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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에도시대의 여행
게시물ID : history_142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8
조회수 : 77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2/23 13:58:52

에도 바쿠후가 1612년 법으로 규정한 하타고(旅籠)의 숙박비는 사람이 3몬(文)이었고, 말이 6몬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622년에는 사람이 4몬, 말이 8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여관에서 땔감을 산 경우였고, 땔감을 가지고 간 경우에는 절반만 지불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땔감을 가지고 여행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여행자들은 기친(木賃)이라는 땔감 비용을 하타고에 지불하고 땔감을 샀습니다. 그래서 하타고를 기친야도(木賃宿)라고도 불렀습니다. 나중에 하타고에서 식사를 제공하자 취사 전문의 하타고는 기친야도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 기친야도라고 불리는 하타고야는 싸구려 숙소의 대명사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 하타고(旅籠)는 하타고야(旅籠屋)라고도 불렀고 일반 여행자가 묵는 여관이었습니다. 본래 하타고는 여행을 떠날 때 말 여물을 넣어두는 바구니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숙소에서 여행자가 손수 밥을 해 먹는 것이 많아 대부분의 경우 여행자들은 땔감과 식량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게다가 주로 여행은 임무를 띄고 가는 경우가 많아 그 짐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말을 끌고 여행을 떠났는데 이때 여물을 준비해두고 손님을 기다리는 여관이 하타고야 였습니다.

 

 

하타고야의 숙박비는 차츰 올라 1642년에는 사람이 6몬, 말이 16몬이 되었고, 1718년에는 주인이 35몬, 하인이 17몬, 말이 35몬이 되었습니다. 에도 시대 말기에 이르면 사람이 700몬, 말은 1관(貫) 400몬이나 하는 하타고야도 등장했습니다. 말기에 이르러 하타고야에서 기본적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인데도 이 정도로 비싸졌습니다.

 

 

대부분의 하타고야가 식사를 제공하게 된 것은 겐로쿠(元錄 : 1688-1704)시대부터 교호(亨保 ; 1716-1736)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사무라이들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여행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타고야에도 등급이 생기고, 서비스의 질에 따라 숙박비도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 가령 도카이도의 후츄(府中)의 숙소를 보면, 하타고야에는 상*중*하의 3등급이 있었고 하급에 해당하는 하타고야의 숙박비가 32-45몬에 해당하였고, 두 끼 식사가 제공되면 108몬-140몬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급 하타고야의 경우 숙박비는 48몬-70몬, 식사가 나올 경우는 140-146몬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급 하타고야에서는 1박 2식의 숙박비가 172몬-300몬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 가격은 시중을 드는 여인(매춘도 겸했습니다)을 두지 않는 일반 하타고야의 경우였습니다. 술을 마시면 그만큼 요금은 올라갔고 시중 두는 여인을 부르면 별도로 200몬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600-700몬이나 들었습니다.

 

 

매 숙박소에서는 도이야바(問屋場)가 있었는데, 이곳은 사람가 말이 쉬어가는 중계소 역할을 했습니다. 말 이용 요금은 역마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도카이도의 경우 덴포(天保 : 1830-1844) 연간에 시나가와(品川)에서 가와사키(山岐)까지 혼마(本馬 : 말의 종류)가 136몬이었고, 가라지리(輕尻 : 하타고야에 상주해 있던 짐 싣는 말)가 88몬, 사람을 쓰는 경우는 67몬이었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싼 말도 있었습니다. 오다와라(小田原)에서 하코네(箱根)까지는 혼마가 615몬, 가라지리 433몬, 사람을 쓸 경우에는 331몬이었습니다. 또 하코네에서 오다와라까지는 혼마가 788몬, 가라지리가 515몬, 사람을 쓸 경우에는 390몬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널 경우, 강에는 군사적인 이유로 다리가 놓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카이도의 오이가와(大井川)이나 아베가와(阿倍川) 같은 강을 건널 경우에는 가와고에 닌소쿠(川越人足 : 강을 건너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 1736년에 오이가와를 건널 때 일꾼들에게 지불한 비용을 보면 손을 끌어주거나 목마를 태워주는 등 일꾼이 걸어 강을 건널 때, 표준수위일 때는 48몬, 가슴보다 수위가 낮을 때는 70몬, 그보다 높을때는 80몬, 겨드랑이 가량의 수위일 떄는 90-100몬이었고, 비가 오지 않아 수심이 얕을 때는 24몬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일꾼 1인당 할당된 요금으로, 두 사람이 타는 렌다이(連台 : 손님을 태우고 강을 건너는데 사용한 대)라면 6명, 한 사람이 타는 렌다이라면 4명, 가마 1채는 6명, 사람이 탄 말은 6명, 짐을 실은 혼마는 8명, 궤짝은 8-10명 등 경우에 따라 일꾼의 수가 정해져 있어, 그 인원수만큼 요금을 지불했습니다.

 

물이 너무 불어서 강을 건너는 것이 어려운 경우 며칠동안 머물러야 할 때는 숙박비가 더욱 뛰었고, 다시 강을 건널 수 있게 되더라도 수위가 높아 도와줄 사람을 쓰려면 비싼 값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리고 짚신입니다. 짚신은 한 켤레에 12-13몬이었지만 30-40리 정도를 걸으면 보통 하루에 두 켤레는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이상 예정으로 여행을 가려면 짚신이 몇십 켤레나 필요했습니다. 또 차미세(茶店 : 찻집)에서 잠시 쉴 참이면 찻값이 필요했고, 시장기를 달래려고 떡을 먹으려면 그만큼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또 세키쇼(關所 : 검문소)는 무료로 통과했지만, 통과를 저지당하거나 여성의 경우 까다롭게 조사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검문소를 지키는 관리에게 슬쩍 뒷돈을 쥐어주기도 했습니다. 통행증이 없는 여행자나 여자들에게 특히 까다로웠던 세키쇼도 뒷돈을 쥐어주기만 하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원에 참배를 가려면 시줏돈이 필요했습니다. 이래저래 한번 여행을 떠나면 돈은 엄청 많이 들었습니다.

 

 

※ 출처 : 에도의 여행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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