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물을 다 퍼고 내려오니 사격장 아래 후임이 있었다. 무서워서 올라오지는 못해도, 착실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새삼 소리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여섯시 반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사격장 관리관은 벌써 퇴근한 뒤였다.
“PX나 가자.”
머뭇거리던 후임은 내 뒤를 따라 쭈뼛거리며 걸어왔다.
“아무거나 먹고 싶은 거 사. 내가 사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오후의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아직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말을 꺼냈다.
“야, 너 오늘 오후에 이야기 했던 거….”
“서 병장님도 보셨습니까?”
후임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아…, 어. 근데 너 그러면 왜 여태까지 이야기 안 했냐?”
“그게…, 확실한 게 아니라서.”
“아니 확실하든 아니든 어떤 일이 있으면 보고를 해 줘야 알 것 아냐. 그래야 오늘처럼 소리 지를 일도 없지.”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건데.”
문득 그 귀신이 후임에게만 보이고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군번으로 따지자면 내 선임들도 봤어야 정상이었다.
“혹시 키 커다랗고….”
“네, 특급전사 하고 싶다는 유령이었습니다.”
오후에 봤던 그 녀석이었다.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습니까?”
“너는 뭐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저는 무서워서 이야기를 듣다가 그냥 내려왔습니다. 근데 항상 갈 때마다 나타나서….”
“소원 안 풀어주면 평생 저기서 저럴 것 같은 기세던데.”
“죄송합니다….”
“아니, 니가 죄송할 건 없고….”
“그러면 혹시 어떻게 해 주기로 하셨습니까?”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들고 있던 햄버거를 한 입 베물었다.
후임을 먼저 보내고 지휘통제실 옆 작전과에 들렀다. 작전과에는 작전병이 아직 못다 한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간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작전병에게 다가갔다.
“바쁘냐?”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작전병은 당황한 것 같은 눈치였다.
“아, 아닙니다. 바쁘진 않은데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그냥. 내일 사격 어떻게 되어 있는지 좀 보려고.”
여태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기에, 작전병은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 우리도 이런 거 좀 확인하고 해야 사격장 준비할 수 있는 거야. 뭘 그런 눈초리로 보냐.”
내 핀잔에 작전병은 다음날 사격 편성 된 것을 보여줬다.
“96명이네? 어차피 탄은 좀 넉넉하게 가져 갈거고.”
“네. 내일은 근데 측정사격이라 정확하게 가져 갈 겁니다.”
“그래?”
“그러면 탄 40발만 추가해 줘라.”
나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작전병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표정으로 보아, 자살, 무장탈영, 총기난사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인마. 탄 빼돌리겠다는 게 아니라 내일 우리도 사격 할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야.”
평소 사격이랑은 담을 쌓고 사는 주제에,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나도 부대 뜨기 전에 특급전사 한 번 해 봐야 될 거 아니냐.”
“아…, 예.”
나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작전병에게 어느 정도 먹혀든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 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이거 탄발수 변경 하려면 작전장교님 허락 맡아야….”
“어차피 1,920발을 올리든, 1,960발을 올리든 신경 안 쓸 거 아냐. 없어지면 문제가 되는 거지, 좀 더 가져간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지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작전병에게 건네주었다. 최후의 수단이었다.
“뭡니까 이게?”
“3일짜리 휴가증. 뒤에 이름 안 적혀 있는 거야.”
작전병의 얼굴이 갑자기 환하게 바뀌는 것이 보였다.
“이거 제가 써도 되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작전과에서 돌아온 뒤 샤워를 하고 생활관에 돌아왔다. 그리고 먼저 생활관에 돌아온 후임과 함께 내일 작전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내일 총 96명이 사격이야. 탄은 40발 추가해 놨고.”
“8명씩 사격하면 12조 사격 아닙니까? 저희 두 명만 따로 빠져서 사격 합니까?”
내 이야기에 후임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 그대로 조 편성이 이미 끝난 상태라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내일 오후에 사격장 올라가면 8사로가 고장 났다고 할 거야.”
후임은 이제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7명씩 사격해야 하니까, 마지막 조는 5명이 사격하게 될 것 같습니다.”
“거기에 우리 두 명이 끼어서 쏘는 거지. 니가 나 지원사격 좀 해주고.”
“되겠습니까? 조금 불안하긴 한데….”
사격 실력이 불안하다는 건지, 일이 꼬일까봐 불안하다는 건지 후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해 봐야지. 하루라도 빨리 그 녀석 돌려보내고 싶으면….”
내 말뜻을 이해한 후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근무는 없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간부들 몰래 일을 벌여 놓은 것이 찝찝하기도 했고, 귀신을 보았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생각하던 것만큼 무서운 귀신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울 새벽 초소 근무 서는데 귀신이 나타날 것을 상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내일 할 일도 많은데 잠이나 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온도계를 체크하고 생활관 중앙에 물을 뿌리는 것을 보니 불침번인 것 같았다. 근데 우리 부대에 저렇게 큰 사람이 있었나….
눈을 감으니 이번에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귀찮음 때문에 잠시 고민을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임 녀석을 바라보니 근심걱정 없이 잘 자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다 자기 때문인데, 속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에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게 분명하다고 고개를 흔들면서 생활관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있는 불침번이 주전자를 들고 생활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까 생활관에서 봤던 불침번이랑은 다르게 키가 매우 작았다.
“이상하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앞에는 다른 불침번이 한 명, 아니 두 명 있었다.
“아, 씨. 깜짝이야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나는 불침번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낮에 사격장에서 봤던 귀신이 불침번 완장을 차고 아무렇지 않은 듯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뒤에 서 있던 다른 불침번이 죄송하다고 말했다. 우리부대 병사였다. 자세히 보니 근무 중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오로지 낮에 봤던 사격장 귀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헤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근무도 한 번 서보고 싶어서요….”
“하, 참나.”
실없는 그 목소리에 나는 맥이 빠졌다. 아니, 세상 천지에 부대에서 죽고 나서 근무까지 서 주는 귀신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그리고 귀신은 기본적으로 완장도 잘못 차고 있었다.
“야, 그리고 완장 오른쪽이야. 너 고문관이었지?”
“네? 저 오른쪽에 차고 있는데….”
내 말에 귀신 뒤에 서 있던 다른 불침번이 오른쪽에 차고 있는 완장을 만지면서 말했다. 그리고 귀신은 그 앞에서 허둥거리며 완장을 바꿔 끼우고 있었다.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그만 실소가 나왔다. 그러다 문득 다른 사람 눈에는 이 귀신이 안 보이는지 궁금했다.
“아, 맞다. 너 뭐 이상한 거 안 보이냐?”
방금 전까지 내 눈치를 보던 불침번은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다는 듯 내게 이야기 했다.
더 이상 이야기 했다가는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아니다, 근무 잘 서라.”
나는 화장실에 갔다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격장 귀신이 너무나도 성실하게 생활관을 돌아다니는 바람에 그 뒤로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젠장….”
입에서 욕이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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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있을 때 이것저것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잘 기억이 안나네요 ㅠ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