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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쪽지는 영영 사라졌다
게시물ID : freeboard_14209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유상주인
추천 : 3
조회수 : 12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1/29 23:55:49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꿈을 깼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눈을 뜨니 천장에 아침볕이 걸쳐 있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거짓말 같이 황폐한 꿈을 꾸었다. 마음이 여전히 아픈 걸 보니 와 정말 대단했어.

오른쪽이 묵직해 고개를 돌렸다. A가 내 어깨를 베고 잠들어 있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A의 얼굴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코에 넣었다가 입에 넣었다. 손톱으로 토끼 같은 앞 이빨을 긁었다. 두 손으로 뺨을 눌러 모았다. 입술이 툭 튀어나와 어부바. 그것 참 잘 생겼다. 이렇게 내가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툭툭 결국 깨워버렸다. 야옹아 이것 봐 정말 불쾌한 꿈을 꾸었다. 우리가 헤어졌다니깐. 일러바치듯 털어놓았다.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A가 귀찮은 듯 대답하더니 나를 폭 안았다.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우고 두 팔을 목에 감았다. 이러면 98퍼센트 정도 완벽에 가까운 자세가 된다.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튼튼해 원폭도 견뎌낼 만큼 단단하다. 아. 그래 그게 다 꿈이었다니. 다행스러워 뼈 속까지 행복하다. 

A가 쪽지를 내밀었다. 여기 적어둔 것 가서 사와. 맛있는 거 해줄 게. 그래 배고프다.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주워 입었다. 신용카드와 쪽지를 양쪽 주머니에 넣었다. A가 눈치 채지 못하게 담배도 챙겼다. A는 내가 담배피우는 걸 무척 싫어했다.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제법 볕이 뜨겁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마트를 향했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룩 빨았다 휴우 내쉬고. 가슴팍이 저릿한 게 아 충만하다. 

마트가 보인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이상해. 손끝에 잡혀야할 쪽지가 없다. 카드만 있다. 주머니 속을 다 끄집어내 탈탈 털었다. 그래도 없어 나는 당황했다. 어디보자 쪽지에 뭐가 쓰여 있었더라. 뭐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쪽지를 받아들고 왜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지. 안 돼. 안 돼.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면 찾을 수 있을까. 그럴지도. 그러나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머리가 텅 비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뒤를 돌아볼 자신이 없다. 돌아보면 무언가 무서운 게 있을 것 같다. A가 보고 싶었다. 98퍼센트가 안되면 48퍼센트라도 괜찮으니 다시 안기고 싶다. 나는 왜 A가 준 쪽지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을까. 나는 왜 A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나. 너무 속상하고 미안해, 나는 애기처럼 엉엉 울었다. 

다시 잠에서 깼다. 조용한 천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반 지하에 볕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다행히 날씨는 좋다. 바람도 적당하다. 새삼스레 세상이 참 맑네. 간밤에 꿈을 꾸었다. 마음이 여전히 아픈 걸 보니 와 정말 대단했어. 무언가 애틋하고 아련한 게. 그럼 꿈속에서 꿈이라고 생각했던 건 모두 현실인건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위배되지 않는 것일 테지요. 위배요? 위배죠. 그것은 무엇에 대한 위배입니까. 그것은 진심과 오해의 쌍곡선 법칙에 대한 위배입니다. 진심이면 진심일수록 곧이 곧대로 보이고 들리지 않지요. 아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다시 자볼까. 꿈꾸면 볼 수 있을까. 눈을 감았다, 뜨며 나는 조금 괴롭다. 쪽지를 잃어버리지 말자. 쪽지를 잃어버리지 말아야겠어. 쪽지를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 그러나 쪽지는 영영 사라졌다.




출처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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