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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재야의 대부 김정남,그가 말하는 박종철 사건
게시물ID : sisa_10114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프맨
추천 : 20
조회수 : 183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01/11 12:36:5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5&aid=0002788943


영화 1987의 설경구가 연기한 [민주화 운동의 대부] 이자, 박처원이 기를 쓰고 체포하려고 들었던

김영삼 김대중의 심복. 김정남을 기자가 직접 만나 인터뷰함.


 

1월 8일. 서초동의 개인 사무실에서 접견.


김정남(76세)

*평소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아예 안쓰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었음.

*사무실 전화와 팩스, 지인들과 술자리로만 세상과 만나는 재야인사.


김정남

-기자와 만나 인터뷰를 잡은 스스로를 반성했다.

-다음에 볼까 하고 인터뷰를 미룰 생각도 했다.

-영화는 5일에 봤다. 시사회에 초대되긴 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아 불참했다.

-영화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지만, 영화의 언어로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함께 했던 분들, 영화를 만든 분들께 감사할 뿐이다.


기자

-지명수배자 김정남의 신념은 뭐였는가


김정남

-정의구현 사제단 고 김승훈 신부(1939-2003)께서 87년 5월 18일에 발표한 성명서의 마지막을 인용하고 싶다.

-[이 사건의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고문 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않느냐의 결판이 날 것이다. 또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걷느냐 마느냐의 중대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있다.]

*김정남이 초안을 쓴.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진상이 조작되었다- 는 성명서

 

기자

-절박하고 위태로운 시간이었겠습니다.


김정남

-이부영의 서신을 87년 3월에 받고 5월에 성명이 발표됐다.

-유일한 희망이 사제단이었다.

-내가 쓴 성명서 초안이 3120자라는 사실을 신부님께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으시고 점검하며 무거운 짐을 질 준비를 하신거지.

-신부님께선 평소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라는 말을 즐겨하셨다.

-그 믿음으로 성명서를 읽었을 것.


기자

-지난 30년의 감회가 궁금합니다.


김정남

-서신은 우촌(김정남의 아호) 보시게 로 시작한다.

-이부영이 서울대 정치학과 61학번 친구다.

-내가 한 일을 보면서도 참 오묘하더라

-역사의 손길이라는게 있다고 해야할까

-만약 내가 잡혔다면, 이부영이 영등포 교도소로 이송되지 않았다면

-그 교도관들이 없었다면

-김승훈 신부님이 안계셨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모든게 사람의 힘으로 된 것 같지 않다.

-그런 일이 없더라도 민주화되도록 예정된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영화의 압축속에 많은 은인들이 숨어있다고 함.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실제로 한재동,전병용 두 교도관을 합친 것.(김정남표현: 민주교도관)



기자

-그들은 왜 위험을 무릅썼습니까


김정남

-빈민 운동으로 여러번 구속되며 교도소에서 전병용을 알게 됐다.

-전교도관은 교도관의 열악한 처우와 노동환경 개선을 고민했다.

-내게 조언을 구하며 인연을 맺었다.

-민주화 양심수를 보는 교도관들 사이에서도 민주화 감화 움직임이 있었고, 그들이 큰 역할을 했다.

-전교도관이 구속되며 교도소를 떠나고, 이후 한재동 교도관이 전씨를 통해 이부영의 서신을 전했다.


기자

-그리운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김정남

-고 이돈명 변호사(1922-2011)는 고영구 변호사(81세. 민변 초대회장)등과 수배자를 지켜냈다.

-그리고 우리 도피를 돕다 모든걸 떠안고 구속됐다.

-본인과 가족들까지 나서서 도움을 주신 분들이라 지금도 죄송하다.

-박종철군 사망을 최초 보도한 중앙일보 등 언론 역할도 컸다.

-그간 나의 행동으로 가장 힘든 일을 겪어온 부인과 딸들에게 가장 미안함이 크다.

-6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으로 직장이 없었다.

-어린 딸이 [아빠가 동네 통장 반장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김정남은

-통칭 민주화운동의 비밀병기라는 별명으로 불림.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배후 인물로 구속.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주도.

-민주화운동가 수배자들의 은신처 마련과 수발등으로 막후에서 지원.

-198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 발표문 초안 작성.(국민에게 드리는 글)

-1988년 창간된 평화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당시 신영복(1941-2016)선생이 가족에게 보낸 옥중 서신을

-지면에 싣는 기획을 함.(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발간)


*고은 시인의 평가

-[만인보]에서 언급함.

-해위 윤보선의 뒤에 그는 있었다.

-김영삼 뒤에도, 이돈명, 홍성우 변호사 뒤에도, 함세웅 신부의 뒤에도

-창작과 비평사에도, 천문인협의회의에도 항상 있었다.

-찾을 수는 없지만, 그는 있어야할 때, 있어야할 곳에 항상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평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주화 운동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남은 김영삼 정부에서 22개월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으로 공직을 맞고, 재야로 돌아옴.

(언론으로부터 용공세력이라는 비난을 받음)


김정남

-현실 정치보다는 경세가 쪽의 일이 적성에 맞는다. 


기자

-촛불에 대해 어떻게 보았는가


김정남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촛불은 박근혜의 실정에 대한 반대이자 반작용이다.

-반민주, 반독재를 외쳐야하는 갈등을 아직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움과 갈등이 아닌 화해와 일치로서 촛불을 켜고 만세를 부르는 정치,

-더 높은 차원의 민주사회가 오길 바란다.


기자

-문재인 정부에 전할 말이 있는지


김정남

-초심이 중요하다.

-혁명은 나부터 새롭게 되는게 출발이다.

-지금의 정부는 스스로 먼저 달라지려는 것보다, 남에게 달라지라 하는 것 같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1987년의 초심 맑았던 정의로움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국민 지지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기자

-관객과 시민이 어떻게 기억하길 바라는가


김정남

-진실은 가둬둘 수 없다고 믿으며 살았다.

-내가 해야할 일에 열정을 다했다.

-그걸로 만족하는 보통의 사람으로 기억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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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은 일을 했고, 영화에서도 김대중 김영삼의 핵심 인물로 나오는 인물이


왜 현대사에서 부각되지 않았는가 궁금했는데 스스로 재야로 돌아가 은거했기 때문이었군...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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