찾아 왔냐는 기색이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제 곧 방학도 끝나는데, 아들 녀석 인사도 시킬 겸 해서 겸사겸사 찾아 왔습니다.”
나는 아빠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이 녀석. 제대로 인사 해야지. 죄송합니다. 애가 낯가림이 많아서요.”
아빠는 나를 나무라며 방금 전 산 음료수를 남자에게 건넸다.
, 이런 걸 다.”
남자는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로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서는 안을 보았다. 나는 순간 남자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하하,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아닙니다. 작은 성의입니다. 넣어 두시지요.”
아빠의 말에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그래요. 그럼 아드님 이름이 뭡니까?”
방금 전까지와 다른 분위기에 나는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기성우라고 합니다.”
, 똑똑하게 생겼군요. 잘 알겠습니다.”
남자는 거칠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아빠가 내 팔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빠는 마지막까지 공손히 남자에게 인사를 한 뒤, 문을 닫았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아빠는 방금 전 남자가 내 새로운 담임선생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서울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조금 의문스러웠지만, 따로 이유는 묻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마당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동생과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엄마가 보였다. 동생은 아빠를 보자 더 서럽게 울었고, 엄마는 이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걸어 들어가자 동생이 우는 뒤쪽으로 개가 잠들어 있었다. 그 주변에는 겁 없는 닭들이 개 밥그릇 안에 남은 밥풀을 쪼아 먹고 있었다.
아빠가 우는 동생을 달래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였지만, 개 이름은 순돌이라고 했다. 누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딱히 부를 이름이 없었으므로 우리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큰아버지의 집에는 텔레비전, 라디오 등 우리가 평소 사용하던 가전제품이 아무 것도 없었다. 동생은 이제 울 힘이 없어서 그런지, 오늘 하루 너무 많이 놀라서 그런지 반 포기한 상태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엄마는 냉장고 상태가 좋지 않으니, 너무 작으니 하는 불만을 털어 놓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선풍기였다. 늦여름의 더위는 한밤중까지 계속 되었고, 우리는 끈적거리는 더위에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었다. 마을에 있는 유일한 전파상은 몸이 아파 당분간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차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선풍기를 사러 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방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잠에서 깼다. 옆을 보니 엄마와 아빠, 동생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누워 참으려고 했지만, 아래쪽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하지만 도저히 혼자 그 안에 들어 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신발을 신고 화장실 앞까지 다가간 다음,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지퍼를 내려 거름더미에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하아.”
아랫배가 시원해지면서 한숨이 나왔다. 동생이 워낙 극성이라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하루빨리 미국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오줌을 털어내고 지퍼를 닫았다. 화장실에서 몸을 돌려 방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오줌을 누고 있는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해서 바라본 순돌이도 자고 있었다. 쇠사슬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확실히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새벽녘의 서늘한 공기를 타고 내 심장소리가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확인 할 필요가 없다고 머릿속에서 마구 외쳤지만, 나는 홀린 듯 화장실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화장실 옆에는 2층으로 된 토끼장이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내가 방으로 들어가려고 다시 몸을 돌리자, 무언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토끼장 쪽이었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뒤를 돌아 토끼장 쪽을 바라보았다. 토끼장 1층에서 삐걱 소리를 내며 닭이 한 마리 걸어 나왔다. 어딘가 불편한 듯 절뚝거리며 걷는 닭은 나와 마찬가지로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본 뒤 거름 더미를 쪼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부리로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를 잡아 다시 토끼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 토끼장 앞에 선 뒤, 엉성하게 감아놓은 철사 사이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안쪽에는 닭이 두 마리 있었다. 방금 전 발을 절뚝이던 닭이 척 보기에도 아파보이는 다른 닭에게 지렁이를 먹여주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나는 무서운 것도 잊은 채 계속해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닭은 한쪽 발로 지렁이를 잡고, 부리로 조금씩 뜯어 그것을 다른 닭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중간 중간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전혀 경계하지 않는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다시 지렁이를 뜯었다. 그때 짤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순돌이가 일어났다. 퍼뜩 정신이 들어 일어나 보니, 순돌이가 이쪽을 보고 짖고 있었다. 닭은 경계하듯 토끼장 바깥의 상황을 살폈지만, 순돌이가 묶여 있다는 것을 확인 하더니 다시 들어가 버렸다.
순돌이가 짖는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화장실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계속해서 순돌이가 짖었지만, 아버지나 큰아버지처럼 부지깽이를 들 마음은 없었다. 다시 방에 들어온 나는 새벽의 찬 공기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동생은 교복이 너무 크다고 울기 시작했다. 조금만 지나면 새 교복이 나올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참으라고 엄마가 말했지만 아침밥을 먹는 내내 동생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내가 받은 교복은 동생 보다 상황이 나았지만, 그래도 내 몸에 비하면 훨씬 컸다. 당장 교복을 맞출 시간이 없어서 엄마가 주변 이웃들에게 빌려온 교복이었다.
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형태로,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시설은 같이 사용했다.
개학 후 첫 조례가 시작되고, 며칠 전 아빠와 함께 만났던 선생이 나를 불러 소개를 했다.
아빠가 서울에서 좋은 회사를 다닌다느니, 곧 미국으로 갈 테니 미리 알아두라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와 다른 교과서를 사용했기에, 수업이 시작되기 전 일단 쓸 수 있는 노트와 필기구만 책상에 올려놓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누군가 내 머리를 때렸다.
인상을 찌푸리며 올려보자 거기에는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있었다. 첫 눈에 봐도 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 무리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고 입을 열자, 맨 앞에 있던 남학생이 내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나보다 머리 한 개 이상 더 큰 남학생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 마구 흔들어 댔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옆에 있던 다른 남학생들은 태도가 건방지다면서 내 옆구리와 배를 쿡쿡 쑤셔 댔다.
숨이 막혀 캑캑거리자 남학생들이 한바탕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줄 몰라 팔을 버둥거렸지만, 그들은 나를 놔주지 않았다.
야이 새끼들아!”
별안간 교실 문이 열리면서 담임선생이 들어왔다. 선생은 손에 들고 있던 목검으로 내 앞에 있던 남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흥분 했는지 왼손에 들고 있던 출석부도 떨어뜨린 채 두 손으로 목검을 들고 남학생들을 마구 때렸다. 담임선생의 갑작스런 등장에 나는 겨우 나를 붙잡던 남학생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었다. 계속해서 기침이 나왔다.
담임선생은 들고 있는 목검으로, 구둣발로 남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서는 다 따라 나오라는 말을 하고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무리는 저마다 나를 노려보았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밖으로 나갔다. 남학생 무리가 나가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던 주변이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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